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의 일인가요? 서상일 선생이 달성군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나왔던 게? 그 당시에도 일이 있었죠 선생님께?
그러니까 그게 한민당 후신이지. 안재홍 선생하고 이청천 장군하고 만든 게 민주국민당인데 이승만에 대한 대항 세력이었어요. 서상일 선생이 달성군 보궐선거에 출마를 하시고 나는 민주국민당 경북도당 사무차장을 맡아서 당사 안에서 거의 먹고 자고 할 때였어요. 자유당에서는 이승만이 또 대적할 사람을 내려 보냈는데 배은희라는 사람이었어요. 완전히 경찰 선거를 했었죠. 그때 나는 선거 사무를 돌보면서 했는데 이승만이 북진통일을 주장할 때입니다. 평양 가서 점심 먹고 압록강 가서 저녁 먹고 이러면서 북진통일을 주장했고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있을 전쟁 중이었죠. 그래서 나는 이건 아니다. 이건 평화통일을 해야지 무력통일은 안 된다 민족의 희생이 너무 크기 때문에 평화통일을 해야한다고 생각했죠.
그러면서 선거운동 같이 하는 사람들과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경찰에서는 이걸 가지고 나를 보안법 및 선거법 위반으로 입건했어요. 또 남대구 경찰서에 구속이 되었는데 당시 검사가 묻더라구요. '왜 평화통일을 주장하냐? 국시가 반공통일인데. 반공통일하자면 전쟁을 통해서 북한을 타도해야하는데. 왜 또 평화통일 주장하냐?'면서 서상일 선생이 선거운동 때 유권자들한테 담배도 돌렸다는 둥 조작을 하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보안법과 선거법 위반으로 잡혀들어갔어요. 나를 투표일이었던 6월 5일까지 우려먹더라구요. '서상일의 비서 강창덕, 선거법 위반으로 엄중 구속문책 중이다'라는 내용을 각 투표소 마다 붙여놓고는 서상일한테 표찍어 봐야 안되니까 찍지 말라면서. 일단 선거 끝나니까 내보내 주대. 허허. 며칠 지나니까 그래 뭐기소유예, 이래가 내보내더라고 그게 네 번째였죠.
이승만 저격 사건과도 관련이 있다고 어딘가 자료에서 봤습니다. 사실입니까?
1952년 4월쯤이었을 겁니다. 2차 내각제 개헌운동이 장택상의 잘못된 선택으로 실패로 끝나버렸어요. 서상일 선생을 모시고 부산에서 내각 개헌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결국 부결됐어요. 이승만이 장택상을 국무총리 서리로 지명을 했는데 그걸 받아들일 것 같다는 소식을 듣고는 서상일 선생하고 조병옥 박사 등 개헌파들이 장택상 씨를 찾아갔어요. 찾아가서 제발 좀 이승만 말 듣지 말고 끝까지 우리 한 대열에서 내각제 개헌하자 그래서 당신이 국무총리 할 수도 있다. 독재치하에서 국무총리가 뭐 좋으냐 만류를 했지만 장택상 씨는 끝끝내 자기 고집대로 해버렸어요. 2차 개헌 운동도 실패로 돌아가고 참 앞이 캄캄했지요. 한국 정치가 암담해졌는데. 그때 김시현 선생이 서상일 선생을 찾아와서 이승만 저격 문제를 의논 했어요. 이승만이 살아있는 한 도저히 우리나라를 바로 잡을 수가 없다 결국 이승만을 처형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극비리에 논의를 하고 저격을 준비하게 됐죠. 누구를 저격수로 하느냐 아주 단단한 사람을 구해야 안 되겠나. 이런 이야기를 두 어른이 하실 적에 내가 그 말을 알아듣고는 자청을 했죠.
