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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집왕①-어느 수학교사의 열렬한 소반 수집기

  • 김은경(작가)
  • 2020-08-26 오후 5:4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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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경을 드러내는 우리네 물건

소반은 음식을 올리는 작은 상이다. 지금은 골동품 가게에서나 볼 수 있게 되었지만, 불과 얼마 전까 지만 해도 어느 집이든 소반 하나씩은 가지고 있었다. 소반에는 건강과 평안을 바라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고 한다. 소반 수집가들은 그 멋과 소박한 아름다움을 먼저 발견하고 느끼는 사람들에 속한다. 1957년 안동 성진골에서 태어난 박상영(62) 선생은 1980년에 길원여고 수학교사로 35년간 학생들을 가르치다 2015년에 퇴직했다. 현재는 안기동에서 그의 가족과 골든 리트리버 한 마리, 오래된 나무들과 함께 살고 있다. 그가 소반을 수집한 계기는 30대 젊은 교사였던 시절 학생 자취방에 가정방문을 하면서부터다. 선생의 가정방문에 제자는 주인집에서 소반을 하나 빌려와 음식을 내놓았다고 한다.

“자기 딴에는 선생한테 신문지 깔아놓고 음식 내놓기 뭣하니까 안집 할머니에게서 소반을 하나 빌려 왔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예천소반이더라고요.”

그날 제자가 빌려온 예천소반이 운명의 지침을 바꿔놓았다. 소반 수집가가 된 결정적 계기가 된 것. 좋은 소반이 있다면, 특히 예천소반이 있다면 끈질기게 찾아가 졸라보기도 하고 설득하기도 하면서 현재까지 모은 것이 200여점. 그의 두 아들은 아파트 두 채 값이라고 말한다. “소반이 달리 말하면 ‘상’이라고도 하죠. 우리가 자라면서 엄마, 혹은 외할머니에게서 상차림을 받아 봤거든요. 상은 공경의 의미가 있어요. 상을 이렇게 한상 차려주고 뚝 던져주는 건 없거든요. 아주 공손하게, 그야말로 정성을 담아가지고 전달하니까 소반은 전통적으로 공경함을 드러내는 우리와 가장 가까운 기물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어서 수집하기 시작했어요.”

  ▲ 소반 수집가 박상영 씨(ⓒ권기환)

 

소박하고 우아한 소반의 세계

현존하는 소반 대부분은 1900년대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나무의 특성상 사용하면서 부서져 오래된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상판 형태에 따라 다각형(4각·8각·12각)·장방형·원형·연엽형·화형 등으로 분류하고, 다리 모양에 따라서는 구족반·호족반·죽절반·단각반 등으로 불린다. 구족반은 일명 개다리소반이라 불리고, 호족반은 호랑이 발처럼 생겨 붙여진 이름으로 가장 보편적인 소반이다. 또 지방마다 독특한 기법과 형태로 만들어져 통영반, 나주반, 해주반 등 지명이름을 붙인다. 예천소반은 널리 보급되지 않아 학계에서 공인된 소반은 아니다. 하지만 예천소반이 지닌 고유한 특징은 소반애호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 아름다움이 널리 알려져 있다. 박상영 선생도 예천소반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진 사람이다. 그가 소장하고 있는 예천소반만 약 60여점. 상판이 12각반으로 각 의 모서리를 부드럽게 해원과 같은 느낌을 주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매력이 있을까?

“예천소반은 12각 호족반이에요. 우선 소반 다리가 이렇게 길쭉하고 날렵해야 돼요. 다리는 호족형인데 버선코가 살짝 올라가 있어서 예뻐요. 또 상판 전체가 통판으로 깊게 파냈는데다 상판 모서리에 전이 잡혀져야 돼요. 운각은 아(亞) 자형인데, 이건 장방형 통영소반에서 볼 수 있는 양식인데 12각 호족반에 아 자형 운각을 붙인 것이 이례적이죠. 이런 특징이 눈에 띈다면 십리 밖에서 봐도 이건 예천 소반이에요. 근데 국립박물관에서 나온 도록에도 예천소반이라고 이름이 안붙어 있고 그냥 고마 경상도 소반, 개다리 소반, 이런 식으로 쉽게 얘기를 해버리는데, 그게 안타깝죠.”

그는 사실 소반의 중요성과 아름다움은 말로 쉽게 표현 할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소반은 사용자가 완성자래요. 사용하는 사람들이 완성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록문화하고 상통하는면이 있습니다. 사람이 정성을 가지고 기록을 하듯이 소반도 일일이 만져줘야 돼요. 나이든 소반이 벌써 80년, 100년이 되면은 나무다보니까 자연적으로 고사가 되고 산화가 돼요. 멀쩡하게 남아있는 경우가 드물죠. 계속 닦고 만져주고 해야 돼요. 손때가 묻고해야 윤이 나고 뒤틀어지거나 깨지지 않죠. 그래야 오래 갑니다.” 소반 중에는 어느 특정한 시기 장인들의 끼가 유감없이 발휘된 희소적인 것들도 있다. “봉화 알통소반이라고 있는데요. 다리의 죽절부분이 올록볼록하게 알통처럼 생겼어요. 딴 건 다 똑같은데 날 개 다르고, 대나무 죽절이 달라서. 고때 잠시잠깐 장인이 만든 소반이에요. 군위 우보소반 같은 경우도 제작 기간이 길지가 않아요. 그래서 굉장히 고가로 쳐요.”

