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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약속 특별판 <영남의 어른 ⑬>

  • 강병규(안동MBC PD)
  • 2022-05-03 오후 1:4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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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과 안동문화, 그리고 하회탈

故 류한상 전 안동문화원장

故 류한상 전 안동문화원장(ⓒ강병규)

 

 

고향의 지역방송사에 발을 들여놓았을 무렵이었다. 7년여 떠나 있던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 후 방송장이가 된 나는 선배들이 만들어 놓았던 수많은 프로그램을 접하게 되었다. 또한 선배 피디들로부터 프로그램 제작 노하우를 전수 받으면서 그들의 경험치를 수없이 전해 듣기도 했다. 고향도 안동이고 일터도 안동이다 보니 자연스레 ‘안동문화’, ‘안동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었고, 그럴 때면 선배들은 자연스레 류한상 원장님을 빼놓지 않았다.

당시에도 이미 70대로 접어든 때라 원장님을 직접 만나 뵐 기회는 없었지만 영상자료실에 차곡차곡 먼지 쌓여있는 방송용 테잎 안에서 원장님의 소탈한 웃음을 만나볼 수는 있었다.

 

그리고 지난 2014년 우연한 기회에 안동시 승격 50주년을 맞아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상실록 안동50년>에서 류한상 원장님 과 직접 만나 뵐 기회가 생겼다. 원장님은 ‘보리쑥맥’이 라는 말로 안동 사람을 설명해 주셨다.

편집하면서 찾은 영상 자료에서 80년대 초반 하회별신굿을 조사하시 던 모습도 발견했고, 매미 소리가 유난히 컸던 하회마을 만송정에서 인터뷰에서는 하회탈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난 2019년 오래된 약속 특별판 영남의 어른을 제작하면서 다시 만나 뵌 원장님이 너무나 건강해 보이셔서 마음이 놓였었는데, 지난 10월 하느님의 부름을 받으셨다. 이 글은 지난 2019년 8월 안동문화회관이 있던 자리 경북콘텐츠진흥원에서 이루어진 인터뷰를 재구성한 것이다. 90평생 안동문화를 연구하는 안동인으로 사셨던 류한상 전 안동문화 원장님이 부디 하늘나라에서 평안하시길 바라는 마음이다.

 

고향이 하회마을입니다. 25년생이니 어렸을 적 하회의 모습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것 같은데 기억이 나십니까?

우리 조상들은 동네를 가꾸어 나가는 힘도 매우 컸 지만 내 고향 하회마을은 자연 자체가 참으로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 없는 여러 가지 좋은 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연히 강도 오염이 안 되고 또 우리 문화를 보존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여건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참 깨끗하고 맑은 곳이었지요. 청년시절인 스물두 살까지 하회마을에 살았습니다.

 

그럼 고향에서 학교도 다니셨겠네요?

일제 때 학교는 사실 지금의 학교와는 다르고 숫자 도 얼마 안 됐습니다. 일제강점기였지만 일본인들 도 중요한 마을로 인정을 했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 다 보통 학교를 빨리 만들었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 도 우리 민족 학교로써 우리나라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좋은 학교였던 동녘 동東에 변화할 화化 를 쓰는 동화학교라는 사립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 쳤습니다. 출신이 함경도 평안도인 사람들이 그 학교를 다녔어요. 우리 일가하고 상당히 유명한 분들 을 배출했습니다. 그때는 그랬어요. 하회와는 아무 런 관계도 없는 분들도 그 학교를 많이 다녔지요. 그 때는 학교라는 시설 자체가 매우 적을 때니까요. 해방 이후에 청년운동으로 한 획을 그었던 ‘김산’이라 고 하는 분도 동화학교 출신입니다.

 

동화학교는 어떻게 누구에 의해 세워졌던 학교인가요?

