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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의 기억-안동 최초의 피아노

  • 조창희(아동문학가)
  • 2022-05-03 오후 2:4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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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성소병원이 일제의 탄압으로 폐업하고 안동백병원 시대로 새 출발하게 되었을 때 대부분 직원들은 성소병원에서 백병원으로 수평 이동하였다. 이때 서무과에 근무하고 있던 조경희 여사는 예안면의 신씨 문중 에 시집을 가게 되어 병원 근무를 마감하게 되었다. 조경희 여사는 안동에 정착한 최초의 감리교인이며 성 소병원 근무를 마치고 하루일과가 끝나면 간호사들과 함께 정구를 즐기므로 안동에서는 최초로 정구를 도입한 조선 처녀로 소문이 났다.

그런데 그 시절 풍토로 처녀가 시집을 가면 직장 생활도 정리하고 집안에 들어앉아 육아와 살림살이에만 전념하던 때였으니 처녀 시절 성소병원에 근무하던 때가 자유로웠고 가장 좋았던 때였다고 회상하곤 했다.

 

조경희 여사의 시아버지는 신장균 강도사로 서울 종로에 있는 승동장로교회에서 강도사로 있으면서 목사 과정을 밟고 있었다. 여기서 함태영 선생, 이서영 선생, 이상재 선생 등 그 외에도 중견 민족지도자 들을 만나서 조선의 앞날을 걱정하였으며 전국 교회를 상대로 청년면려회 신앙 강연회 강사로 활동하였다.

 

그런데 청년신앙운동이 일제의 탄압으로 할 수 없게 되자 일본으로 건너가서 유학생으로 공부하면서 암암리에 유학생들의 모임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발각이 되어 신장균 씨는 일경에 연행되어 조사받는 과정에서 순절을 당했다. 이런 비보가 집안에 날아들었을 때 예안신씨 문중에서는 신장균 씨의 동생 되는 신승균 씨와 또 다른 한 분이 유족을 대표하여 일본으로 건너갔다. 신승균 씨는 당대에 봉화군 재산면장을 역임한 유능한 인물이었다.

이때 일경에서 하는 말이 신장균 씨가 치과에 다녀온 후에 쇼크사 한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에 일경의 감시망을 피하여 조선인 유학생들이 들려준 말은 일제에 항거하다가 잡혀 들어가서 고문을 당해 죽었다고 했다.

 

후 시신을 운구하여 현해탄을 건너 부산에 왔고 부산역에서 안동역까지 필요한 숫자만큼 철도 객차를 사비로 전세 내어 옮겼고 안동역에 서 예안면 선산까지도 필요한 차량을 전세 내어 예안면 선산에서 장례를 치르므로 대단한 장례로 수 문이 자자했다. (승동교회 110년사 참조. 신장균 씨 손자 되는 신형순 씨 증언)

 

조경희 여사는 필자의 작은 고모님, 안동백병원 백태성 원장은 필자의 큰 고모부, 부인되는 조은희 여사는 큰 고모님이 되신다. 안동백병원의 하루일 과가 끝나면 그날의 수입으로 방안에 수익금이 수북이 쌓였다고 한다. 그 모든 재무 정리를 다 하셨다. 그리고 백병원 원장 사택 거실 찬장에는 반짝반 짝 빛나는 고급 유리 그릇, 사기 그릇, 놋그릇 등 없는 것 없이 놓여있고 피아노도 안동에서는 최초로 놓여졌다. 안동에 있는 모든 학교에도 풍금만 있었는데 어느 날 백병원 원장 사택에 피아노가 놓여지니 소문이 났고 안동의 명물이 되었다. 

 

따라서 학교에서는 담임교사 인솔하에 한반에 60명씩 전교생이 순번을 짜서 백병원 원장 사택에 찾아와서 피아노를 견학하고 건반을 두드리며 피아노 소리와 풍금 소리를 비교해 보기도 했다. 이런 비화는 그 시절 안동농림고에 다니며 안동중앙교회(현 안동교회)에 다닌 강석주 장로님이 생생하게 기억하면서 증언해 주셨다. 강석주 장로님은 지금은 동안교회 장로님이 되셨다.

 

 

 

또 다른 안동 최초의 피아노에 얽힌 비화를 소개 하고자 한다. 안동백병원 원장 사택에 피아노를 들여놓았을 때 맏아들 백낙호 씨가 아주 좋아하며 피아노를 벗 삼았다. 그런데 또 한 아이가 피아노를 치면서 놀고 싶어 했다.

