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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약속 특별판 <영남의 어른 ⑪>- 길 위의 작가 김주영

  • 강병규(안동MBC PD)
  • 2021-08-25 오후 4:23:36
  • 1,681

선생님과의 인연은 10년이 훌쩍 넘었다. 회사에서는 지역 출신으로 나름의 일가를 이룬 분들을 인터뷰 하는 토크 프로그램을 원하고 있었고, 나는 이 프로그램의 진행자로 청송 출신 소설가 김주영을 떠올렸다. 유려한 말솜씨의 전문 진행자는 아니었지만 수십 년 길 위를 섭렵한 소설가로 사람을 만나온 세월이, 인터뷰를 하는 토크 프로그램의 진행자로 손색이 없겠다고 판단했다. 다행히 제작국장도 흔쾌히 승낙을 해준 덕에 1년이 넘는 시간을 선생님과 함께 할 수 있었다. 2004년 그렇게 탄생한 프로그램은 <김주영의 사람과 사람>이었다. 60대 후반으로 가고 있던 선생님은 180cm가 넘는 키에, 두주불사형의 호탕한 분이셨다. 2주에 한 번씩 서울로 가서 두 분의 인터뷰이를 만나는 녹화가 끝나면 진행자와 연출자 그리고 작가 이 세 사람의 발길은 늘 장충동이었다. 선생님이 즐겨찾던 정갈 한 밥집이나 맛난 고깃집 아니면 그 유명한 족발집에서, 세 사람은 선생님의 그날 출연료의 절반을 넘게 탕진하고 말았다.

 

  ▲김주영 작가(ⓒ강병규)               

 

그 이후 한동안 만나 뵙지 못했던 선생님이 고향인 진보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꼭 한번 인터뷰를 해야겠다 마음먹은 터였다. 그리고는 제작하고 있던 프로그램 <오래된 약속 특별판 영남의 어른> 핑계로 두어 시간 <사람과 사람> 뒤풀이 자리에서 들었던 여러 이야기들을 청했다. 그날 역시 진보시장 골목 안 선생님의 단골식당에서 막걸리 한 말은 족히 비워 냈을 만 한 뒤풀이가 이어졌다. 지금 이 글을 정리하면서 찾은 기사에서 지난봄 오랜만에 신작 장편소설 『광덕산 딱새 죽이기』(문학동네)를 펴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선생님은 기어이 글을 쓰고 계신다. 참 고맙다. 이 인터뷰는 벌써 오래전 2018년 가을 청송 진보에 있는 객주문학관에서 이루어졌음을 알려드린다.

 

모시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선생님 소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저는 소설 쓰는 김주영이고요. 올해(2018년) 지나면 만 80이 됩니다. 이제 노후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지내는 나이가 아니냐, 그리고 지금은 혼자 살고 있고 대략 그런 형편입니다. 그런데요, 요새 신문이나 하여튼 이웃에서의 이야기들도 들어보면 보통 100세를 넘긴다고 그래요. 특히 할머니들이, 그걸 보면 나도 혹시 90까지는 살 수 있지 않을까라는 욕심을 내 보는데, 그건 너무 과한 욕심이다 싶기는해요. 뭐라고 할까요, 어릴 때를 비롯해서 청년시절까지 고생을 좀 했기 때문에, 몸을 막 내두른거죠. 그러다보니 100 세까지는 못살 것 같고, 한 90 가깝게 살면 아주 많이 사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사람의 운명을 누가 알겠습니까?

 

아마 더 장수하실 거라고 생각하는데. 길 위의 작가이신 선생님,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지금은 그 나이치고는 괜찮은데요. 매년 한 번씩 정기검진을 해보거든요. 근데, 별 이상은 없지만, 왼쪽 무릎에 관절염이 왔어요. 그래서 걸음을 옛날처럼 활발하게 내딛지 못하고 천천히 걷는 걸로 만족하고, 그냥 다리가 좀 덜 아프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제가 무릎을 다친 것도 의학상식 같은 게 너무 없어서 이렇게 된 것 같아요. 옛날 50대 때, 태백산 능선을 8시간 안에 완주하는 프로그램에 제가 참여를 했었어요. 괜찮았는데 내려올 때 왼쪽 무릎에서 뼈가 마주치는 소리가 나더라고요. 그때 병원 가서 조치를 했으면 좋았을텐데, 한 30년 이상 방치를 해놔서 그런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면 상당히 좋은 상태가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걷는 것으로 만족하고 하루에 한 시간 정도 걷습니다. 비오는 날은 자전거 타고, 비 안 오는 날은 걷고 이런 정도로 대충 건강하게 살려고 애쓰고 있죠.

 

이곳 진보가 참 좋으시죠?

