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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못할 그 학생

  • 김용락(문학평론가)
  • 2022-05-03 오전 11:08:46
  • 913

졸업卒業!

 

이 단어는 한자어로 그 뜻을 풀어보면 어떤 업(맡은 일, 사무 등)을 끝낸다는 것으로 흔히 학교 제도교육을 마친 경우에 빗대어 부르는 용어이다. 졸업식은 그 끝냄을 축하하는 의식 정도로 생각할 수 있겠다. 이 땅에서 제도교육, 즉 유치원, 초· 중·고나 대학, 대학원을 다닌 사람들은 누구나 졸업을 경험했을 것이다.

물론 드물기는 하지만 한 번 의 졸업도 경험하지 못 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 근대식 교육이 등장하기 전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졸업을 경험하지 못했다. 예전에 서당 에서 ‘책거리’ 또는 ‘책씻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졸업 의식이 있었는데 그것은 서당에서 책 한 권을 다 배운 학동이 서당 훈장에게 음식과 술을 대접하던 풍 속을 말하는 것으로 그것도 일종의 졸업식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초중고를 다니던 1960~70년대는 학교 대강 당에 전교생을 모아놓고 후배 재학생 대표가 송사를 하면 졸업생이 답사를 하고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합니다~’ 로 시작 하는 졸업식 노래를 부르면 식장이 온통 울음바다가 되는 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여러 해 동안 정들 었던 친구와 은사님들과의 이별이 아쉽고 슬퍼서 울기도 했지만, 그 과정에 뒤이어 연결되는, 말하자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고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배움을 이어가야하는데 가난해서 상급학교 진학을 하지 못 하는 마음들이 그 졸업식장을 더욱 슬프게 해 울음바다를 만들기도 했다.

 

  ▲1985년 서후초등학교 책거리 ⓒ김상동

 

 

아동문학가 권정생(1937~2007) 선생은 일직초 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진학을 원했지만 소작농이던 아버지로 인한 가정 형편 때문에 진학을 포기하고 집안일을 돕는다는 내용이 초등학교 학적부에 적혀 있다.

이 내용은 내가 혹시 선생과 관련하여 평전이라도 쓸까하여 기초자료를 조사하는 중에 초 등학교 학적부를 봤더니 그렇게 적혀 있었다. 실제로 생전에 선생께서는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 진학을 못한 걸 두고두고 가슴 아파하던 것을 내가 곁에서 직접 여러 차례 들은 바 있다. 초등학교 학력으로도 한국 최고의 어린이문학가가 된 것과는 별개로 상급학교 진학이 좌절된 것이 평생 두고두고 상처가 된 듯했다.

 

특히 당시에 시골의 소녀들은 대개 상급학교 진학이 좌절되었다. 총명하고 학업에 대한 열의가 있지만 오빠나 남동생의 학업을 위해 자의반 타의반 으로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서울과 부산, 대구 와 같은 대도시의 방직공장이나 고무신공장, 혹은 부잣집의 식모로 팔려가야 했다. 그러니 졸업식장이 울음바다가 되는 것은 인지상정이었는지도 모를일 이다. 지금도 그때의 어린 여학생들의 심정을 헤아려보면 짠하고 애잔하기 그지없다. 이것은 다 극심한 가난과 농경문화의 잔재인 남아선호사상 때문이다.

 

예전에는 제도교육인 학교를 졸업하면 취업이라든가 장래에 대한 많은 보상이 뒤따랐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사교육의 힘이 공교육의 힘보다 커지면서 공교육의 권위는 많이 무너졌다. 덩달아 학교 교사들의 권위도 함께 약화되었다. 굳이 학교교육이 아니어도 더 명문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고, 학교 선생님의 가르침이 아니어도 사설학원의 강사들에 의해 학력을 키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학교와 교사의 권위가 함께 추락했다.

 

 

나는 농촌 출신에, 농부의 아들로 운 좋게 대학을 졸업한 후 첫 직장을 고등학교 교사에서부터 시작해 대학 시간강사와 교수 등으로 평생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로 생업을 이어왔다. 당연히 고등학교와 대학의 많은 졸업식을 경험했다. 그러나 크게 기억에 남는 졸업식 장면이 떠오르지 않는다. 왜 그런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기억에 남는 제자들은 꽤 있다. 지금도 40년 가까이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고교와 대학시절의 제자들을 만나면 오래 지속된 그 인연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1976년 안동공업고등학교 졸업기념 사진 ⓒ박동수

 

내가 처음 교편을 잡은 학교는 안동공업고등학교 였다. 신설한지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 학교였다. 정규학교로 인가를 받기 전에 정규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청소년을 위해 설립자가 손수 벽돌을 찍어서 만든 실업학교로 시작한 학교였는데, 국가의 공업화· 산업화 바람을 타고 공고로 인가를 받았다는 풍문 이 돌던 학교였다. 학교 설립자 겸 교장은 김용을이 란 분으로 그는 실업학교를 세운 심훈의 소설 『상록 수』의 박동혁 같은 인물이었다. 나는 그분을 3년여 모시고 짧은 교사생활을 했는데, 여러모로 존경받을 만한 참 훌륭하신 분이었다. 