다른 곳도 그렇지만 하회마을에도 공유재산이 많이 있었습니다. 다섯 무리가 한동네에 사니까 잘 사는 사람도 있고 못사는 사람도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러 니 자연스레 세금을 못 내는 주민들이 생겨났어요. 그런 사람들은 안동부에서 벌도 받고는 했었지요. 그런 일로 인해서 증조할아버지가 자결하시고 부인 역시 남편을 따라 자결을 했지요. 하회마을 들어가 다 보면 지금도 열녀를 모신 각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하회 사람들이 모여서 ‘조상 뵐 면목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당시 병조판서로 계 신 분부터 자진해서 돈을 내서는 십시일반 돈을 모 으게 됐습니다. 그렇게 재산을 모은 데가 여섯 군데 나 있어서 그 이후로는 하회 사람들은 세금 걱정 없 이 살 수 있었죠. 결혼할 때도 그 혼사를 담당하는 소가 있어서 도움을 주고, 조상 모시는 일에도 도움 을 주고 하면서 요즘 말로 마을 복지사업을 할 수 있 는 재산을 공동 주식 형태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래서 나라가 망하고 난 다음에 새로운 교육을 해야 미래가 있다고 뜻을 모아서 동화학교를 설립한 것입 니다.  

 

원장님도 동화학교를 다니셨어요?

 아닙니다. 저는 하회 보통학교를 다녔어요. 그 당시 보통 학교가 두 가지 종류로 4년제, 6년제가 있었습 니다. 그 6년제는 안동 군내에 8개 정도밖에 없었습 니다. 풍산도 4년제뿐이었어요. 그 보통학교를 나 오고 난 다음에 저는 서울에 있는 학교로 가고 싶었 습니다. 아버지께서도 그리 원했지만 결국 조모님의 손자 사랑을 꺾지 못했습니다. 조모님이 “나는 손자 떠나보내서 오래 안 보고는 못산다” 하시니 결 국 그 뜻을 따르다 보니까 안동농림학교로 지원을 하게 됐습니다. 졸업하고 군대 후에 서울로 가게 된 거죠.

 

고향 하회 이야기를 좀 더 해보겠습니다. 어머님께서 술을 잘 빚으셨다고 들었습니다.

 택호가 섬촌댁이셨는데, 증조할아버지 끝 동생 집안 어른들이 섬촌댁이라고 합니다. 사실은 그 집이 처 음에는 우리 집이었어요. 내가 거기서 태어났죠. 나 중에 이사를 나오게 돼서 증조부 맨 끝 할아버지가 그 집에 살게 된 거죠. 그때 양반집에서는 농사도 안 하고 장사는 더욱 안 하는 걸로 되어 있었지요. 당연 히 집안 어머니들은 가양주를 빚고 있었지요. 봉제 사 접빈객이 유교집안에서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일제강점기가 되고 나서는 일본 사람들이 주 세 제도를 만들어서 면허를 주기 시작했어요. 그 면 허를 아버지께서 생활 방편으로 하게 됐습니다. 양 조장을 했어요. 그 후로 풍남과 풍서가 합쳐진 풍천 면장을 하시기도 했습니다. 

 

양조장 운영에 면장까지 하신 선친께서 학교를 설립하려고 하셨다지요?

해방 이후 사회에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농지 분배 였지요. 어른이 가진 재산이 좀 있었는데, 토지분할 을 당하는 날 가지고 있던 산과 토지 일부를 재단으 로 만들어서 중등사립학교를 세울 생각을 하신 겁니 다. 보통학교가 아닌 지금으로 보면 중학교를 만들 려고 하신 거죠.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하시고 제가 스물다섯 때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돌아가실 무 렵 제가 하회로 돌아와서는 아버님의 뜻을 잇기 위해 고등국민학교를 인가받아서 그 학교를 운영했습 니다. 그리 오래 하지는 못했고 한 삼 년 정도 운영을 했습니다.

 

 

수업을 하려면 선생님이 있어야 했을텐데 어떻게 운영하셨습니까?