여기 청송 진보로 내려온 지 한 3년쯤 됩니다. 그동안 서울살이에 아주 잊어버렸던 것을, 이 동네 산책하면서 혹은 요새 젊은 사람들은 멍 때린다고 얘기 합디다만, 멍하니 이렇게 바라보고 있으면 옛날에 겪었고, 그동안 도회지 생활에서 잊어버렸던, 또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렸던 것들을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어요. 예를 들면 가장 인상적인 것은 붉은 노을을 볼 수 있어 요. 그냥 해질 무렵 바깥에 나가면 저 산 능선에 붉게 물들어지는 저녁노을, 그걸 적어도 한 시간 정도는 바라볼 수 있다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은 그걸 반딧불이라고 하는데, 옛날 어릴 때는 개똥벌레라고 그랬거든요. 사실 반딧불이가 낮에는 개똥이나 소똥처럼 습한 곳에서 지냅니다. 그러다 밤에 나와 활동하기 때문에 그게 반딧불이가 됐는데, 우리 어릴 때는 개똥벌레라고 그랬죠. 그런데 그런 똥이라는 이름을 가진 벌레가 관광상품화 됐습니다. 영양군에는 반딧불이 축제가 있거든요? 세월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또 개구리 우는 소리, 또 간혹 오솔길을 지나다니는 뱀 같은 그런 것들을 볼 수 있다는 즐거움이 있어요. 또 있습니다 여기 청송은 사과가 엄청 유명하죠. 사과밭을 이렇게 지나갈 수 있다는 즐거움, 이런 것을 누리고 있습니다.

 

선생님에게 청송은 어떤 곳일까요?

청송은 제가 어릴 때 태어나서 초등학교 졸업하고 잠깐 벗어나 있다가 그 다음에 다시 또 여기서 중학교 를 조금 다녔던 곳입니다.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여기 있었습니다. 제 고향이죠 청송은. 내가 태어난 집도 복원되어서 저 장터 가에 있는데, 어린 시절을 여기서 보낼 수 있었다는 것은 나로서는 큰 행운이었습 니다. 지금이야 생각하기도 싫지만 어린 시절에 겪었던 가난, 또 외로움이나 혹은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벌어졌던 갈등 같은 이런 것들이 나를 만들어준 기원이 됐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또 내 소설의 어떤 밑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청송은 내 영혼을 만들어 준 그런 장소입니다. 고향이라는 말 이상으로 내게 많은 영향을 끼쳐준 곳이 청송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동안 도회지 생활을 하시면서 청송을 조금은 벗어나 계셨잖아요. 약간의 그리움은 있으셨겠어요?

아닙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른데요. 청송을 벗어났을 당시에는 굉장히 속 시원했어요. 왜냐하면 청송에서 보냈던 내 어린 시절은, 그 당시로서는 생각하기도 싫었던 그런 시련이나 고통이나 혹은 갈등, 괄시, 소외 받은 거, 외로움 같은 것들로 점철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 벗어나는 게 속 시원했죠. 그런데 객지에 나가서 고향에서 겪었던 그런 고통이나 고생보다 더 큰 고생을 겪어 봤어요. 청송을 벗어나서 그런 것이 기다리고 있을 줄 정말 몰랐죠. 객지에 나가서는 어머니의 영향권 밖에 있었으니까 별별 일을 다 했습니다. 중학교 1학년 정도의 나이였는데 심지어 노숙도 해봤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있을 때는 하루에 두 끼 정도 겨우 먹고 살았는데, 벗어나서는 하루에 한 끼 먹는 날도 있었고, 굶을 때도 다반사였습니다. 어떤 사람의 관심도 받을 수 없었던 그런 생활을 했고, 그래서 떠날 당시에는 그냥 속 시원했는데 더 많은 고 통을 겪고 고생을 했었죠.

 

그런 고통 속에서도 확고한 자기 신념이 있었기 때문에 어려움을 극복해 낼 수 있지 않았나 싶거든요?

이런 한 가지 예를 들 수 있는데요. 인도에 갠지스 강이 있지 않습니까? 갠지스 강에 위에서 쭉 내려오다가 인도 북부에 있는 바라나시에 도달하면, 그 갠지스 강물이 굉장히 오염이 심합니다. 그 바라나시에는 시체를 태워서 거기에다 버립니다. 그것도 반쯤 타다 남은 시체도 버리고 해서 그걸 어떻게 표현하면 강물이 아니고 걸쭉한 콩죽같은 그런 흐름을 갖고 있거든요.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죠. 그런데 거기에 인도 전역에서 모여든 사람이 목욕을 합니다. 그 물에 몸을 씻음으로 해서 지은 죄가 씻겨나간다는 생각이 있거든요. 심지어 그걸 먹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물을 먹고 난 사람들이, 몸을 씻은 사람들이 피부병에 걸렸다는 얘기는 못 들어 봤어요. 그건 뭐냐 하면 바라나시를 지나는 갠지스 강물에 대한 어떤 종교적인 신념이 있기 때문에 피부병에 걸리는 사람이 없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마음속에 있는 하나의 신념이 병균을 이긴다는 거죠. 마찬가지로 여기를 벗어나서 외지에서 겪었던 고통이나 고생들이 알고 보면 나를 키워 준, 지금의 나를 구성해 준, 소설가 김주영을 만들고 구성해준 하나의 자양분이었다는 생각을 아주 늦게 하게 되었어요. 진작 하게 된 게 아니고요. 저는 그래서 늘 늦습니다. 제가 좀 둔합니다. 둔한 게 오히려 좋을 때도 있어요. 너무 예민하면 우울증에 걸린다든지 정신적으로 상당히 위태로운 상태까지 갈 수 있는 데 나는 둔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것이 늦게 오고, 또 늦게 깨닫고 합니다. 그게 오히려 내 건강에 좋았지 않느냐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갠지스 강물에 목욕을 해도 피부병에 걸리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아, 멋진 표현이셨어요. 어쩌면 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 겠지만, 한번 여쭤보고 싶었습니다. 아버지가 안 계셨 던 삶이었다고요?