내가 한 번 해보면 좋겠습니다 하니. 총 쏠 줄 아냐고 하시길래 일제 때 군사훈련도 조금 받아보고 해서 안다고 했죠. 사실 나는 이번 기회에 내 목숨 한 번 바치고 싶습니다 라면서 임무를 달라고 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입대하라는 영장이 나왔어요. 그것도 서상일 선생 집주소로 나와버렸지요. 내가 그래도 무보수지만 정치요인에 대한 경호원이 되어있는데 영장이 나올 리가 없다고 길을 찾고 있었는데 결국 제주도 훈련소까지 끌려가버렸습니다. 그래서 나는 제주도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고 있었고 부산서있었던 6.25 행사 때 저격사건이 있었지요. 김시현 선생의 지시로 유시태라는 분이 저격을 했는데 권총이 불발탄이 되어서 실패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내가 영장만 안나왔으면 그 자리에 있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다섯 번째 투옥은 언제였습니까?
장면 정권 때였습니다. 장면 정권이 2대 악법을 제정하려고 했습니다. 2대 악법이 뭐냐 하면 과거에 없었던 반공법을 만들려고 했고 또 데모를 막으려고 데모 규제법을 입법하려고 했어요. 그래서 그 두 법을 우리는 악법이라고 하고 2대 악법 반대 투쟁을 했습니다. 대구에서는 61년이었습니다. 4월 4일 대구에서 각 운동 단체가 총망라 되어서 공동투쟁 연회를 만들어서 2대 악법 반대 투쟁을 했습니다. 그게 4기 데모인데 대구에서도 유사 이래 가장 큰 데모였다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 만경관에서 중앙통그 사이에 모두 수천 명이 모여 있는데 그래서 대구 역전으로 대회의장으로 가려고 하는데 못 가게 막았어요. 밀고 당기고 뭐 참 육탄전이 벌어졌어요.
대구 역전에 먼저 골인한 사람들 몽땅 실어다가 대구 경찰서로 갔고 그 다음에 대구 형무소로 갔는데 그게 다섯 번째예요. 검사가 심승택인데 내가 잘 싸웠어요 그래서 기소유예 받고 나왔죠. 어떻게 잘 싸웠나 하니 데모에 참가한 사람들 사진을 내 놓고 날 찾는 거야. 내 사진이 있기는 하더라도 옆에서 찍힌 것인데 나만 알아보겠더라고, 근데 심승택 검사는 모르는 거야. 그래서 넘어갔어요. 아이고, 이제 됐다 싶어 물증이 없어졌으니 그때부터 검사하고 막 싸웠습니다. 경찰이 나한테 맞았다고 하는데 그래서 공무집행방해 아니냐라고 하는데 나는 막 따졌어요. 내가 영남일보와 대구매일 신문기자 출신이다 거짓말 하지 말라고 했죠. 검사한테도 마음대로 해보라고 큰 소리를 쳤죠 그랬더니만 그이튿날 밤에 출소시켜 주더라구요. 기소유예로…….
신문기자를 하셨었나요?
내가 어떻게 해서 하게 됐나 하면 1956년 5월 15일 대통령 선거가 있었습니다. 그때 자유당은 대통령 후보 이승만 부통령 후보 이기붕이 출마를 했죠. 민주당은 대통령 후보 신익희, 부통령 후보 장면이었고 진보당은 대통령 후보 조봉암, 부통령 후보 부산출신 이학박사 박기출 이렇게 선거를 치르게 되었죠. 나는 조봉암을 지지하고 지원하고 싶었어요. 당시에 진량중고등학교 교사 생활 1년도 안되었던 때인데 부부교사였던 아내는 그냥 두고 나만 자직하고 나왔어요. 진보당 준비 위원회에 가담하고 선거때 경산군 책임을 맡았죠. 말하자면 경산군 선거본부장이야. 전국 투표율에서 경산이 최고 높았습니다. 76% 가까이 나왔거든요 대구가 한 74% 정도 나왔어요. 조봉암 후보 표가 삼만표가 넘었어요. 이승만이 만표를 좀 넘었었지요. 내가 참 그때 흐뭇했어요. 가장 한스러운 건 이승만저격 못한 거였고, 가장 흐뭇하게 생각하는 건 조봉암 표가 경산 내 고향 땅에서 전국 최고 득표를 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 때문인지 자유당에서 자꾸 날 괴롭혀서 한때 부산 가서 피신 겸 해서 한 몇 달 있었습니다. 9월에 다시 대구로 왔는데 영남일보에서 공채기자를 뽑는다고 해서 응시를 했습니다. 학과시험은 1등을 했는데 나이가 서른 가까이 되니까 일선 기자로서는 부적격이었는데 다행히도 백기만 선생이 내 답안지를 보고는 논술실에서 일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붙어서 견습기자 거쳐서 한3년 가까이 되는데 그게 58년인가 그랬지요. 영남일보 사장이 대단히 좋은 분이셨고 민족주의자들도 많이 찾아오고 한 분이셨는데 내외방직을 운영하면서 어려우니까 자유당에 들어가게 됐어요. 나더러 자유당에 유리한 기사를 쓰라고 하는거야 그래서 마음에 안 들어서 그만두고 나왔지요. 그러다가 두어 달 지나고는 대구매일 최주필이 나보고 같이 일해보자고 해서 하다가 4.19 끝나고 5월에 옷을 벗고 나왔습니다. 언론계 생활하면서 그래도 좀 흐뭇하게 생각하는 건 그 자유당 말기의 부정선거를 특파원 생활 하면서 좋은 기사를 많이 썼다는 겁니다.