 내가 운영했던 고등국민학교는 정식 학교 교육보다는 교육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학교 교육의 기회를 주는 형식이었습니다. 그게 문교부 방침이었지 요. 많을 때는 학생들이 80명 정도나 됐습니다. 그래도 그런 방식으로 운영됐기 때문에 오래 유지할 수 는 없었습니다. 교원도 처음에는 그리 많지 않았는 데 외지 사람들이 많았어요. 제가 서울에 있었고 해 서 그런지 나와의 인연으로 하회로 아이들을 가르 치려고 들어온 분들이 있었습니다. 전공도 아닌데 예를 들어 이과대 나온 사람 약대 나온 사람들이 돈도 받지 않고 아이들을 가르쳐 줬어요. 대부분 이 북이 고향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너댓 사람이 같이 와 있었어요. 그래서 교사들의 수준이 꽤 높았습니 다. 하여튼 제약회사하는 아버지의 뜻과는 다르게 음악대학을 갔던 분도 있었는데 결국 아버지와의 마찰이 있어서 하회로 내려와 아이들을 가르친 분 도 있습니다.

 

전통문화를 지켜가는 마을이었지만 교육열은 엄청나게 높 았다는 이야기로 들립니다.

사실 하회뿐 아니고 교육열은 우리가 어느 민족보다 도 아주 두터웠다고 봅니다. 자녀들의 교육은 참 애 써서 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해방 이후에 우리나라가 지금의 강국이 된 것도 모두 우리 국민들의 교육열이 앞장섰다고 봅니다. 역시 현대 교육이 아니더라 도 전통 유학에 기초한 교육에 이어 사람 기르는 일 에 애를 쓴 분들이 앞날을 보는 눈이 있지 않겠습니 까? 그러니까 다른 데보다도 교육에 대한 그 열정이 대단했다고 생각이 됩니다.

 

앞서 원장님께서는 안동농림학교를 졸업하셨다고 했죠? 그 후에 고향마을로 돌아와 교사가 된 겁니까? 

내가 안동농림 8회였는데, 해방 직전에 졸업을 했어요. 졸업하면 보통 군대를 가는 편이었습니다. 어른 들은 대학가기를 원하셨지만 군대 때문에 저는 아 예 포기를 했지요. 대학 들어가봐야 1년도 안 돼서 군대를 가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농림학교에 다닐 때 저는 좋은 학생은 아니었습니다. 실습도 잘 안 나 가고 시험지에 이름도 안 쓰고 그냥 제출하고 했던 문제 학생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일본 사람들이 그렇 게 나쁘게 보지는 않았나 봅니다. 근본이 나쁜 아이 는 아니라고 봤던 모양입니다. 다행히 담임선생 권 유로 교사 자격증을 따게 됐습니다. 그래서 초등학 교 교사를 몇 년 정도 했었지요. 초창기에는 지금의 안동중앙국민학교(현 안동초등학교), 그리고는 하 회로 들어가서도 조금 했었지요. 그것도 한 삼 년 못 했습니다. 원래 제가 학교 교사가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대학을 가려고 서울을 가야 했 는데 보통학교 아이들에게 피해를 안 주려고 하다 보니 대학시험 시기를 놓쳐 버렸습니다. 그래서 부득 이 그리 좋지 못한 학교를 들어가게 된 겁니다. 

 

대학에서 전공은 뭘 하셨습니까? 해방 직후라 혼란한 시기 였을텐데 대학 생활은 어떠셨어요?

저는 법학을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공부는 제대로 못했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의 대학 형편이라는 게 여러분들은 모를 겁니다. 좌우 익 싸움 때문에 학생들이 데모꾼도 아니고 깡패들 같았습니다. 학생들이 서로 사상이 안 맞으면 교수 들도 두들겨 패고 형편없었어요. 그 당시에는 학교 에 질서라는 게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이니 늦게 학 교에 들어간 내 공부가 제대로 될 리가 없죠. 어쩌다 보니 나도 학생회 조직에 가담해서 우익쪽으로 활 동을 하게 됐습니다. 우익 학생들은 경찰의 옹호를받고는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공부는 다른 세상의 일이 됐었다고 해야지요. 그러다가 선친이 위중하셔 서 결국 졸업도 못하고 고향으로 내려왔습니다. 그 래서 한 게 고등국민학교를 세우고 운영을 했던 겁니다. 그러다가 다시 고향을 다시 떠나게 됐지요.