네, 그것도 나중에 생각하면 나한테는 하나의 자양분이었는데, 아버님이 계셨어요. 계셨는데 중학교 입학 하기까지 아버님의 존재를 몰랐습니다. 아버님을 만나보질 못했어요. 어렴풋이 있었다는 걸 알았지만 못 만나봤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비로소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 혹은 동생, 누나, 이런 단어에 대한 친근감이 있지 않습니까? 저는 그 ‘아버지’에서 그걸 못 느 꼈어요. 오직 두려웠죠. 왜냐하면 여기 고향에서 어머니하고 같이 살적에, 내가 굉장히 칭얼댄다든지 어머니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그런 요구를 자꾸 한다든지 할 때 어머니는 어떻게 말씀하셨냐면 ‘너 그럼 아버지한테 보내버린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한테 보내버린다, 얼굴도 모르는? 나하고 한 번 도 피부로 접촉이 없었던, 그런 사람에게 보내버린다는 어떤 두려움이었습니다. 그 단어, 아버지라는 단어 자체가 두려움이었어요. 그래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를 만나게 됐는데, 역시 아버지라고 다가가서 손을 잡는다든지 얼굴을 기대면서 비빈다든지 하는 그런 것은 한 번도 못 해봤습니다. 두려운 존재인데 말하자면 개가 호랑이를 만난 격이에요. 어떻게 거기에 대고 볼을 부비고, 손을 잡고 할 수 있겠어요. 두려운 존재인데. 그래서 아버지와 나는 상당한 기간 동안 같이 좀 지냈지만 결국은 물과 기름으로 남았고 지금까지도 한 번도 어떤 애틋한 그런 감이 없었죠. 그래서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를 떠나온 이후부터 난 혼자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혼자 살고 혼자 결정하고. 심지어 학교 가는 거, 대학을 선택하는 거, 군대에 가는 거, 혹은 내가 소설을 쓰기로 작정한 거, 전부다 나 혼자 결정했습니다. 누구도 나한테 조언을 주지 못했어요. 어머니도 내 진로에 대해서는 아무런 해답을 줄 수 없었어요. 어머니가 사실 내가 참 존경하고 유일하게 존경하는 분이지만, 글을 읽고 쓸 줄 몰랐어요. 그런 양반이 나한테 어떤 조언을 줄 수 있 겠습니까? 그래서 모든 것을 나 혼자 결정했어야 했어요. 그런데, 그러고 보니까 어떤 결과가 생겼냐면, 아무리 큰 시련이 앞에 닥쳐도 두렵지 않게 되더라구요. 알고 보면 그 모든 것이 교훈이었고, 그 모든 것이 나를 키워준 하나의 큰 바위 같은 그런 큰 덩어리 였다고 생각합니다. 나에게 살아나갈 수 있는 신념을 준 그런 대상이었다는 말입니다. 글 모르는 어머니, 또 나에게 두려움을 준 아버지, 그리고 항상 내게 어떤 그런 혜택보다는 가해를 가하는 어떤 내 주위의 환경들, 이런 것들이 오히려 나한테 나를 키워 준 자양분으로써의 역할을 하지 않았나 이런 생각을 합니 다. 그 당시에는 ‘내가 참 이런 식으로 고생하면서 살아도 되겠나’하며 자살도 생각해보고, 절벽 같은 데 선 게 한두 번 있었는데, 그 모든 것이 그때마다 하고 나면 나에게 긍정적인 생각을 심어주고 계기를 만들어 준 환경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그 선택의 기로나 가정의 불우한 환경 때문에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거든요. 예전보다 오히려 지금 세대에는. 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군대에 갔거든요. 군대도 나 혼자 결정해서 육군에 자원입대를 했어요. 강원도 화천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굉장히 얼차려가 심했습니다. 그리고 병사들을 거의 굶겼어요. 무슨 특식이 나온다, 오늘은 고기가 나온다 그러는데도 주방에 가면 고기는 하나도 없고 국물만 있었어요. 그때는 부정이 아주 심했고, 기합도 함부로 막 주고 이랬었죠. 그런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개인 감정에 의해서 벌을 주는 거라는 기합들이 상당히 많았거든요. 제가 그 군대에서 맞아서 제대하고 나니까 허리가 아팠어요. 그래가지고 약을 먹고 한 1년을 치료했습니다. 겨우 낫긴 했죠. 그처럼 아주 악질적인 기합을 많이 받고 그랬는데, 그 사람이 굉장히 미웠죠. 계급도 별로 높지도 않은 사람이 말이지, 걸핏하면 기합을 주고 잠도 안 재우고 했던 그런 기합들이 내게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 거예요. ‘아, 이것을 이겨냄으로 해서 내 경쟁력이 살아난다’는 이런 생각을 내가 한 거예요. 그래서 그 악질적인 기합을 긍정적으로 돌릴 수 있는 어떤 계기를 그 사람이 만들어줬다는 생각을 하는데, 그게 바로 세상살이라는 겁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불행과 행복이 갈라지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긍정적인 것도 부정적인 것도 생각에 따라서 좋게 생각 할 수도 있고 나쁘게 생각할 수도 있죠. 세상에 80살 넘게 살아 보면요, 세상 별거 아닙니다. 살아간다는 게. 그러니까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면 별로 어려울 것도 없고, 원수 질 사람도 없고, 그 다음에 자기 삶을 열심히 꾸려나갈 수 있는 그런 힘을, 에너지를 얻는 거예요. 부정적인 것보다는 긍정적인 삶, 그것이 나를 굉장히 젊게 만듭니다. 사실 알고 보면 아무것 도 아닌데요, 성자 같은 얘기를 제가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나이를 먹으면 그런 생각까지도 하게 되는가 봅니다.