나와 이름이 비슷해 혹시 친인척인가 하는 오해도 받았지만 전혀 관계가 없는 분이었고, 내가 시인이란 것과 당시 신 군부시대에 저항하는 것에 대해 늘 좋 게 격려하고 응원해주신 분이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내가 살던 고향 동네에 이**이란 아버지 친구 분이 농가 빚 때문에 농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 을 끊는 일이 일어났다. 이런 일은 비단 그분만의 일이 아니라 당시 농촌의 일반적인 상황이라 할 만큼 농촌이 어려웠다. 나는 이 불행한 상황을 시로 써서 잡지에 발표했다. 그랬더니 경북도교육청에서 장학사가 학교로 나를 조사하러 오고, 드디어 안기부 안동분실과 안동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이 학교로 찾아 왔다.

수업을 하다가 교감이 교실까지 나를 부르러 와서 교장실에 들어갔더니 검은 잠바를 입은 중년의 사내 두 사람이 교장실 응접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 맞은편에 앉았다. 그 형사들이 나의 시 내용과 문학 활동을 문제 삼으면서 젊은 놈이 어쩌고저쩌고 막말까지 하면서 구속시키겠다고 위협했다.

나는 구속시키려면 시켜봐라 하면서 강하게 반발 하면서 드디어 응접탁자를 마주 두고 일어서서 멱살 드잡이까지 하는 폭력적인 사태로 발전했다. 이런 와중에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교장이 벼락 같이 호통을 쳤다.

이게 도대체 뭣하는 짓들이냐고! 그 소리 에 놀라 멱살을 놓고 서로 떨어지자 형사들을 교장 실 밖 행정실로 나가라고 내보내고는 나와 단독으로 마주 앉았다. 이때 교장이 내게 한 말을 나는 오래 동안 잊지 못하고 있다.

 

“김 선생, 나는 안다. 죽은 물고기는 강물에 떠내려가지만, 산 물고기는 물살을 치받으면서 거슬러 올라간다. 젊은 사람은 당연히 산 물고기처럼 강물 을 치올라 가야한다. 나는 김선생의 행동을 이해한 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 꽤시리(꽤 있게)해야 한다. 지금 니가 그카다가 진짜 덜컥 구속이라도 되면 어떡하려고 하노?” 하시면서 당시 안동 가톨릭농민회 활동 등 지역 시국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나를 다독 였다. 그러면서 눈치껏 하라고 말씀하셨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이 부분을 그냥 무심히 지나쳐 읽을 수 있겠지만 사실 1980년대 초반은 신 군부의 강압통치가 심해서 참교육 운동을 하는 교사들을 당국에서 매일 감시하고, 학교에서도 교감이 교사들 의 동향을 파악해 보고하던 무섭고도 참혹한 시절 이었다. 당국의 압력이 있기 전에 교장들이 알아서 문제교사라고 고발하고 쫓아낸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런 시절에 교장이 반정부 시를 쓰고 학생들에 게 역사의식을 가르치는 교사를 옹호하기란 쉽지 않던 일이었다.

물론 나 개인에게 잘 대해주었다고 해서 존경 받을만한 분이란 뜻은 아니고, 여러모로 훌륭한 교육자였다(나는 조만간 이분의 모습을 소설 로 남길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곧 학교 경영이 어려워져 건설업자에게 학교를 넘겨주었다. 교장과 재단이 바뀌면서 나도 학교를 그만두었고, 그 후 여 러 해 지나 한번 찾아뵈려고 근황을 알아봤더니 이미 고인이 되셔서 퍽 안타까워한 적이 있다.

 

그 당시의 에피소드 한 토막이다.

 

공업고등학교였지만 대학에 진학하고자 하는 학생들이 꽤 있었다. 그런 학생들을 모아 대학 진학반을 편성해 정규 수업 후 국·영·수 중심 보강수업도 하고 야간 자율자습을 하기도 하던 때였다. 가르치던 과목도 영어이고 젊었던 내가 주 담당 교사였는 데, 숙직하던 어느 하루의 이야기이다. 밤 10시가 넘어서 아이들이 어느 정도 열심히 하고 있나 보려고 3 층 진학반 교실에 순찰을 나갔더니 학생들이 공부 는 하지 않고 책상을 여러 개 붙여놓고 모여 앉아 술 을 마시고 있었다. 소주와 막걸리, 새우깡과 과자부스러기를 안주 삼아 마시고 있었는데 몇 명은 제법 취해 있었다.