 

원장님께 고향 하회는 어떤 곳입니까?

사실 어릴 때는 뭐 하회 밖에 안 나가본 어린애였기 때문에 세상을 알 턱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릴 때 부터 조상에 대한 또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은 다 가지고 있었어요. 왜냐하면 일제강점기에도 일본 사 람들에게까지 인정받는 마을이었으니까요. 어느 마 을보다도 우리 마을은 우수한 마을이다. 또 우리 마 을에는 훌륭한 분도 대단히 많다. 막연했지만 그런 생각을 가지고 커왔습니다. 고향 하회는 나에게 그 런 곳입니다. 

 

원장님과는 뗄 수 없는 하회탈과 별신굿 이야기를 본격적 으로 해보겠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셨기에 사람 들이 그렇게 평을 하는 겁니까?

사실 나도 어릴 때 별신굿 하는 것을 못 봤습니다. 듣기로는 마지막 별신굿이 내 나이 세 살 때였다고 합니다. 내가 기억을 할 리가 없죠. 또 하회탈이 있다 는 것은 알았지만 삼오날 하회탈 구경도 못 했어요. 하회탈은 옛부터 신의 허락 없이는 꺼내 보지 못했 습니다. 구경도 못 했던 내가 하회탈이 소중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 때문이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 우리나라에 민속학자로는 송석하 선생 한 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농림학교 다닐 때 송 석하 선생이 하회에 왔어요. 선친과 알고 계셔서 우 리 집에서 묵어가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내가 송 선 생이 가지고 계셨던 무비 카메라를 처음 본 겁니다. 풍천면장을 하셨던 선친께서 송 선생께 보여드리려 고 탈놀이 하던 사람들을 불러서 요즘 말로 시연을 한 번 해보라고 한 겁니다. 기억이 납니다. 아주 생생 하게. 선친이 그 사람들에게 “옛날에 하던 대로 한 번 해 봐라”라고 하니까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이 “아 이고 신이 내리지 않았는데 우리가 어찌합니까?”라 고 하더라구요. 그 당시에는 인원도 다 안됐어요. 남 아 있는 사람들도 모두 연기하는 광대도 아니고 산 주도 있고 했었지요. 그런데도 그 상황에서 별신굿 을 시연하게 했어요. 송 선생이 굿하는 장면을 무비 카메라로 찍고 있었는데 그걸 보고는 내가 하회탈 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송 선생은 그 당시 재연하 는 장면에서 중요한 점을 발견했나 봅니다. 그래서 선친께 다시 하회를 찾아오겠다고 하는 얘기도 들었 어요. 그때 하회탈 사진 몇 장이 지금 나타났다고 하 는데 무비 카메라로 찍은 영상은 찾아내지 못했나 봅니다. 그때는 사실 뭐 우리 민속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 민속이 우리 문화를 지키는데 소중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잘 모르고 있었지만 막연하게 ‘우리나 라의 유명한 민속학자가 이 탈을 이렇게 소중하게 생각하는구나’라고만 생각을 했었어요.

 

선생이 촬영한 영상이 있으면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데 참 아쉽습니다. 촬영할 때 원장님이 보신 몇 장면 기억을 좀 떠올려 주시죠, 가능하십니까?

기억이 납니다. 요즘 별신굿탈놀이를 보면 파계승과 의 장면에서 부네가 오줌 누는 장면이 나와요. 그런 데 그게 그때는 아니었습니다. 그때는 부네가 아니 라 각시탈을 쓴 광대가 오줌을 눴었지요. 요즘 예쁘 장한 부네가 나오는 장면이 잘못 된 겁니다. 좀 안타 깝습니다. 원형을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리고 그때 도 맨 앞에 주지마당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아 까 말했듯이 인원이 적어서 정식으로 재연이 안 됐었 습니다. 그래서 탈 여러 개를 내놓고 그냥 촬영만 하기도 했었습니다.