 

어머니에 대한 얘기를 조금 더 나눠 보고 싶습니다. 어머니 입장에서는 참으로 안타까운 아들이 아니었나 싶은데?

내가 모르는 어머니의 과거가 있어요. 그걸 내가 살아 계셨을 때 물어보고 싶었어요. 우리 아버지를 어떻게 만났는지, 혹은 만나기 전에 어떤 일이 어머니 한테 일어났는지, 그런데 내가 그것을 못 물어봤습니다. 대강 짐작은 하죠. 어머니가 태어난 그 시절이 일제강점기였는데 엄청나게 가난했습니다. 자기 자신 의 의지대로 살지 못할 만큼 가난을 겪었던 어머니입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만났 을 때까지, 이걸 내가 못 물어봤습니다. 왜냐면 어머니께 상처를 줄까 싶어서 그랬어요. 우리 아버지하고 어머니는 정식 결혼한 사이는 아닌 것 같아요. 그래서 나의 탄생이 아주 불행한 그런 태어남인데, 그러면 서도 어머니는 나 하나를 위해서 무척 고생을 하셨어 요. 일화가 있습니다. 학교에 갔다 오면 집에 아무도 없습니다. 근데 배가 고프죠. 그러니까 찬장이나 솥을 뒤져보면 먹을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래서 물 을 먹습니다. 그러면 한 30분 동안 배가 불러요. 나중에는 배가 고프죠. 해가 지고 나도 어머니가 나타나 질 않아요. 집 툇마루에서 해질 때까지 어머니를 기 다리다가 너무 지쳐서 잠이 들어요. 잠이 들었다 깨 보면 부엌에서 삭정이 부러뜨리는 소리가 나요. 어머니가 어디 가서 한 됫박 되는 양식을 구해 와서 밥을 짓는 겁니다. 그래서 밥을 퍼주죠, 먹으라고. 어머니는 안 먹어요. 가만 보면, ‘난 먹었다’ 하면서 남은 건 내일 아침에 나를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머니는 하루 종일 굶는 거예요. 그 당시에는 그게 무척 가슴 아팠는데, 나중에 지나고 나니까 아, 어머니가 그랬구나 싶었습니다.

 

그래도 어머니께서는 안 놓으셨네요, 포기를 하지 않으 신 거잖아요?

그럼요. 포기 안 했죠. 저의 소설 중에 어머니를 얘기 한 『뜻밖의 생』이라든지 혹은 『홍어』라는 소설이 있 습니다. 특히, 『뜻밖의 생』이라는 소설은 자전적인 요소가 너무 많지요. 『홍어』에 나오는 어머니는 우리나라에 흔히 있는 그런 어머니들 이야기고, 『뜻밖의 생』 에서 나온 어머니는 실제 제 어머니의 이야기입니다. 어머니 돌아가신 다음에 안동에 가서 화장을 하는데, 이 화장장이 무허가라는 거예요. 그런 곳에서 화장을 하는데 너무 가슴이 아팠어요. 돌아가실 때까지 무허가 화장장에서 보내드려야 하는구나 싶어서요.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바깥에 있으니까 바로 화장장 옆에 서 아주 날카로운 소리가 나는 거예요. 가보니까 돌 자르는 채석장이더라고요. 그 채석장은 허가가 난 곳 입니다, 저 화장장은 무허가라는 얘기를 듣고, 살아생전에 고생을 그렇게 많이 하셨는데 돌아가실 때까지 무허가 화장장에서 돌아가시게 하는 내 불찰이 너무 크다 싶더라구요. 그렇지만 뭐 어떡합니까? 할 수 없이 무허가 화장장에서 화장을 해서 저쪽에 내가 소풍 자주 가던 냇가 언덕 위에서 뿌렸죠. 저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죽으면 어머님 뿌렸던 그 산기슭에 가서  뿌려지면 좋겠다는게 지금 생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김주영 선생님의 소설은 우리들 가슴에, 아니면 훗날에도 계속해서 읽혀지면서 남아있을 것 같 습니다.

