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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안동-안동의 공공디자인

  • 박정열(잇다 대표)
  • 2021-05-26 오후 3:4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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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편안한 동쪽 고을 안동에서의 삶은 말 그대로 편안하기 그지없다. 날씨도 온화하고 자연재해도 적으며 예의범절을 중시하는 시민의식 탓에 험악한 범죄도 적은 편이다. 태백에서 발원한 낙동강이 굽이굽이 흘러 안동에 이르면 점잖게 뒷짐 지고 걸어가는 선비처럼 강줄기도 유유하게 속도를 늦춰간다.

서울에서 디자인회사를 다니다 안동으로 떠나온 지 10년쯤 되니 이젠 완벽한 안동사람이 된 것 같다. 이 도시를 너무 잘 알게 된 필자의 직업은 여전히 디자이너다. 기업이나 제품의 브랜드나 광고, 홍보물, 지역 관광기념품 등을 디자인하며 안동에서의 사업을 영위하고 있다.

사실, 이곳에서 디자인 관련 사업을 한다는 것이 참 어렵다며 토로하고도 싶지만(과거엔 그랬지만) 지역의 특성을 오랜 기간 체득하고 나니 그런 마음이 사라진다. 특정 사람이나 특정한 집단만의 문제면 불만을 제기하고 극복하려 애를 써보기도 하겠지만, 이 도시 공간 전체를 지배하는 공기의 무게를 알고 나면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개인은 집단에 길들여지고, 집단은 사회에 길들여지고, 사회는 시간과 역사에 길들여져 고유한 문화의 양태로 존재한다. 지역의 고유한 문화는 끈적끈적한 젤리 같은 질감으로 하나의 생활문화권을 만들어내고 우리는 그 안에서 대체로 비슷한 문화적 맥락을 가지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designare : 설계, 기획, 정의하다, 조형적으로 구체화하다

디자인이란 설계, 기획이란 단어에서 비롯된 개념이다. 설계와 기획은 새로움을 전제하고 있으며 개선과 발전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진보적인 개념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철저히 상업적이고 대중적이면서도 창의적이고 미적인 아름다움에 편리함까지 추구해야 하므로 공부를 하는 과정 자체가 복잡하고 다차원적이다. 그러한 과정에 단단히 훈련된 디자이너가 ‘안동’같은 한국정신문화의 수도라 불리는 곳에서 적응해나가는 과정이 편안하진 않다.

많은 기업이 밀집하거나 여러 산업이 발전하여 다채로운 디자인 수요가 있는 곳이 아니다보니 디자인산업이나 관련 시장이 발달할 수가 없던 탓이 가장 크다. 또한 인구의 규모나 고령화지수 등 인구학적 특성으로 봐도 수준 높은 최신 트렌드의 디자인이 요구되지 않는 부분도 존재한다. 도시 특유의 보수적, 안정적 분위기는 상식과 틀을 뛰어넘는 디자인을 요구하지 않으며 소화를 할 수도 없기에 디자이너들의 경쟁력 또한 수도권에 비해 뒤쳐질 수밖에 없다.

디자인 일감의 발원지라 볼 수 있는 지역 관공서에서 요구하는 디자인과 그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가는 지역 디자이너의 조합은 결코 상향 평준화를 향해 가지 않기에 동시대성의 관점에선 결국 뒤쳐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렇게 안동이라는 지역과 디자인이란 학문의 속성을 나열하여 비교하며 그 역설적 관계와 디자인의 필요성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근본적으론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선 편안함 보단 도전을 선택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한 하필 디자인을 들먹이는 이유는,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요소 중 한 가지가 ‘창의’이며 디자인의 가장 핵심요소 또한 ‘창의’이기 때문이다. 창의는 단순히 디자인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일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여러 가지 부분에서 효용성을 나타내는데 구체적으로는 공공디자인, 디자인과 관광시대의 도시경쟁력, 삶의 질과 정책디자인, 시대상을 반영하는 기록물로써의 디자인 등을 생각해볼 수 있다.

필자의 경우 지방 도시에서 통용되는 디자인이란 개념을 단순히 광고의 역할을 하는 시각디자인물의 기획과 제작이라는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라 본다. 시각적이고 기능적인 모든 부분에서 기존의 것을 개선하고 대중적 효용성을 가지게 하는 디자인의 근원적 속성을 사회 전반에 대입하여 생각하는데 그 첫 번째로 안동이라는 지역과 공공디자인에 관한 단상을 펼쳐보고자 한다.