 

그 당시 하회탈은 마을 어디에 보관을 하고 있었습니까?

 하회탈은 옛날 하회마을에 동사라고 있었습니다. 지금의 북촌 앞쪽에 그 동사가 있었어요. 굉장히 오 래된 집이었죠. 내가 아홉 살쯤이었던 걸로 기억하는 데 일본 사람들이 나와서 조사를 했어요. 그 동사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집이라는 근거가 나왔습 니다. 내 생각에는 그 일대가 옛날 절터였던 것 같아 요. 그 동사도 절집 건물의 일부가 아니었나 싶습니 다. 그런데 그 집에 불이 난 겁니다. 그 집 다락에 탈 을 보관하고 있었는데 불이 난 겁니다. 마을 사람들 이 모두 다 나와서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탈놀이를 하던 광대 중 하나가 말리는 사람들을 다 뿌리치고 뛰어 들어가서 하회탈을 모두 구해 나왔습니다. 그렇게 구해낸 탈이 바로 지금 국보로 지정된 하회탈 입니다.

 

그분이 아니었다면 지금 우리는 하회탈을 보지 못하고 있 을 수도 있었겠습니다. 천만다행이네요. 그 이후로 하회탈 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가면이 된 계기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회탈을 온 세상이 알게 만든 분은 그 당시에 미 대 사관에서 문화를 담당하고 있던 맥타가트(Arther Joseph Mactaggart)라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이 외 교관 임기를 마치고 영남대학에서 교수를 하고 있 을 때입니다. 친구를 통해서 그분에게 하회탈 이야 기를 들려줬더니 곧바로 하회로 달려왔어요. 참으로 고마웠던 것이 분명 미국 사람이었는데 그냥 함부로 탈을 보고 만지고 하는 게 아니었어요. 신께 고유를 먼저 하자고 한 겁니다. 제를 올리고 난 다음에 하회 탈을 보자고 하는 거였어요. 아프리카에서도 그렇게 한다면서 자기가 돈을 내서 제물을 사서 고유를 올린 겁니다. 우리나라 학자들도 뭐 잘 안다는 식으로 함부로 대하고 했던 걸 많이 봤는데 참 감동이었습 니다.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하는 말이 한국에서 정 리를 다 못했다고 미국 가서 마무리해도 되냐고 물 어왔습니다. 당연히 그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한 1년 좀 넘어서 세계연극학회지에 발표가 됐습니다. 그것도 표지에 하회탈을 찍어서 ‘세계 제일의 가면 이다’라고 하면서요. 그때 말할 수 없이 기뻤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난 이후에 하회탈을 그렇게 괄시하던 우리나라 학자들이 달려와서는 탈 한번 보여 달라 고 사정을 하더라구요. 국보로 지정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지정할 당시에 왈가왈부하는 것 없이 덮어놓고 통과시킨 건 하회탈뿐이었다고 하더라구 요. 세계 제일의 가면이라는데 우리나라 위원들 학자들이 뭐라고 할 수가 없었던 거였죠. 

 

 