 

소반 얻으려 마음에도 없는 선보고 재롱까지 부려

느긋하고 점잖은 인상과는 달리 그는 소반을 얻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했다. 그의 소반 수집기는 소반처럼 그렇게 우아하지만은 않았다. 백운정 닭백숙 집에서 눈에 띄는 소반을 갖고 싶어 팔 듯 말 듯 애태우는 식당 주인을 열 번도 더 찾아가 결국은 산 적도 있다. 제자들에게도 소반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은근히 흘리기도 했다.

“가정방문 겸 제자에게 미리 괜찮은 소반이 있는지 알아봐달라고 귀뜸해두기도 했죠. 선생님이 소반 좋아하는 거 알지? 동네에 괜찮은 소반 있는지 좀 알아봐 달라고. 그리고 선생님 나쁜 사람 아니다. 그렇게 가서 대접도 받고 심지어는 선도 보기도 하고요. 소반을 좋아한다니까 학모가 제가 총각이란 걸 알고 제자의 이모를 소개시켜준 거예요. 근데 학모가 이모를 자꾸 만나게끔 하는 이유 중 하나가 그 집에 소반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집에도 몇 번씩 갔었어요.” 갓 결혼한 새신랑이었을 때도 그의 소반 사랑은 멈추지 않았다.

“결혼을 금방하고 난 다음에 ‘강원도 소반을 얻기 위해’ 처고모 집에 가서 뭐 춤추고 노래하고 재롱까지 부린 적도 있어요. 집에 있는 오래된 소반을 달라는 얘기를 하는 게 어려운 자린데도 가서 얘길 했죠. 소반을 가지고 싶다. 그쪽에서도 새신랑인데 거절하기 힘든 자리잖아요.(웃음)”

   ▲ 200여점의 소반이 방안 가득 있다.(ⓒ권기환)

 

당장 밥 차리는 우리집 소반을 달라꼬?

어느 지역, 어느 집을 방문할 때 그의 첫 관심사는 언제나 그 집 소반이었다. 갖고 싶은 마음이 앞서 때로는 하나밖에 없는 남의 집 밥 상에도 흑심을 품은 불청객이 되기도 했다.

“(예전에) 주말에는 예천 풍양 같은데도 그냥 가서 소반 혹 팔 거 없느냐고. 그러면 사람들이 경계를 해요. 85년도에 대우에서 나온 맥스 픽업을 구입했었는데, 그 덜덜거리는 디젤차를 끌고 다니면서 소반 사러 다닐 때가 좋았던 거 같애요. 그때는 소반을 줬긴(팔긴) 했는데, 사람들한테 팔라고 하면 안 된다고 했던 이유가 집에서 당장 밥 받아먹고 하는데 이걸 가져가려고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그때만 해도 그 집 가세가 어떤가 볼라면 그 집에 소반이 몇 개 있는가가 그게 중요시 됐어요.”

수상한 눈총이 내심 신경 쓰였던 걸까. 86년도엔 포니 후속 모델인 프레스토를 사서 본격 수집에 나섰다. 세련된 차를 타고 다녀도 낯선 사람에 대한 수상한 눈총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대뜸 소반을 팔라는 정체불명의 남자를, 이집 저집 기웃거리는 모습을 시골 동네에서 수상하게 여기는 건 당연했다.

“프레스토를 타고 온 데 다니면서 소반 수집한답시고 더러 신고도 받고 그랬어요. 나쁜 사람이 아닌 가 싶어서 어떤 중학생한테 신고 당해서 파출소에 가보기도 하고. 그때는 간첩신고가 아주 투철했던 때였잖아요.”
그는 학생들한테 수학을 가르치면서도 우선해야 되는 것 중 하나가 예절이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수학 공식 하나 더 아는 것보다도 제자들이 예절을 갖춰 여러 사람한테 좋은 인상을 남기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소반 수집을 하러 다닐 때는 그의 ‘참 좋은 인상’도 소용없었다. 남자가 소반을 사러 다닌다는 것이 그만큼 낯설고 수상한 일인 것이다. 엉뚱해보이기까지 하는 그의 수집벽은 사라져 가는 소반에 대한 안타까움의 발로였다. 소반의 운명이 그의 손에 달려있기라도 하듯 마음이 조급 해졌던 것이다.

 

곗돈, 수당 쏟아부어…소반 얻으면 마음이 푸근해

“소반이 우리 젊은 사람들한테는 그렇게 대접을 못 받아요. 지금 우리 문화가 소반이 안 맞잖아요. 굳이 그거 아니어도 명품가구 많잖아요. 그래서 좀 안타깝고. 지금도 그냥 함부로 방치해둬서 시골의 고방에서 쥐가 다리도 갉아먹고 그런 소반들이 더러 나와요.”