 

안동의 공공디자인

도시 공간에서 공공디자인은 텍스트로 기록되는 부분과 이미지로 기록되는 부분, 입체물로 존재하는 부분 등 어떤 형태로든 사람들의 시각을 자극하고 공공적 효용성을 가지기 위해 존재한다.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광고 현수막, 행사 포스터에서 좀 더 영구적으로 활용되는 간판, 건물의 디자인, 공공시설물의 디자인까지 모두 제각각의 필요에 따라 공공영역의 일부분을 채워나간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당시 유행하는 패턴이 가장 민감하게 반영되는 영역으로 도시의 얼굴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공간이 주는 첫 인상에서 가장 많이 차지하는 부분이 자연환경이라면 그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인공적인 영역에서의 모든 부분은 디자인이 만들어 내는 부분이다. 한국 도시공간의 경우 가장 첫 번째로 눈에 띄는 부분은 단연 간판일 것이다. 흔히 공공디자인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요소가 간판 정비사업이기도 하다. 상업 건물의 경우 건물 외관 면적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기도 하는 간판은 가히 도시의 얼굴이라 부를 수 있다. 당대에 유행하는 서체들이 다양하게 망라되어 보기에 따라서는 지저분해 보이기도 한다. 또 한편으론 각각의 개성이 있어 보는 재미가 있다고도 한다.

과거 서울을 필두로 공공디자인 광풍이 불었을 당시 해당 지자체만의 가이드라인을 통해 간판을 정비하여 일괄적인 서체와 디자인으로 통일감을 확보해보기도 했지만, 비판 의견이 만만치 않았다. 깔끔해 보이는 장점이 있긴 했으나 너무 천편일률적인 디자인으로 개성이 상실되었다는 비판이 크게 일자, 현재는 디자인은 다르되 간판의 재질과 형태만 동질성을 확보하는 방법으로 바뀌었다. 뭔가 비슷한 거 같지만 제각각 다른 디자인으로 해당 업체의 정체성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공공디자인- 간판

간판의 경우 대부분 전문업체에서 제작을 하는데 그 규모가 영세하고 디자인적 전문성을 갖추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디자인되는 경우가 많다. 흔히 말하는 ‘간판집’의 실상이 그렇다. 디자인적으론 점수를 매기고 싶지도 않은 디자인들이 도시 공간에 버젓이 걸리는 것이다. 마음 같아선 공짜로 디자인을 해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했지만, 나중엔 마음이 바뀌었다. 나름 디자인 전문가라 불리는 사람의 개인적 감성과 취향을 거쳐 제작되는 간판보다는, 가장 대중적인 일반인의 눈높이에 맞춰 제작된 간판이 가장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해당 도시가 보여주는 가장 솔직한 언어이자 가장 솔직한 동시대성의 표현이라 생각한다. 억지로 예쁘게 만들어진 간판들은 왠지 거짓말을 하는 것 같고 그 또한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디자인으로 억지웃음을 짓고 있는 가식이 느껴진다.

 

역사적 맥락에서 살펴보면 과거 조선시대나 그 이전부터의 간판은 현판이라는 이름으로 양반집의 입구나 특정한 기능을 하는 건축물의 입구에 걸려 있다. 조선시대의 경우 집주인의 유교적 이상향을 반영하여 지은 이름을 내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그 뜻이 깊고 심오해 학문적으로도 충분한 연구대상으로 인식된다. 나름대로의 학문적 브랜드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상업공간의 경우 술집이면 酒(주) 약방이면 藥(약) 등 근본적 기능을 나타내는 한자를 내거는 정도로만 존재했지 구체적으로 다른 경쟁업체와 차별화된 브랜드 개념의 이름을 사용하진 않았다.

물론 실제로 브랜드개념이 담긴 간판의 역할을 한 현판들이 존재했을 지도 모르지만 큰에서만 보자면, 양반들에 비해 천대 받았던 상공업에 종사하는 일반 양민들에게 그러한 브랜드개념이 생길만한 사회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아마 조선후기 서양문물이 들어오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본격적으로 상공업이 발달하면서부터 자연스레 오늘날과 유사한 간판의 형태들이 생겨났을 것이다.

 

     

  ▲2020년 안동시 간판 정비사업으로 교체된 간판(ⓒ박정열)                  ▲간판 정비사업에 참여하지 않은 간판(ⓒ박정열)

 

공공디자인- 공공시설물

간판과 더불어 공공디자인을 구성하는 요소 중 공공시설물을 생각해볼 수 있다. 버스정류장, 벤치, 가로등, 파고라, 휀스, 멘홀 등의 공공시설물이 있는데 대부분 중국산의 수입품이 활용되거나 몇 안 되는 시설물 제작업체를 통해 공급이 되다보니 어느 지역을 가나 비슷한 모습들을 하고 있다.