하회탈이 세계 제일의 가면이라고 한 데는 또 다른 분의 이야기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국 하버드 대학 학자가 있었는데 하회마을에 한 번 온 적이 있습니다. 그분이 저한테 참 묘한 질문을 했습니다. 뭐였냐 하면 “회화나 조각에 표정의 변화가 있느냐”는 것이 었습니다. 저는 그런 것을 잘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회화나 조각품에 표정의 변화가 있을 수 없다고 답 을 드렸지요. 그런데 그분이 하회탈은 표정이 변한 다고 이야기를 해 줍디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어 요. 어찌 보면 조각품에 불과한 하나의 가면에 표정 이 변한다니 그게 말이 되는 일입니까? 그렇지만 그 분의 설명에 저는 이내 수긍할 수밖에 없었어요. 서 양의 루브르 박물관 같은 곳을 다 다녀 봐도 회화나 조각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아무도 찾을 수 없을 겁 니다. 우리나라에 아시아재단이라고 미국재단인데 우리나라의 보물 같은 문화재를 보수해 주는 재단이었습니다. 책임자를 한 번 만난 적이 있는데 그 분 하는 말이 “미국이 하회탈의 가치를 전 세계에 확인 해 줬다. 내가 이 재단의 책임자로 있으니 뭔가를 해 드리고 싶다 요구만 해 달라”는 거였습니다. 나는 첫 번째로 하회탈을 보관할 장소가 없다. 안전한 보관 소를 하나 만들어 달라고 했고 두 번째로는 원래 열 두 개인 탈 중 세 개를 잃어버렸으니 복원할 수 있도 록 도와 달라고 했습니다. 그 책임자분이 멋진 제안 이라고 하면서 당장 신문에 복원할 수 있는 조각가, 미술가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냈습니다. 하회탈을 복원하려고 제가 하회탈을 들고 서울로 갔습니다. 조각가들도 진짜 하회탈을 봐야 만들 수 있을 거라 고 생각했지요. 수백 명의 조각가 미술가들이 몰려 들었는데 하회탈을 놓고 내가 설명을 했습니다. 하 회마을에서는 신이 허락해야 볼 수 있는 탈이기 때문에 결국 사람의 희로애락을 가면의 얼굴에 모두 표현해 놓아야 한다. 또한 가면을 움직이면 고정된 얼굴에 표정의 변화가 있게끔 해야 한다고 했더니 그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 모두가 반대하지 않더라 구요. 그렇지만 미술가들이 그걸 현실로 받아들이기 가 어려웠던지 한 사람에게 가면을 써 달라고 했습 니다. 어떤 대학 교수가 하회탈을 썼더니만 스케치 하는 사람, 사진 찍는 사람들이 움직여 가면서 포즈 를 바꿔달라고 주문하더군요. 거기에 있던 운보 김 기창 화백이 손을 흔들고 소리를 지르더라구요. 진 짜 표정의 변화가 있다고 하는 겁니다. 처음에는 그 럴 리가 없다며 손사래를 쳤던 운보가 결국 인정을 하고만 겁니다. 하회탈은 비록 조각이지만 표정의 변화가 분명히 있다면서요.

 

고故 운보 김기창 화백도 인정했다는 표정의 변화, 구체적으로 설명을 좀 해주신다면요? 

 우선 사람이 골이 나면 표정이 어떻게 됩니까? 이렇 게 약간 숙이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눈을 치켜뜨 면서 고개를 숙이면 보는 사람이 기분이 좋아질 리 가 없습니다. 하회탈은 이렇게 고개를 들고 젖히면 웃는 얼굴로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표정 중 에 제일 어려운 표정이 뭔지 압니까? 수줍어하는 표 정입니다. 각시탈이 넙대대한 게 무의미한 것 같은데 몰래 오줌을 누다가 누가 보게 되면 수줍어합니다. 그럴 때 눈이 이렇게 돌아가게 됩니다. 눈이 각시탈 마냥 된다는 겁니다. 수줍어하는 그 얼굴은 각시탈 보다 더 좋은 표정이 나오지 않습니다. 표정의 변화 가 얼굴을 돌리는 속도와 자기 감정을 넣으면 그게 표정이 지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발견한 것이 바로 우리 민족입니다. 

 

하회탈에 그런 이야기가 있었네요.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런 하회탈은 마을에서 정말 신적인 존재가 아니었을까 싶 은데요? 