▲경산 코발트광산 유골(ⓒ강창덕)
경산 코발트 광산 학살사건도 취재를 하셨죠?
대구사범을 나와서 진보적 성향이었던 편집부장이 경산코발트 광산에 사람이 많이 학살당했다는데 그걸 우리가 세상에 한번 밝히자면서 강창덕 기자가 취재를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어요. 평산동으로 지프차를 타고 갔습니다. 일제 때 코발트 광산을 했던 곳인데 폐광에서 수천 명의 사람이 죽었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게 또 내가 신문기자하면서 또 한 번 아주 통쾌하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경산 코발트 광산에 가서 취재를 한 후에 이승만이 반인도적이고 이걸 참 학살당한 사람은 원혼이 되어있고 유가족들은 어떻겠나 싶어서 그 길로 기자를 그만두고 피학살자 유족회를 발족시켰어요. 1960년 5월6일쯤인데 이승만 하야 후에 열흘 쯤 됐을겁니다.
코발트 광산 기사는 5월 22일자였구요. 신문사 그만두고 내가 고향 가서 만든 것이 '경산군 피학살자 및 피해자 실태 조사회'였습니다. 각 면에다 연락소 간판을 붙여놓고 전단지를 만 장 정도 만들어 돌렸습니다. 그래서 그게 모인 게 약 삼백 오, 육십 장 쯤 되더랍니다. 실태 조사회가 끝나고 난 후에 유족회를 만들어서 제2 공화국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기 8월 15일 이전에 합동 위령제를 지냈어요. 유가족, 피해자 등등 500여 명 정도 모였어요. 경찰들도 물려놓고는 합동 위령제를 무사히 끝냈는데 그날은 참 정말로 모두가 다 울음바다가 됐지 뭡니까. 그게 아주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정치 활동도 좀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야당으로서 4.19 공간에 결성된 게 사회대중당입니다. 완전히 진보는 아니었지만 나도 진보적 정당에 내가 가서 정치 활동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해서 사회대중당에 입당 후 경산군당위원장이 됐습니다. 7.29 총선거때인데 그 당시 김시현 선생이 안동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서상일 선생이 대구을구에서 당선되었을 때입니다. 나도 상향식으로 군당과 경북도당 공천이 확정되었는데, 중앙당 공천이 당연히 된 줄 알고는 군청 선관위에 등록까지 하고나서 선거운동을 하고 다녔어요. 그런데 나중에 느닷없이 이형우라는 사람이 자신이 공천을 받았다면서 선거에 나섰더라고요. 군당이나 도당 공천에서 떨어졌던 사람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참모들이 무소속이라도 가보자고 했지만 나는 후보 등록한 걸 취소하고 공탁금 50만원 날려버렸죠. 그래서 입후보했다가 선거운동도 하다가 도중하차가 되어버렸어요.
여섯 번째는 어떤 일이었습니까?
