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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리 드로잉⑪-안동의 아궁이

  • 김상년(서예가)
  • 2022-05-03 오후 2: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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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기 이래로 불을 사용한 인류는 생존과 관련해 난방과 취사에 많은 연구를 했다. 난방과 취사 는 주거지의 환경과 구조형태에 따라 지역 고유의 건축유형이 생성, 발전해왔다. 고고학계의 발굴로 난방과 취사는 노지와 부뚜막 그리고 쪽구로 분류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철기시대 초기의 쪽구가 우리가 알고 있는 구들이나 온돌의 시초에 해당하는데 그 이유는 쪽구의 특징인 불을 집혀 취사를 하는 아궁이와 열기의 저장과 전도율을 높인 고래 그리고 고래를 넘은 열기와 연기를 밖으로 내보내는 굴뚝의 세 가지 요소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경북 북부에 위치한 안동은 산간지 형으로 계절의 색이 뚜렷하여 난방에 큰 주의를 기울였고 아궁이와 온돌의 기술이 발전하였다. 

 

(ⓒ김상년)

 

 

 

아궁이는 ‘아궁’에 접미사 ‘-이’가 붙어 만들어진 글 자로 불이 들어가는 입火口, 온돌의 입堗口, 곡기穀氣 의 입灶口 또는 아귀라 하여 조화문竈火門 등으로 기 록된다. 취사를 목적으로 부엌 안에 솥을 걸고 부뚜 막 앞에 설치하는 아궁이의 형태와 외부나 실내에 부뚜막을 만들지 않고 불길을 바로 구들로 보내는 함실아궁이의 형태가 있다.

함실아궁이는 불길이 모이는 함실에 불을 놓기 때문에 아랫목 방바닥이 거 무스레하게 그을리는 경우가 많았다.

어린 시절 아랫목에서 잠이 들었다가 화상을 입기도 했다. 구들 밑으로 불을 땔 수 있도록 방의 어느 한쪽을 다른 곳 보다 깊게 파고 구들장은 다른 부분보다 두꺼운 함 실장을 놓았다.

열기가 구들장으로 곧게 들어가 난 방의 속도를 단축시키고 긴 시간 온기를 보존하기 위함이었다.

아궁이에 불을 지필 때 과하게 불을 피우면 오히려 열효율이 떨어진다. 불길이 솥의 바닥 에 가깝게 흘러가도록 하여 부넘기를 막는 것이 난방에 가장 효과적이다. 고래를 넘는 불길의 열기를 오래 유지시키기 위해 군불을 땐 다음 아궁이 입구를 막아 두기도 하였다.

 

민간에서는 보통 음력 섣달 23일에 부엌신인 조왕이 하늘로 올라가 옥황상제에게 한 해 동안 그 집에서 일어난 대소사를 보고한 뒤 설날 새벽에 다시 돌아 온다고 여겼다. 나쁜 일을 많이 저지른 집 주인은 이를 겁내 조왕이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도록 아궁이에 엿을 발라두기도 했다. 그 이유는 조왕이 드나드 는 출입문인 동시에 입을 상징하는 아궁이를 막으면 옥황상제에게 가기도 어렵고 설령 빠져 나간다고 해도 입이 붙어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김상년)

 

 

소여물용 아궁이에 불을 지펴 볏짚을 가마솥 가득 삶노라면 구수한 냄새가 겨우내 끼니에 등장했던 시래기 삶는 냄새와 비슷했다. 지푸라기들이 서서히 숨을 죽이고 정지 안이 수증기로 가득 찰 즈음이면 손에 다 잡히지 않을 만큼 큰 여물바가지로 구유까 지 여물을 퍼나르는 일을 담당했다. 마당 입구 외양간의 누렁이는 영롱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선홍빛 혀를 내둘렀다. 그렇게 매일을 몇 해를 보냈다. 엄마도 그 세월을 알아서였겠지 누렁이 팔려가던 날 빨랫감 없이 빨래터에 가자고 손을 움켜잡았던 것을 보면……. 

 

 

가마솥 여물을 다 비우고 나면 맑은 물을 받아 아이 들 씻길 물을 끓였다. 식구가 많으니 어른들은 밥 짓는 솥에 물을 끓여 사용했고 아이들 씻길 물은 여물 삶는 솥에 물을 끓여 사용했다. 한 겨울 정지 안에서 목욕을 하고 나면 며칠 동안 몸에서 여물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누렁이는 여물을 보고 입맛을 다셨던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마을 뒷산에 올라 불쏘시개로 맞춤인 잔나무가지와 갈비를 끌어 지게에 쌓았다. 한 키를 넘길 만큼 지게 짐을 지고는 집 정지와 뒷산을 온 종일 오가며 아궁이 옆에 조심스레 재어놓았다. 

 

아버지는 마당 한켠에 말려 두었던 통나무로 장작을 패고 어린 삼촌들은 아궁이 뒤편으로 장작을 날랐다. 종 일 들락날락하며 어지러진 정지를 엄마는 쓸고 닦고 또 윤을 내었다. 어린 눈에도 그렇게 정갈할 수가 없었다.

 

아궁이는 겨울 솜이불 같은 엄마다. 겨울을 제외하고 하루 반나절은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고두밥만 드시는 할아버지와 진밥만 드시는 아버지 그리고 딸린 식구 열두 명을 삼시세 때 배불리는 것이 일이었다. 아궁이 에 불을 지펴 가마솥 밥만 하루 여섯 번을 지었으니 정지는 엄마의 일터이자 쉼터, 때로는 피신처였다.

 

나직한 소리로 나를 불러 정지에 들어서면 가마솥 같은 엄마 손에는 구운 감자 서너 개가 들려 있었다. 입에 넣 으면 눈처럼 녹아 사라졌다. 지금도 분이 일어난 감자 를 보면 눈을 뭉쳐 놓은 듯한 착각이 든다. 

 

아궁이에 불을 바라보고 있으면 한겨울 구들방에 누워 솜이불을 덮은 듯 포근한 엄마의 온도가 나를 감싸 안는다. 아버지와 다툰 날이면 엄마는 아궁이 앞에서 눈 물을 떨구기도 했다. 아궁이 군불은 엄마의 눈물을 훔 쳐내듯 닦아주었고 채 덜 마른 그렁한 눈으로 따뜻한 정지로 들어오라 손짓하셨다.

 

정지 안 흙벽과 천장은 시커먼 그을음이 켜켜히 덮고 있 어 아궁이에서 솟아나는 불길은 더욱 붉게 느껴졌다. 마당에서 뛰어놀다 우연히 정지 안을 살필 때면 붉은 아궁이와 엄마는 대화를 나누듯 서로를 비추었다. 이 유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무슨 잘못을 했을 때면 아궁 이 옆에 세워둔 부지깽이를 들고 뛰어 나오시기도 했다.

(ⓒ김상년)

 

 

 

불쏘시개는 소나무 갈비와 깡마른 가지들이다. 눈, 비가 잦은 날이나 끼니때가 아닌데 손님이 들이닥치면 아궁이에 풍구를 돌리라고 나를 호출하였다. 불쏘 시개가 축축한 날이면 입바람으로 불씨를 살리려고 후~후~ 불다보면 현기증이 나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기도 했다. 정지 벽면 시렁 위에 구렁이가 누워 있었다. 엄마는 조왕신이라며 내쫓지 않고 정화수를 한 그릇 받아 부뚜막 위에 올려 두시고 매일 깨끗한 물을 갈아 놓고 가족의 안녕을 기도하였다.

 

 

김상년(서예가)
2022-05-03 오후 2: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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