그것이 이렇습니다. 우리나라 고유문화가 어떤 것이 냐 하면 사실 외래문화에 영향을 안 받고 우리 조상 들이 가지고 있던 게 그게 고유문화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항상 그렇게 주장합니다. 문자가 없어 서 기록 못했을 당시 결국 그 시대를 살고 있었던 사 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풍속을 전달하는 것일 테고 그래서 그런 연구를 하는 민속학이 중요하다고 생 각합니다. 우리나라에는 하회탈춤 말고도 봉산도 있고 고성오광대놀이도 있고 근처 가까운 예천에도 청단놀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탈놀이의 탈은 그렇게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다른 탈놀이들은 대 부분 일종의 원시를 무대화 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 회탈은 원시적인 것이지만 신을 믿는 신앙의 풍속에 서 사용되었던 제례가면입니다. 제사에 이 탈을 사 용한 것은 하회탈이 유일한 것이었죠. 그래서 이 하 회탈이 소중한 우리 고유의 문화라는 것입니다. 하회별신굿은 몇 년 만에 한 번씩 하는데 언제 꼭 해 야 한다는 것이 없습니다. 옛날 마을 사람들의 이야 기를 들어도 그냥 서낭님이 하라고 그래야 굿을 벌 이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회별신굿은 제례였고 별신굿할 때 썼던 하회탈은 제례의 가면이 되는 것입니다. 

 

하회탈을 재발견하고 기록화하는 과정에 대해 여쭤보겠습 니다. 별신굿을 마지막으로 보고 채록을 하셨다고 그러셨 지요? 

 그건 그냥 저의 관심이었습니다. 제가 마을에 있을 때 시간도 있고 마침 양조장도 할 때라 마을 노인들 을 불러 모아 놓고 막걸리를 받아드렸어요. 그러면 서 노인들이 하는 이야기를 받아 적었습니다. 혹시 나 또 다른 이야기가 나올까봐 직접 물어보는 방식 이 아니라 취기가 올라 자기네들끼리 그냥 하는 이 야기를 옆에서 기록했습니다. 그러다가 정부에서 하 는 민속축제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60년대 중반쯤 일 겁니다. 내가 학자도 아니고 그냥 민속에, 하회별 신굿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일 뿐인데 별신굿 을 재연해서 결국 대통령상을 탔습니다. 

 

그렇게 채록하고 하회탈의 가치를 세계적으로 알리고 하셨 는데, 안동에서도 큰 도움을 주신 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하회탈을 안동에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두봉 주교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나한테 참 고 마운 사람입니다. 안동문화회관을 짓고 난 다음에 나한테 관장 자리를 맡겼습니다. 다른 기독교 같으 면 절대 안될 일이었지요. 우리나라 미신에 가까운 이 하회탈과 별신굿을 천주교라는 종교 단체 안에 서 할 수 있도록 인정해 줄 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두봉 주교님은 이해했어요. 두봉 주교님을 존경하는 다른 신부들이 내가 하는 별신굿 재연 같은 일을 반대하면 주교님이 모두 해결해 줬어요. 뒷받침을 다 해준 거지요. 우리 문화를 이해하고 아끼고 보존하 는데 제일 크게 앞장서셨던 참 고마운 분입니다.

 

얼마 전 하회탈이 고향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직접 보셨 습니까?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습니다.

 사실 하회탈이 처음에 국보로 지정되고 안동에는 보관할 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정부에서 보 관하게 됐는데 그때 나한테 정부에서는 곧 안동에 보관시설을 만들어서 되돌려주겠다고 했었지요. 그 게 벌써 세월이 이렇게 흘러버린 겁니다.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는 날 나도 나가서 봤습니다. 하회에서 탈이 돌아왔다고 고유를 했습니다. 날이 쌀쌀했었지요. 괜히 눈물이 핑 나더라구요. 수십 년 만에 드디 어 고향으로 돌아온 하회탈을 그렇게 만났습니다.

 

우리 문화에 대한 사랑이 남다르십니다.