1961년 5월 10일이었던 것 같네요. 사회당 경북도당 주최로 만경관 앞에서 남북 학생회담 촉진 대구 시민 궐기대회를 열었어요. 그때 서울대학이 중심이 되어서 남북학생회담을 하자고 제의를 안 했나. 그때 구호가 '오라 남으로, 가자 북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였어요. 15일 오후에 올라가서 서울에서 하룻밤 자고 있는데 5.16이 나버렸어요. 5.16이 났는데 온통 혁명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5.16은 쿠테타인데 확실한 정체를 좀 밝혀야 안되겠냐고 했었죠. 그래서 이리저리 알아보니 옛날 여순사건 때 그때 남로당 프락치가 되서 까닥하면 죽을 뻔했는데 용케 살아 소장까지 된 박정희가 쿠테타음모를 꾸몄다는 겁니다. 안되겠다 싶어서 빨리 대구로 내려가서 사회당의 모든 조직문서를 빨리 없애 버려야 되겠다고 급히내려왔는데 대구에서 딱 잡아버리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대구 경찰서를 데리고 가서 군사재판을 받게 됐습니다.
공소장에 보니 죄목이 남북 학생회담 촉진 시민 궐기대회에서 강창덕이가 도당 조직위원장으로서 궐기사를 했다 그래서 유죄다 이러는 겁니다. 합법적인 행사였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소급법이 적용되어서 교원노조, 피학살자유족회, 사회당, 통사당, 교원노조 할 것 없이 다 잡아 넣어 버린 거예요. 그게 여섯 번 째인데 7년 징역을 받고 2년 8개월을 살았습니다. 결국 나중에는 무죄를 받았어요.
재야에서 민주화운동이나 민족운동을 하면 제도권보다 더 고통스럽고 배도 고프고 하셨을텐데 어떻게 견뎌 내셨나요? 그간 사모님이 고생을 많이 하셨겠네요.
그래 내가 어떻게 내 가정을 지탱했나 하면 다 내 아내 덕분입니다. 초등학교 교사였는데 백수인 나와 결혼을 하고는 다시 복직을 했지요. 애 엄마가 애들 다 키우고 했어요. 내가 만든 문자 중에 '위방무취 가무면'이라고 나라를 위해서는 부끄러움이 없는데 가족에 대해서는 면목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내가 야생마처럼 뛰어다닐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제일 컸던 사건이 인혁당이었겠습니다?
그러니까 그 인혁당 재건위 사건도 고문 조작한 사건인데 역시 본질은 유신반대운동입니다. 그건데 이걸 국가보안법, 반공법, 내란예비음모, 긴급조치1호, 긴급조치 4호 위반. 죄목이 다섯 가지입니다. 무기징역 구형에 무기징역언도였어요. 2심에도 그대로, 3심도 그대로 선고되어서 8년 8개월 복역했습니다. 내가 했던 활동이 67년에는 반독재 재야민주세력 단일후보 추진위원회 라는 게 있었습니다. 대선에서 난립한 야당 후보들이 힘을 합해서 박정희를 낙선시켜야 되니 후보 단일화 하자는 거였고 그 운동을 대구의 진보계, 혁신계가 중심이 되어 진행했습니다.