앞서 다루었던 간판집과 유사한 상황이다. 또한 공공시설물의 특성상 다양한 디자인을 적용하거나 지나치게 개성이 강한 디자인을 수용하기 힘든 부분도 있다. 누가 보더라도 모나지 않은 디자인을 추구해야 하며 지나치게 눈에 띄는 디자인은 시각공해를 유발하므로 제약사항이 매우 많다는 특징이 있다. 깔끔하고 무난하면서도 해당 지역의 정체성을 담아 잘 디자인된 주문 제작품이 설치가 되면 도시 브랜딩이나 관광의 관점에서 외부인들에게 좋은 시각적 효과를 전달할 수 있을텐데, 그렇지 못한 현실이 안타깝다.

 

지역의 공공디자인은 어떻게 확립해 나가는 게 좋을까?

먼저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 예를 들어 안동의 공공디자인의 목적은 무엇이어야 할까? 외부 관광객들에게 임팩트를 줄 시각적 효과에 방점을 둘 것인지 시민들의 편리성에 방점을 둘 것인지 등의 목적성이 분명해야 한다. 필자의 생각엔 안동이 관광거점도시에 선정된 만큼 관광에 방점을 둔 공공시설물 디자인 체계 확립이 필요하다고 본다. 안동의 핵심 정체성은 자타공인 전통문화이며 외부인들 또한 그 부분에 대한 기대감으로 안동을 방문한다. 그렇다면 안동은 보다 확실히 맞춤식 디자인을 할 필요가 있다. 수요 파악을 확실히 한 다음 거기에 가장 잘 맞는 최적의 공급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안동은 수요자 중심이라기보다는 공급자 중심의 콘텐츠와 환경을 제공했고 여전히 그런 기조가 유지되고 있다. 특히 문화재와 관련된 공급량이 워낙 많다 보니 유연하게 대처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부분보다 실수요자들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데 있어 안동은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가의 반문을 해볼 필요가 있다.

 

안동은 하회마을과 도처에 산재한 고택들을 제외하고 전통의 분위기와 이미지를 오롯이 즐길 수 있는 공간이 없다. 전주의 한옥마을처럼 압도적인 한옥 비주얼을 자랑할 수 있는 집약된 공간이 없으므로 전주와는 다른 접근을 해야 한다. 안동의 캐치프레이즈가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 이므로 정신문화적 가치를 어필하는데 중점을 두면 좋을 것이다. 도처에 흩어진 명소들 모두 명상과 힐링에 방점을 두면 충분히 어필 할 수 있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보물지도를 보고 보물을 찾아 모험을 하듯이 안동여행도 특별한 가치를 찾아 떠나는 모험의 맥락으로 정의하고 전체 관광의 컨셉을 보다 일관성 있게 체계를 확립하여 설계하면 수요자의 만족도 또한 높아질 것이다. 명소들이 도시 외곽 곳곳에 흩어져 있다는 단점을 역으로 이용하여 흩어진 명소들과 이들의 거점공간인 도심공간으로 공간을 구분하고 각 공간의 기능과 역할을 보다 명확히 설정할 필요가 있다.

단점을 장점으로 바꾸는 작업에 심혈을 기울여야 안동 관광의 미래가 보일 것이다. 공공시설물 디자인에 관한 이야기를 하던 중 구체적관광 플랜까지 꺼내게 된 이유는 디자인의 연계성을 통해 도시의 핵심 정체성을 완성도 있게 가꾸기 위함이다. 시설물의 디자인을 도시 브랜드형성에 기여하는 시각적 장치로 볼 수 있는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가장 앞서 이루어져야 할 일은 도시 브랜드의 확립이며 브랜드의 일관된 마스터플랜에 의해 하향식으로 디자인 플랜을 세운 뒤 공공시설물들을 그룹별로 나누어 세부 디자인을 적용하면 될 것이다. 간판류, 버스정류장, 택시승강장, 가로등, 현수막게시대, 벤치, 광고판, 안내판 등의 공공시설물은 도시의 경관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므로 일관된 컨셉의 디자인으로 하나의 목표점을 향해 가야한다. 목표가 없는 디자인은 머지 않아 길을 잃고 생명도 잃게 된다. 

 

안동스러운 디자인으로 안동을 더욱 안동스럽게 가꾸어 나가야함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러한 일을 구체적으로 기획하고 추진하여 실행할 기본적 철학을 지자체 차원에서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데 현재 안동의 경우엔 그런 모습을 포착하기 어렵다. 안동만의 공공디자인을 확립하기 위한 조례를 제정하고 관련 업체들을 찾고 협력하여 상생해나갈 동력을 갖추어 안동이란 도시의 경쟁력을 보다 높이 끌어올리는 일이 앞으로의 관광시대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일이 될 것이다.

박정열(잇다 대표)
2021-05-26 오후 3:4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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