그러기를 바라는데요. 사실, 이런 얘기해서 좀 쑥스럽기는 합니다만. 요즘 책 안 읽습니다. 제가 초등학 교 졸업하고 외지에 나갔다가 다시 여기서 중학교 한 1년을 다닌 적이 있습니다. 그때 내가 책 한 권을 사기 위해서 어머니를 한 달 동안 졸랐어요. 그렇게 졸라서 책 한 권 값을 받아가지고 안동까지 걸어갑니 다. 가서 책 한 권을 사가지고 걸어오면서, 그 책을 세 번 읽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 도착을 해요. 그런 경 험이 있는데, 그때 나 혼자만 그런 것이 아니고 그때 대게 책을 산 가난한 학생들이 전부 다 그랬습니다. 지금은 널린 게 책입니다. 근데, 요새 독서 경향이 어떠냐면, 책이 부피가 좀 있다든지, 혹은 내용이 어렵다든지 하면 안 읽습니다. 이제 『객주』라는 소설책이 잘 안 팔립니다. 왜냐하면 안에 나오는 단어들이 너무 어려워요. 옛날 말이 너무 많이 나와서. 이를테면, ‘몽니를 부린다’든지 ‘히야, 쉬한다’든지 이런 말은 무 슨 뜻인지도 모르는데 사실 우리말이거든요. 사전에 다 있어요. 근데, 이 『객주』라는 소설을 읽으려면 사전을 옆에 갖다 놓고 읽어야 됩니다. 어떤 출판사에서 ‘김주영 씨 그러지 말고, 객주에 나오는 옛날 말들을 쉬운 말로 고쳐서 책을 다시 내자, 그 작업을 하는 동안 내가 돈은 다 댈게’ 라는 제안을 받은 적이 있습니 다. 마다를 했습니다. 나 안 하겠다고. 그러려면 처음부터 그렇게 하지 내가 왜 이 어려운 말 찾아서 했겠냐? 또 책 팔아먹으려고 어렵게 한 옛날 말들을 다시 뒤집어 쉬운 말로 고친다는 것은 내가 양심상 그럴 수가 없다. 그러고 말았는데, 『객주』를 읽은 사람 열에 아홉은 너무 어렵다 이거예요. 옛날 말이 많이 나와 가지고. 그런데 뭐 그런대로 아직까지도 적지만 팔리긴 합니다, 주로 이제 구매력이 적은 장년 노인층에서 많이 사가죠. 젊은 여성들이 많이 보는 책이라야 많이 나가는데, 이거는 나이 드신 분들이 사는 책이라서 잘 안 나가요 허허.

 

언제부터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하셨어요? 그때 안동까 지 와서 샀던 책 기억나십니까?

아, 잡지에요. ‘소년’이라는 잡지입니다. 그 잡지는 엄청 인기가 있었어요. 먼저 말씀 드리면 늘 혼자 모든 결정을 했어야 됐거든요. 중학교 다닐 때 ‘난 커서 나중에 뭘 할까?’ 그런 거 생각할 나이 아니겠습니까? 그때 내가 생각하기를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게 뭐지?’ 했었는데 제일 자신있는 과목이 국어였어요. 국어로 뭘 할 수 있을까 하다가 글쓰기를 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한 거예요. 그래 그게 소설가가 된 시작 이었죠.

 

글쓰기가 어렵지는 않으시던가요? 처음에 시로 시작하셨다고 들었어요.

동시를 썼죠. 그걸 이제 선생님한테 보여줬습니다. 선생님이 너 동시 잘 쓴다 이거에요. 그때는, 그 어린 시절은 선생님 말씀이 하나님 말씀입니다. 선생님은 무심코 한 말인지 모르지만, 너 정말 동시 참 잘 쓴다 이 말 한 마디가 듣는 그 학생의 키를 키워준 거예요.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라벌예대에 입학을 했는데. 그때까지도 시인이 되고자 했죠. 여름방학이 되기 전에 시를 11편을 써가지고, 그때 우리를 가르쳤던 박목월 선생님한테 보냈어요. 하늘과 같은 박목월 선생님께, 제가 시 쓴 겁니다 하면서 한 번 봐주십시오 했더니 고맙게 받더라고요. 그런데 그걸 드리고 난 다음에 열흘이 지나도 아무 말씀이 없으신 거예요. 그래서 다시 찾아갔습니다. 선생님께 시를 보내 드렸는데 아무 말씀이 없으셔서 다시 찾아왔습니다 이러니까 하시는 말씀이, 자네 운문에는 소질이 없는 것 같다시는 거예요. 거기서 내가 눈앞이 하얘지는 거예요.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고 알겠습니다 하고 얼굴이 정말 하얗게 되서 나가가지고 생각했죠. 아, 내가 멋모르고 덤벼들었구나하면서 하늘같은 분이 하시는 말씀이니까 그대로 수용을 한 겁니다. 이래서 내가 어쩐지 압니까? 학교를 그만둬버렸습니다. 군대에 입대를 했어요. 군에서 계속 고민을 했습니다. 시인 될 자격이 없다는데 어떡할까 하다가, 꿩 대신 닭이라는 말 있지 않습니까? 닭을 잡자, 그래서 수필을, 산문을 쓰기 시작한 거예요. 그게 지금 내가 소설가가 된 동기가 됩니다.

그러니까 두 번의 어떤 잘 할 수 있는 것을, 한 번은 중학교 다닐 적에 너 참 글 잘 쓴다, 동시, 그 칭찬 한 번 듣고 거기에 매달려 서 시를 쓰기 시작한 거고. 그 다음에 박목월 선생한 테 운문에 소질이 없다는 얘기를 듣고는 고민하다 소 설로 진로를 바꾼거죠. 내가 글 쓰는 것 이외에는 다른 것을 도저히 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방향을 바꾼 거죠.

 

그렇게 다시 복학을 하신 거예요, 선생님?