내가 대변인을 맡고 의성 출신의 유시벽 선생을 대표로 모시고 난민전의 이경은 동지가 또 대외 섭외 관계를 맡고. 또 4.19때 대구대 학생으로 용감하게 활동했던 경만진 동지하고 모두 그렇게 어울려서 단일후보 운동체를 만들었지요. 결국은 윤보선 선생을 단일 후보로 만들어냈습니다. 이래가지고 단일후보 운동을 했는데 결국은 또 실패 안했습니까. 실패 하고 난 후에 고민을 하다가 노동운동으로 방향을 바꿔야 되겠다 싶어서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노동운동도 제대로 못한게 통혁당 사건이 터졌을 때 나는 '남조선 해방전략당'에 가담을 했었는데 잘못될까봐 그 길로 다시 서울을 탈출해서 부산으로 갔습니다. 부산서 1년을 지내다가 주민등록이 없어서 고향으로 다시 올라갔는데 거기서 경산경찰서 정보과 형사 두 놈이 쫓아오더라구요. 하양지서로 데리고 가서는 하는 말이 나더러 이북에 다녀 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부산 살다 주민등록 때문에 왔는데 생사람 잡지말라고 했죠. 마음대로 조사해보라고 했어요. 12시 넘어서 까지 조사를 받았는데 나중에 보니 피의자 심문조서가 아니고 소재 확인 조사였어요. 그래서 마음을 놓고는 주민등록증이나 만들어 달라고했죠. 그러고는 대구로 다시 돌아 왔습니다. 박정희가 통일주체국민회의를 만들어서 위수령을 발동하고 그러더라고. 그때부터 반유신헌법운동이 일어났는데, 우리는 대구백화점 안에서 민주수호경북협의회를 만들어서 운영을 하다가 전부 폐쇄당하고 그 다음부터는 위장사업을 하면서 지냈어요. 와룡산에서 염소목장을 운영하면서 겉으로는 장사를 하고, 실제로는 유신반대운동을 했습니다. 결국 염소농장도 그만두고 지하신문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신문 이름을 참소리 그래서 업체 이름은 참소리사로 정했죠. 내가 창간사를 쓰고 했는데 또 그 놈들이 냄새를 맡은 겁니다. 창간도 못하고 긴급조치로 모두 체포됐어요. 그게 인혁당 재건위사건입니다.
1974년 4월 민청학련사건이 일어났었는데 연관이 있었던 건가요?
4월 25일인가 그래요. 중앙정보부장이 민청학련사건으로 기자회견을 하는데 배후가 인혁당 그룹이다 이거야. 아무래도 나한테도 불똥이 날아올 것 같아서 그날 밤에 보따리 싸서 내 누이동생한테 돈 백만 원 얻어서 또 부산으로 도망갔습니다. 나중에는 매부가 형사들한테 들볶여서 부산까지 찾아왔었지요. 일가친척들 모두 들볶았던 모양입니다. 부산에 있는 양복점에서 담배 한 대 피고 있는데 거기서 그만 답싹 붙잡혀버렸어요. 그런데 수첩을 버려야되겠다 싶어서 내가 가짜로 변소에 좀 가서 대변 좀 봐야 되겠다고 갔는데 문을 열어 놓으라는 겁니다. 그 길로 붙잡혀 올라왔어요 남대구 경찰서로. 그날 밤새도록 고문을 받았습니다. 몽둥이 찜질은 기본이었고 나무벤치에 묶어 놓고 때리면서 유신반대했다고 실토하라는겁니다.
나중에는 물고문하더라고. 주전자에 물을 가져오더니 콧구멍에 물을 넣고 고춧가루도 조금 넣었는 모양이야. 좀 맵더라고. 그리고는 내가 기절해버렸어요. 얼마 지났는지 하튼 일어나보니까 자기들이 조서를 다 만들었다고 하면서 내가 반 혼수상태에 있을 때 내 지장을 찍었어요. 그 이튿날 우리 집 가택 수색하러 가서는 헌 라디오 하나 있는 거 그거 들고 나오더니만 그게 나중에 내가 북한방송 들었다고 그게 증거라면서 그렇게 들어간 게 검사 구형이 무기징역이었습니다. 내가 활동하면서 사람들을 포섭하고 유신반대 데모기사를 잘 나오도록 주동했다면서 군법회의에서 자기네들 마음대로 출입제한 시켜놓고는 강창덕한테 포섭됐다고 분명히 말하라면서 다른 증인들을 심문한겁니다. 아니, 나중에 구형하는데 무기야. 깜짝 놀랐잖아. 일반 재판 같으면 뭐 재판감도 안되는데 공소장 보면 염소장사하면서 위장사업을 했고 참소리에서 지하신문을 발행하려고 했다. 이게 주 공소사실인데 나하고 이경환하고 나경일하고 셋이 인혁당과 같은 목적의 단체를 만들었다 이거야. 1심, 2심 모두 똑같고 대법에는 접수만 하고는 재판도 안했어요. 결국 8명이 판결하고 그 이튿날 18시간만에 전부 다 집행을 했는데. 그래 유신반대 사건 때 무기징역 받은 경우가 그겁니다.
8년 8개월 복역하신 거죠?