 내가 어릴 때부터 든 생각이 우리나라와 일본, 또 다른 나라와 다른 점은 지금도 제가 그런 생각 합니 다. 그 나라가 지니는 문화가 어떤 방향이냐에 따라 서 그 나라의 운명이 결정지어진다고 봅니다. 사실 은 요새 젊은 사람들이 ‘한류’로 세계적으로 각광 받 고 있는데, 그분들의 재간도 있어서 그렇겠지만 그 것은 조상들이 지켜온 우리의 고유문화 덕택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신명이라면 그 어느 민족도 우리 민족을 따라오지 못한다고 생 각합니다. 통제하고 간섭하고 막아내지 말고 자유 로이 두면 신명은 저절로 찾아옵니다. 그런 면에서 는 그 어느 민족도 우리를 당해내지 못합니다. 우리 민족은 신명 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됩니다. 일제 강점기를 겪었지만 일본 사람들은 한 클래스 안에서 도 리더가 안 생기면 아무것도 못하는 민족입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은 각자가 신명이 나도록만 해주면 충분히 잘해 낼 수 있습니다. 그 신명은 누구도 막지 못합니다. 그게 바로 지금 한류가 세계로 뻗어나가 는 이유가 아닌가 그렇게 봅니다.

 

 

 

원장님처럼 평생을 우리 문화에 애정과 관심을 쏟아 붓고 계신 분도 드물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할 일 없이 거기에 조금의 관심을 가졌다는 것뿐입니다. 사실은 우리나라가, 우 리 민족이 우리 고유의 문화적인 DNA를 자꾸 잊어 버리고 있어서 걱정입니다. 지금 K-POP이 세계적인 선풍을 끌고 있는 것도 우리 국악이 남아 있었기 때 문에, 그래서 거기서 찾은 신명이 있었기 때문에 그 렇게 해낼 수 있었다고 봅니다. 서양 음악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래서 걱정인 것이 우리 문화에 대한 교 육이 요즘 형편없어졌어요. 그것이 너무 안타까울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요즘 젊은 세대들한테 들려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부탁드리겠습니다.

 사실은 요새 젊은이들이 참 슬기롭고 좋은 데가 많 은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우리 고유의 문화를 너무 소홀히 하는 것 같습니다. 일부 몇 사람이 좋다고 하는 것으로 유지되는 것이 문화가 아닌데 우리 문화에 소홀한 면이 없지 않은 것 같습니다. 교 육부터 우리의 것을 먼저 가르치고 남의 문화를 알 게 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남의 문 화를 가지고 우리 것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거꾸 로 된 것이라고 봅니다. 한참 잘못된 거예요. 그건 결 국 젊은이들의 몫이라고 봅니다. 여러분들이 그것을 바로 잡아 나가야 할 겁니다. 요즘 정치도 윤리와 도 덕이 아니라 자꾸 법의 잣대로만 평가를 하고 단죄 하려고 하는데 법으로만 나라를 다스리려고 하면 안 될 겁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의 젊은이들도 스스로 윤리와 도덕을 생각하고, 우리 고유의 문화 를 이어가려고 노력해 주면 좋을 것 같아요. 그게 아흔 넘은 촌로의 바람입니다.

 

비록 살아온 시대가 달라서 같은 경험을 공유하거나 비슷한 세계관을 가질 수는 없었지만, 안동문화에 대한 우리 고유의 전통에 대한 신념은 어느 누구에 게도 뒤짐이 없을 정도였다. 자주 찾으시던 문화다방 이야기며, 안동문화원장 시절의 에피소드들은 공식 인터뷰를 하기 전 사전 취재에서 들을 수 있었던 소중한 기억이기도 했다. 세 시간 가까운 긴 인터뷰 에도 불구하고 곧은 자세로 또박또박 짚어내 주시는 것을 보니 아직 건강하신 모습이라 고마울 뿐이었다. 그렇지만 작년 가을 안동문화회관 이진구 전 관장님의 전화 한 통에 세월의 덧없음을 또 한 번 실 감하게 됐다. 안동의 큰 어르신은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셨다. 스물네 분의 어르신을 만나 귀한 말씀을 듣는 작업을 한 지 벌써 3년이 지나고 있다. 그 사이 벌써 일곱 분이 세상을 버리셨다. 그 소중한 기억들을 더 많이 담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야 하는데 세월은 그분들을 자꾸만 데려가려 한다. 그렇게 어른들이 우리 곁을 떠나고 있다.

 

강병규(안동MBC PD)
2022-05-03 오후 1:4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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