그 아이는 백병원에 근무하고 있는 어느 의사의 아들이었다. 백병원 원장의 아들과 취업한 의사의 아들이 서로 경쟁하듯이 피아노에서 놀았다.

 

어느 날 의사의 아들이 피아노를 치고 있는데 원장의 아들이 거실 문짝 뒤에 주저앉아서 뿔이 나 있었다. 이 모든 상황을 유심히 살펴보아 왔던 필자의 아버지가 끼어들어 조카 편을 들면서 한마디 했다. 곧 갑질 행세를 하는 내용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건 우리 피아노니까 너는 치지 말라’든가 ‘이제는 그만 치고 자리 내놓으라고 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는 말이었다. 외삼촌의 이런 말을 들은 어린 백낙호의 답변이 대단했다고 한다. 

‘우리 피아노라고 자랑하면 그 친구가 마음에 상처를 받을 것이 아니냐?’ 고 하는 배려하는 마음이 었다. 어려서부터 상대를 배려하는 아량이 있었다. 그날 이후 원장 아들 백낙호는 자리를 빼앗기지 않 으려고 피아노 의자에 앉아서 건반을 두드리다가 엎드려 잠이 들었고 그렇게 열심히 연습하여 마침내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바리톤 성악가 오현명 씨를 만나서 깊은 우정을 쌓았다. 한 사람은 성악가로 한 사람은 피아니스트로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을 주름잡았다. 1950년 6·25전쟁이 터졌을 때 즉각 민간인 정훈요원으로 자원하여 활동하였는데 3일 만에 서울이 함 락당하고 한강 인도교가 끊기는 바람에 서울을 벗 어나지도 못했다. 이곳저곳 도피 생활을 했는데 밀 고자에 의하여 공산당 인민군에게 잡혀서 포승줄에 묶여 청평 가평 춘천 방향 북한 땅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수십 명 지식인들이 줄줄이 묶여서 북쪽으로 끌려가다가 적당한 시간에 잠시 휴식을 취하며 포승 줄을 풀고 생리를 보게 한 후 또다시 묶여서 끌려가는 것이다. 이때 백낙호 씨와 오현명 씨는 친구 간에 배짱이 두둑한지라 눈치코치로 기회가 주어지면 탈출하자 하고 의기투합했다. 

 

마침내 절호의 기회가 주어졌다. 잠시 휴식하면서 포승줄을 풀고 볼일을 보게 한 후에 점심밥으로 주먹밥을 나눠주는데 주먹밥 한 덩어리 타 먹으려고 줄을 섰는데 갑자기 유엔군 전폭기가 나타나서 공습을 하니, 따발총을 들고 대열을 감시하던 인민군 들도 혼비백산하여 엄폐물 뒤에 숨느라고 정신이 없다.

백낙호, 오현명 씨는 기회는 지금이다 하고 납북 인사 지식인들 사이에서 뿔뿔이 흩어져서 강제 납북자 대열에서 탈출하게 되었다. 저들은 살길을 찾아 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에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만나게 되었다. 마석쯤 왔을 때에 어느 초등학교 운동 장에 인민군 병력이 임시 주둔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긴급 작전 회의를 열었다.

 

1. 적군은 우리를 알지 못한다.

2. 따라서 기습하면 적군을 섬멸시킬 수 있다.

3. 싸울 것이냐? 그냥 두고 우회해서 남쪽으로 갈 것이냐?

 

초기에는 우회해서 남쪽으로 가자고 했으나 나중에는 이판사판이니 한바탕 붙어보자는 쪽이 우세해서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서 적군을 섬멸하고 전원이 인민군 복장으로 갈아입어 위장하고 운전할 줄 아는 이가 트럭 운전석에 앉고 몸집이 좋은 백낙호 씨 가 인민군 중대장 복장으로 선임 탑승자로 운전석 옆자리에 앉고 편안하게 이동하여 유엔군 주둔 지역까지 무사히 내려와서 기적적으로 수십 명 지식인들이 살아났다.

 

 

이후에 백낙호 씨는 미국에 유학하여 피아니스트로 터를 굳히고 9년 후에 모교인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 교수로 부임 귀국하였고(3년 임기만) 세계 음악인 연합회에 상임위원을 2회 연임하므로 6년간 대 한민국 국위를 선양하였고 서울음대 학장을 역임하고 퇴임 후에는 명예교수로 모교에서 봉직했다.

 

 

조창희(아동문학가)
2022-05-03 오후 2:4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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