나는 교사로서 이들을 야단치는 대신 함께 앉아 서 술을 마셨다. 아이들과 함께 미래를 이야기하고 아이들의 고민도 함께 나누면서 이야기를 나누다 가 술이 떨어져 내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술과 안주 를 더 사오라고 시켜 진탕 마셨다. 교사로서 그게 올바른 태도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주로 경북북부지 역 농부의 아들들인 그들과 나는 비슷한 환경과 미 래를 공유하고 있었다. 단지 내가 몇 살 더 나이가 많고 운 좋게 먼저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로서 이 아 이들을 가르치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 당시의 내 생 각이나 상황은 내 첫 시집 『푸른별』(창작과비평사, 1987)에 많이 그려져 있다. 

 

드디어 새벽 한두 시가 지나면서 많은 학생들이 귀가해 십여 명 아이들만 남았고 그들 중에는 과음 해서 교실바닥에 토하는 학생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쯤에서 나는 술자리 종료를 선언하고 아이들에게 교실을 정리하라고 시키고는 숙직실에 들어가 잤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교실에 들어가 보니 학생 들이 여기저기 널부러져 자고 있었다. 아이들을 기상 시키고 창문을 열고 환기 시키고 청소를 했다. 마침 밖에는 초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매우 을씨년스러운 아침이었다.

 

당시 학교는 안동시 외곽에 산을 깎아 산뜨배이 (산중턱)에 위치해 있어서 학교 본관 로비에서 내려 다보면 저 아래 대운동장이 있고, 대운동장에서 비탈을 내려가면 교문을 통해 시내와 연결된 도로가 있는 그런 구조였다. 학교 뒤편에는 공동묘지가 있 는 한적한 외곽이었다. 본관 로비에 서서 지난 밤 과 음의 숙취를 삭이며 아침부터 내리는 비를 구경하면 서 망연히 서 있는데 저 아래 교문을 통과해서 한 학생이 비를 맞으며 걸어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누 가 이렇게 일찍 등교하나 하면서 자세히 보니 그의 모습이 약간 이상했다.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면서 걸어오는데 교복 상의 단추를 풀어헤친 품안에 뭔 가를 감추고 오는 듯 했다.

 

 

드디어 계단을 올라 내 앞에 당도한 그는 지난밤 에 가난과 진학과 불투명한 자신의 미래에 대해 열 변을 토하면서 술을 과하게 마신 끝에 기어코 토하며 쓰러졌던 우**이라는 학생이었다. 나는 그가 자신은 비를 맞으면서도 비를 안 맞게 교복 상의로 감싸서 품에 안고 온 게 뭔지 궁금했다. 그가 내 앞에 가까이 와서 내민 것은 컵라면이었다. 선생님이 어젯밤에 술 을 많이 드셔서 속 아플까봐 아침 일찍 학교 앞 구멍 가게에 가서 주인아주머니에게 부탁해 곤로로 물을 끓여 컵라면에 부어 들고 온 것이라고 했다. 그것도 돈이 없어 겨우 선생인 내 것만 사온 것이었다. 거의 40년 전이니까 지금과는 달리 온수가 나오는 정수기도 없고 손수 연탄이나 곤로로 물을 끓여서 컵라면을 먹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모두가 몹시 가난하던 시절이었다. 한 자료를 보니 1985년도 우리 나라 1인당 GNP가 2,458달러이고 2020년은 31,500 달러였다. 지금보다 열 배 이상 가난하던 시절이었 으니 시골학생들에게는 용돈이라는 개념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선생 것만 겨우 하나 샀을 것 이다. 아침부터 물을 끓여달라고 가게 주인에게 부탁했다면 아마 타박을 당했을 것이다. 나는 그 학생에게 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했냐고 화를 내면서도 마음 속 깊이 어떤 울림을 느끼고 있었다. 울컥하면 서 눈물이 핑 돌았다. 

 

그 아이들이 속한 학년이 졸업을 하고 나도 곧이 어 학교를 퇴직했다. 졸업 이후 그 아이를 한 번도 다시 만나지는 못 했다. 애초 인생이란 게 만나고 헤 어짐의 연속이지만 그 어느 구비에서 만났던 한 사 람, 그와 얽힌 사소한 사건 하나가 큰 공부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그때 그 아이의 속마음 을 나는 아직도 알 수는 없지만 비를 맞으면서 컵라 면이 비에 젖지 않도록 교복 상의 속에 감춰서 걸어 오던 그 어린 학생의 모습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음력 초하루나 보름이 되면 장독간에 물 한 그릇 더 올려놓고 두 손을 비비며 어딘가를 향해 무조건 머리를 조아리던 우리들 어머니의 그 어떤 마음과 같은 것일까?

 

그 어린 학생이 이미 그때 나의 선생이었다. 

김용락(문학평론가)
2022-05-03 오전 11: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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