제대하고는 직장에 있으면서 복학을 했어요. 안동의 엽연초 조합에 취직해서 있었어요. 월급이 많았습니 다. 직장에 있으면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시험 때만 올라가서 시험만 치고 내려오는 거예요. 그때 김동리 선생님이 나를 봐줬어요. 그 양반이 그때 중앙대학교 예대 학장이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서라벌예대가 중앙대학에 흡수되어 있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김동리 선생을 찾아가서 이렇게 됐습니다 했더니, 등록금 안 내고 장학생으로 내가 받아 줄게 시험만 쳐라, 그래서 그때 시쳇말로 나이롱 졸업했습니다 제가 허허..

 

 

 

김동리 선생님께서 굉장히 아낀 제자라고 들었는데 기억나는 일화가 있으십니까?

절 만나면 몇 사람 같이 끌고 어디를 가시냐면 중앙대학교 옆에 개고기 집으로 데리고 가는 겁니다. 개고기를 무척 좋아하셨어요. 보통 때는 굉장히 엄격하셨지만 그런 때는 우리하고 같이 앉아서 술도 마시고 했죠. 그렇게 술도 같이 먹고, 개고기도 같이 먹고 하는데, 글에 대해서는 굉장히 엄격해요. 그 양반 특징이에요. 저는 그분의 은덕을 많이 입었죠. 외국 이야기 하나 해드릴까요? 미국의 얘긴데, 어떤 회사의 간부가 출장을 가기 위해서 버스 정류소에 도착을 한 거예요. 근데 버스는 아직 안왔고 배가 고파서 길 맞은편 가게에서 도너츠를 한 봉지 샀어요. 버스 타고 먹으려고 생각하고는 가방하고 도너츠 봉지를 옆에 놓고 신문을 보고 있는데, 옆에 누가 와 앉는 거예요. 딱 보니까 노숙자에요. 냄새도 많이 나고, 수염도 덥수룩하고 이런 양반이 와서는 아무 양해도 구하지 않고 종이봉지에서 도너츠를 꺼내서 먹는거예 요. 내가 먹으려고 놔 둔건데 참 이상하다 했지만 노숙자보고 이놈 저놈 할 수도 없고 안 되겠다 싶어서 자기도 하나 꺼내 먹은 거예요. 먹었더니 또 이 사람 이 두 번째 하나 꺼내서 먹는 거예요. 자기도 또 꺼내 먹었어. 두 사람이 두 개씩 먹었으니까 네 개 먹은 거 아닙니까? 노숙자가 보니까 하나가 남아 있는 거예요. 반으로 찢어서 하나는 이 신사를 주고 하나는 자기가 먹는 거예요. 너무 건방지고 무례한 놈이 어디 있나 싶은 생각이었지만 그걸 먹고는 이 노숙자가 가버리는 거예요.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가버리고 난 다음에 버스가 왔어요. 버스를 타려고 가방을 보니까 자기가 산 도너츠 봉지가 그대로 가방 밑에 있는 거예요. 그 신사는 노숙자가 산 도너츠를 같이 나누어 먹은 거예요. 세상을 살다보면 전혀 의외의 사람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런 경우를 굉장히 많이 봤습니다. 동리 선생도 그렇고, ‘너는 운문에 소질 없어’라고 말씀하신 박목월 선생님도 안 계셨으면 아직까지 난 되지도 않는 운문에 매달려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게 긍정의 시각이에요. 부정적인 것을 긍정으로 돌리는 힘. 그걸 박목월 선생님이 나한테 알려준겁니다. 그리고 동리 선생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 만나서 개고기도 같이 먹고 소주도 같이 먹고 젓가락도 같이 두드렸지만 학점에는 그렇게 까다로운 선생님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내가 있었던 겁니다.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내가 살아오면서 사고무친합니다. 저요? 친척이라고 없어요. 나를 제일 사랑하고 아껴주시던 외삼촌 한 분이 계셨어요. 그분이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를 아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전혀 의외의 사람이 지금 나를 돕고 있어요. 지금 문학관 저 밖에 있는 조형물 있지 않습니까. 저거 1억 짜리입니다. 저걸 기업인 몇 분들이 돈을 내서 이 문학관에 기증해줬어요. 친척도 아니고 우연히 만난 분들인데 나를 좋게 봤어요. 왜 사람들이 나를 좋게 보고, 나를 도와주려고 애를 쓸까. 한번 생각해 본 적이 있어요. 내가 지금까지 지켜온, 뭐 아무것도 아닌데, 지켜온 몇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자존심은 지키되 겸손하라는 겁니다. 그리고 약속을 지켜라. 또 나머지 하나는 울고 싶어도 항상 웃어라. 이것이 저의 좌우명입니다. 약속을 지키는 거 참 어렵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제가 술 먹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비오는 날 차를 못 타고 트럭을 빌려 타고 현장까지 간 적도 있어요. 무슨 계약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늘 만나던 친구 간에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지나가던 트럭을 세워가지고 현장까지 데려다 달라고 했더니 냉큼 실어주더라고요. 돈 많이 준다고 하니까.