그래 징역 살다 나와 보니 뭐 할게 있나? 집사람 만나보니 빚투성이었어요. 할 수 없어서 살던 집 처분하고 옛날 양계장 했던 자리에 임시로 만들어놓은 방에 애들 옮겨놨는데 형편이 없었지요. 애들은 아버지 오면 뭐 좀 나을까 싶었겠는데, 그래서 나도 뭔가 해야 되겠다 싶어서 아파트 경비원 자리를 구해서 일을 시작했어요. 그렇게 7개월쯤 하고 겨울 보낸 후 이듬해 그만 뒀어요. 또 백수 생활이었는데 6월항쟁이 터진 거죠. 그때부터 민족통일 재건운동, 전민련운동 그리고 민주화운동 세대들 학생운동할 때 같이 다니면서 한마디씩 하고 지냈죠. 노태우 대통령 때 잔형 면제 사면을 받았는데, 복권 사면은 못 받았어요. 우리 인혁당 재건위 그룹에는, 민청학련 쪽은 전부 다복권 사면까지 돼서 이철이고 유인태고 전부 다 국회의원 해먹고 그랬는데 우리는 안 되더라고, 그 이후로도 계속 감시만 받고 살았죠.
평생 저항 운동을 하시다가 결국은 무기징역까지 받고 집행정지 나오고 잔여형 면제까지 받긴 하셨는데 어찌됐든 그때까지유죄였던 거죠?
그게 2006년인가 2007년인가 그랬어요, 재심이. 가톨릭정의구현 사제단 사람들이 우리한테 관심을 많이 가졌었어요. 가톨릭인권위원회에서 우리 문제를 재심해보자고시작을 했어요. 결국 무죄 판결이 났는데 생각도 못했던 일이었지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싶고 사람이 멍해지더라구요. 이게 진짜인가 가짜인가 내가 꿈을 꾸나, 뭐하는 건가 싶을 때가 있어요. 배상금도 받게 됐죠.
▲ 강창덕 선생(ⓒ안동MBC)
근데 그 배상금 청구해서 받고 난 다음에 또 문제가 생겼더라고요.
부당이득이었다고 반납하라고 하는 거였어요. 내가 물론 청구를 했으나 무죄가 나서 한 건데 말입니다. 기가 막혀요. 배상법에 의해서 32년간에 대한 이자를 계산해서 2심에서 판결했는데 대법까지 가려면 언제 끝날지 모르니까 가집행을 신청한 겁니다. 그래서 지금 어떻게 됐나하니 받아서 가집행 받아서 빚도 갚고 가집행이 판결액의 약 한 50프로? 한 3분의 2 정도 됐어. 그래 받아서 그거가지고 빚도 갚고 이래서 평생 처음으로 아파트라고 내집이라고 하나 사가지고 좋다 그러고 있는데 대법에서 대법관들이 모여서 과거 배상금의 이자 계산법을 완전히 무시 해버린 겁니다. 고법 최종판결이, 최종변론 있는 날로 부터 이자 계산 한다고 하니 32년 이자가 7~8억 되는데 가집행해서 받은 건 12억 가까이 되는 겁니다. 빚도 갚고 아파트도 하나 사고해서 마음이 좀 홀가분하다고 했는데 느닷없이 대법원에서 배상금 이자 계산법을 싹 바꿔버렸어. 약 한 60%가 부당이득이 되는 거야. 그러니 국가에 반납해라 이건데. 그래서 서울고등검찰청에서 독촉장이 오더라고 조금 있으니 국정원에서 민사소송을 걸어왔어요. 우리는 모두 채무자가 됐어요. 국가는 채권자구요. 이자도 연 20%랍니다. 도둑놈들이지요, 정말.
그럼 지금은 어떤 상태인가요?
지금 현재 못 내고 채무자가 되어 있지요. 대구지방 법원에서 재산압류하려고 내 가재도구 냉장고하고 에어컨하고 셋방 보증금 300만원을 압류해 버렸어요. 그냥 이러고 있는거죠, 뭐.
평생 저항하시고 민주화 운동을 하셨는데 조금 인정을 받았나 싶더니 다시 지금 이 상황이네요. 어떠세요 심경이?