햇볕 한 점 들지 않는 어두운 고방에서 혼자 썩어가고 있는 소반을 한 개라도 더 구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소반을 만나면 김완배 목공예 명장에게 맡겨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하기도 했다. “그이 소반이 자꾸 없어져가는 걸 살리는 게 중요하죠.” 부인 곗돈 탄 것이든 보충수업비 수당이든 쏟아부어 소반을 사기도 하고, 어느 날은 화형반을 보고 반해 두 자녀를 위해 모으고 있던 주택마련 청약저축을 부인 몰래 해지해 산 적도 있다. 학생들 앞에 서나 똑똑한 척 했지 스스로 세상 물정 모른다고 생각한 적도 여러 번이다.

“소반 값이 비싸다는 걸 알고, 사람들이 턱없이 값을 부르는 게래요. 점점 더 수집하기는 어려워지죠.” 그동안 있었던 일들이 이뿐이었을까. 하지만 그는 빙긋 웃으며 말한다. “마음에 드는 소반을 갖춰 가지고 오면요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어요. 또 소반을 갖춰놓으면 마음이 푸근해요. 나무 심어놔도 마음이 푸근하고 부자 된 기분이고요.”

 

소반에 이은 오래된 나무와의 인연

수집하러 다니면서 자연스레 나무와도 가까워졌다. 소반에 쓰이는 나무는 소나무, 느티나무, 은행나무 등 그 종류도 많다. 1995년에는 오래된 나무와 인연을 맺기도 했다.

“제가 산 나무든 죽은 나무든 나무를 좋아 그래요. 예안향교에 보면 향교 마당에 백년도 넘은 ‘안동’이란 이름으로 무궁화나무가 있었어요. 이 무궁화가 남의 집 담장을, 지붕을 가리면서 쓰러질 정도랬어요. 주인이 그걸 비낸다는 거예요. 수령이 백년이 넘었고 지름이 30cm이상 되는 거대한 나무였어요. 그 나무를 애지중지 옮겨와서 뒤안에 심어놨었는데 기분이 좋아서 그때 TV진품명품에 사진을 찍어 보냈더니만 ‘TV진품명품에서는 나무 같은 경우는 감정을 안 합니다’라고 회신이 왔어요.(웃음)” 그 나무가 자연적으로 고사할 위기에 처했을 무렵, 그는 나무를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알아봤다. 서울나무병원 의사를 불러 수술도 했지만 결국은 고사했다고 한다.

그의 집 마당엔 수령 80년 자연산 주목을 비롯해 수령 80년 라일락나무가 해마다 꽃을 피운다. 주목은 예천 비행장 앞 서당 자리에 있던 나무를 옮겨온 것이다. 나무가 좋아 직접 나무 공예도 해보고 소반을 중심으로 분재도 했다. 2003년에는 한국야생화 안동연합회에 출입하면서 회장직도 맡았다. “야생화나 분재를 그냥 놔두기보다도 소반 위에 올라오면 또 조화가 맞아요. 운치가 있거든요.”

 

소반에 대한 애착은 죽을 때까지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소중한 사연을 품은 그의 소반들은 2015년 봄, 안동민속박물관 소장자 초대전을 열어 일반 사람들을 만났다. 특히 예천소반을 중심으로 100여점을 전시했다. 아이들도 찾고, 소반을 보기 위해 일부러 안동을 찾은 사람들도 있었다.

“제가 수학선생이잖아요. 계수기로 한 달간 전시회 방문자 수를 체크해보니 5천여 명에 가까워요. 그때 관람객들이 하시던 말씀 중에 ‘안동이니까 아직도 이런 소반이 남아 있는 거구나’, ‘안동에 와서 이런 걸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 얘길 하더라고요. 엄청 고맙더라고요. 소반에 대한 애착은 아마 죽을 때까지 가져가야 될 것 같은데. 내 혼자 갖고 있기는 그렇고 어디 공개된 장소에 둘 수 있는 기 회가 있으면 좋겠다. 어디에 기증을 하든, 어떤 형태로든 여러 사람이 보고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싶어요.”

이순의 나이. 소반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는 과연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한 사물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대체 어디에 쏟아부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소반 없이 그의 인생을 말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는 고교시절인 1974년 개최된 제2회 육사추모기념백일장에서 고등부 운문 장원을 한 적이 있다. 지금은 ‘탑’이란 제목의 그 시를 잃어버렸지만 첫 행인 “하얀 세월이 흘러 푸름이 지나간 자리”만이 기억 에 남는다고. 오래 전 잃어버린 시를 안타깝게 여기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소반과 함께 한 하얀 세월 들이 푸름으로 가득 차오르니까 말이다.

“수집한다는 것 자체가 소반이 되든, 내가 정성을 들인다는 것으로 봤을 때 그런 어떤 기록적인 것들을 찾아낸다는 것이 참 재미있는 일이고 좋은 일이죠.”

* 본 글은 『기록창고』 1호에 수록된 내용이며 E-book에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김은경(작가)
2020-08-26 오후 5:4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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