약속 지킨다, 겸손해라, 울고 싶을 때 웃어라. 저는 그게 좌우명입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선생님의 글을 통해서 그런 위로와 응원을 받으셨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런데 사실 성공한 사람들 대부분이 평탄했던 어린 시절을 보낸 분이 별로 없습니다. 소위 자수성가하신 분들 있지 않습니까? 참 고생살이를 하신 분들이 많습니다. 사실은 제 작품이 어떻냐 하면 좀 잘난 사람들의 이야기. 을지문덕, 강감찬, 세종대왕, 이런 사람들이 아니고, 그런 사람들이 지나간 역사의 행간에서 그대로 배제되어 버린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일생동안 살아 이름이 엄연히 있는데도 그 이름 한 번 누 가 불러주지 않았던 사람. 야, 야, 자, 너,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썼기 때문에, 결국 나를 도와준 분들이 그런 것에 대한 연민이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 하층민들이죠. 『객주』에 나오는 보부상도 하층 민이거든요. 뱃사공, 시신 만지는 사람들이 모두가 상놈들 아닙니까, 천민들. 그 천민들의 얘기, 그 다음에는 늘 일생동안 구박만 받고 살아온 조선 여자들의 이야기. 그런 이야기들을 썼기 때문에 성공한 사람들이 자기 옛날 얘기를 하는 것 같은 그런 인상을 받지 않았나. 그래서 나를 도와주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객주』라는 소설은 선생님에게 있어서는 뗄 수 없는 분신 같은 소설이 아닐까 싶기도 한데요. 『객주』를 어떻게 시작하게 되신 거예요?

아, 이 얘기를 하자면 길어요. 난 그 책을 보지는 못했는데 제목만 기억납니다.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 시절 때 배웠다’라는 그런 책이 아마 있었죠. 딱 그런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 어머니하고 저는 시장가에서 살았습니다. 장날이 되면 장꾼들이 우리 집 마당에 와서 난전을 펴는 겁 니다. 여자 혼자 사는 집이니까 양해도 안구하고 와서 전 펴놓고 장사하고는 갔었지요. 그 정도로 시장과 가깝게 살았는데, 그때는 초가집뿐이고 이런데, 장 날이 되면 낯선 사람들이 와가지고 온갖 짓을 다 한다 이거예요. 욕도 하고, 막걸리도 먹고. 그런 것들이 어린 시절에 나한테 굉장히 신선하게 보였어요. 늘 똑같은 사람들 얼굴을 보다가 장날이 되면 낯선 사람 들이 와가지고 사투리도 다르고 모양새도 다르고 옷 매무새도 다른 사람들이 와서 북적거리고 장사하면  싸우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뭐 이런단 말이죠. 말 하자면 하나의 축제가 이루어지는거죠. 나한테는 축제처럼 보였던 그 장날 구경을 위해서 그날은 학교에 안 갔습니다. 어머니가 나를 챙기는 것도 아니었으니 말입니다. 장날이 되면 장 구경하고 다니면서 이런 농기구 같은데 붙여놓은 상표 있지 않습니까? 그런걸 주어서 수집하는 거예요. 그날은 학교 안 가고 그 이튿날 학교 가죠. 그럼 선생님이 너 왜 학교 안 왔어? 이럽니다. 핑계가 뭐 배가 아파서 못 왔습니다. 아 그래? 때리지도 않고 벌도 안서고 그냥 들어가라는 겁니다. 다음 장날에도 그랬는데 그 다음에는 진짜 장날만 되면 실제로 배가 아픈거예요. 그 다음에 결석을 하면 선생님이 또 묻습니다. 너 왜 또 학교 안 왔어? 배가 아파서 못 왔습니다. 실제로 배가 아파서 못 왔는데 지난번에는 거짓말 하고 이번에는 실제로 참말 했는데 때리기 시작하는 겁니다. 벌을 줍니다. 그만큼 내가 장날 보여주는 그 축제의 모습에 반했던 거예요. 내가 그걸 보고 나중에 작가가 된 다음에 어릴 때 봤던 그 장날의 광경, 이걸 소설로 한 번 써보자, 이렇게 된 거예요. 데뷔하고 난 다음에 보니 이야기가 될 것 같은 생각이 든 거예요. 그래서 무턱대고 자료를 찾기 시작한 거예요.

난 단편 소설을 하나 써도 반드시 현장에 가 보거든요. 내 소설에 「쇠둘레를 찾아서」 라는 70매 짜리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쇠둘레, 철원이에요. 철을 우리말로 쓰면 쇠둘레입니다. 그 단편 소설 하나 쓰기 위해서 철원을 세 번 가봤어요. 그 정도는 현장 답사 하거든요. 그런데 자료를 찾기 시작하니까 옛날 우리나라에 보부청이 있었던 거예요. 그걸 내가 발견한 겁니다. 그래서 이럴 게 아니다, 장편으로 써야 된다. 이래가지고 자료를 모으기 시작한 거예요. 먹고 살아야 되니까 신문 연재를 시작합니다. 서울신문에 서 대강 줄기 써 놓은 것을 보고는 해보자고 하더라구요. 5년 정도 했는데 성공을 했습니다. 그렇게 『객주』는 시작된 겁니다.

그 소설 시작하고 끝맺을 동안 거의 집에 안 들어갔습니다. 거의 저 시골 여인숙에 서 다 썼어요. 조선시대 이야기지만 현장, 산천은 안 변했거든요. 고려시대나 조선시대나 현재나 산이 무너지거나 그러지 않지 않습니까? 고목이 그때도 있었고 지금도 있는거지요. 냇물이 그때도 가고 지금도 흘러가는거죠. 그걸 보러, 장날을 보는거죠. 장이 서는 곳, 전국 장터 돌아다니면서 취재해가지고 여인숙에 가서는 엎드려 글을 써가지고 서울신문 지국에 다가 원고를 갖다 주면 지국에서 그걸 받아서 본사로 옮겨줬습니다. 그 짓을 5년 동안 한 겁니다. 혼자 술 먹고, 혼자 울고.