내가 그 판결을 받고 국정원 마당에 가서 만천하에 고한다하고 유서를 써 놓고 거기서 분신자살 해버려야겠다는 생각이 자꾸 나더라구요. 이렇게 억울한 데가 어디 있노. 박정희는 육체적 고문을 하고 박근혜는 내 경제적으로 사람 고문을 하니 이런 세상에 내가 어떻게 사노 싶어요. 내가 분신까지 하려고 마음먹었는데 그것도 해보지도 못하고. 그래서 지금 뭐 밤낮없이 이자만 늘어나는 거지. 우리 연루자가 16명인가 그랬는데 가족 합치면 70명이 넘어. 70명이 지금 전부 국가에 채무자가 되어 있는 겁니다.
문재인 대통령 되고 국정원장이 바뀌고 그래서 국정원에서 실태 조사하러 나왔어요. 그래서 우리 사정 얘기를 다했는데 국정원에서 그건 어쩔 도리가 없지. 민사 재판에서 판결을 한 일을 가지고 국정원이 어쩌겠나. 그러면 이거 구제책은 뭐냐. 국회에서 특별법을 만들어야한다 그래야 이 문제를 해결하지 해결할 방법이 없다. 한 가지 또 할 수 있는 건 대법원 판사 중에 과반수 이상이 우리 관계를 해결하고 싶은 판사들이 대법관이 생기면 다시 재심을 해가지고 과거에 대법에서 잘못한 판례를 뜯어 고칠 수는 있다고 하더라구요.
진짜 질곡의 90년을 힘들게 넘게 살아오셨는데 그런데도 여전히 아주 왕성하게 활동을 하시잖아요. 이육사기념사업도 하시고 전태일 기념사업회도 하고 이런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세요?
몰라. 어떤 채무감. 의무감. 그게 발동돼서 그렇지. 내가 무슨 이권이 있어서 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 운동에는 내가 참 가담 안하고는 내 마음이 허락을 안 해. 그래서 죽을 때까지 무슨 고난을 받더라도 내 갈 길, 옳은 길이라고 하면 나는 끝까지 가보겠다. 촛불집회 할 적에도 한 번도 안 빠지고 촛불집회 참가하고 그랬어요. 앞으로,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열사님들 모시고 그분들 정신을 계승하고 살겠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선생님한테 '통일'은 무엇입니까?
나는 완전 통일독립국가, 반외세 자주국, 반전 반핵 한반도평화, 민족 대단결. 그걸 항상 가슴에 품고 살지요. 그 다음에 이 열사님들 정신을 어떻게 해서든지 계승 발전하는데 조그만 힘이라도 보태야겠다 하는 그 생각. 그래도 이제 여생이 얼마 안 남았는데 뭔가 좀 더 값있는 생활을 하다가 죽고 싶은데. 하는 방법은 다른 거 없어. 나는 뭐 투쟁의 현장에서 자주통일 독립운동에 투쟁의 현장에서 내가 살다 죽고 싶고. 그리고 마지막까지 소원은 투쟁의 현장에서 나는 죽고 싶다. 그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래가지고 하루하루 이렇게 보냅니다.
마지막으로, 지금 청년들이 참 살아가기 어려운 세상인데 그청년들한테 해주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면 한 마디만 들려주십시오.
청년들한테는 나는 이 세상을 올바른 세상으로 만드는데 힘써 달라는 것뿐입니다. 청년들에게 바라는 건 조국과 민족에 대한, 통일에 대한, 반일 자주 통일에 대한 철학을 가지고 통일 운동에 몸 바치기를 간절히 바라고 민주주의도 젊은 청년들의 각성 없이는 해결을 못 한다는 거. 그래서 의식화 된 그 청년들에게 바라는 건 초지일관. 초지일관을 바랍니다.
평생을 민주화와 자주평화통일운동에 몸 바쳐 온 선생은 마지막으로 정론직필을 말씀하셨다. 왜곡되어 있는 한국언론에 대한 따갑지만 애정 어린 말씀이셨다. 4시간이 넘는 인터뷰를 마치고 난 후에도 잡고 있는 손에 강직함과 신념이 느껴졌다. 부디 건강하시길 그리고 건강한 청년의 삶을 누려주시길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