 

취재하러 다니시면서 에피소드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당연히 있습니다. 나루터로 유명한 강경있지요? 금강하류입니다. 옛날에 그 부두가 굉장히 번성했거든요. 그걸 보러 가서 배를 타고 왔다 갔다 하는 겁니 다. 한 번 갔다 보고 사진도 찍고 메모도 하고 그랬는 데, 한참 하는데 경관 둘이 총을 딱 들고 나타난 거예요. 같이 가자는 겁니다. 가방을 압수 하더라고요. 보니까 간첩으로 오해받기 딱 맞는 거예요. 안에 카메라 들어있지, 노트 들어있지, 필기도구 들어있지. 이건 꼭 간첩인 거예요. 거기서 다투어 봐야 경찰서까지 가기 전에 오히려 총 쏘면 그만이니까 순순히 따라갔죠. 경찰서에서 서울신문에다 전화를 했습니다. 그렇게 오해가 풀리고 나도 풀려났죠.

또 있습니다. 이번에는 군포였어요. 지금은 육지가 되어 있지만 그때는 갯가였어요. 거기 다방에서 차 한 잔 먹고 다방 마담한테 길을 물어보고 나오는데 마침 경관 두 명이 내 뒤에 총을 대고 경찰서 가자고 하더라구요. 두 번 그렇게 당했던 적이 있어요. 그때 한참 간첩들이 왔 다 갔다 했을 땝니다. 뭐 『객주』보다 좋은 소설들이 많지만, 나 같은 경험은 안 했을 거예요.

 

글을 쓰기 위해 현장을 답사해야 된다는 것, 선생님으로 인해서 많은 후배 작가들이나 제자들한테 어떻게 보면 지침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그 현장조사, 답사를 왜 철저히 하냐면 작품 속의 현장감이 독자들로 하여금 이거 맞구나, 하는 생각을 어떤 그런 작품과 접촉성을 강화시켜 주는 것 같아요. 내가 어떤 힘을 얻었냐면 윤홍길이라는 작가 있지 않습니까. 지금은 예술회원이기도 합니다만. 그분이 나한테 그런 얘기를 했어요. ‘김선생, 그 『객주』라는 소설 나 지금 읽고 있는데 군산에 관한 설명을 너무 정확하게 했어요.’ 이러더라고요. 어떻게 군산까지 와서 조사를 했냐고, 그런 얘기를 들으니까 힘이 나는 거 있죠. 예를 들어서 군산 사는 사람이 『객주』라는 소설 읽을 수 있지 않겠습 니까. 그럼 군산을 얘기하는데 엉터리로 해놨다 이거 야. 뭐 이따위 소설을 썼어, 이럴 수 있거든요.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 그랬어요. 예를 들어서 옛날에 어떤 군지郡誌를 들춰보니까 어딘가에 ‘천좍할 놈’이 있어요. ‘천좍’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더니, 대원군 시절에 천주학을 핍박 했잖아요. ‘천주학을 할 놈’이었던 겁니다. 대원군 시절에 천주학 할 놈, 이러면 지금 말로 하면 너 빨갱이야, 이 말과 똑같습니다. 대번 잡혀가죠. 근데, 그게 ‘천좍할 놈’ 그 말 하나 찾는데 숱한 노력의 시간이 허비돼요.

또 있습니다. ‘시치미를 잡아뗀다’ 그 말도 예를 들면 무슨 일을 해놓고 안한 척 해버리는 것을 시치미라고 하거든? 그런데 왜 ‘시치미’라는 말을 붙었을까 찾아보다가 이게 고려시대 응방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매를 가지고 사냥을 하는 겁니다. 몽고 사람들이 매를 가지고 여우 사냥도 하고 그렇지 않습니까? 고려시대 때 국가기관 중에 응방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민간에서도 매를 훈련시켜서 사냥을 시키는 사냥꾼들이 있었어요. 그러면 민간의 매는 똑같지 않습니까. 다른 게 없죠. 그냥 두면 이 매인지 저 매인 지, 김가 매인지 박가 매인지 모르지 않습니까? 그래서 짐승의 뼈를 깎아서 매의 깃털 안쪽에다가 보표를 달아 놓습니다. 이 매는 어디 어디 김 가의 매다, 그게 시치미인 거예요. 근데, 이 매가 날아갔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오는 게 아니고 다른 집으로 갈 때가 있다 이거예요. 김 가가 띄운 매가 돌아올 때는 박가 집으로 갈 수 있어요. 그럼 박가가 그걸 잡아떼어 버린단 말이야. 그럼 김가가 가서는 ‘너 내 매 못 봤나? 못 봤다’ 이런 식으로 했다는 거예요. 그럼 그것만 잡아떼면 되니까 ‘시치미를 잡아뗀다’ 라는 말이 지금까지 내려오는 거예요. 말의 역사입니다. 한 마디 말의 역사가 그렇게 깊은 곳에까지 가 있다는 것입니다.

 

『객주』 같은 경우에도. 어떻게 보면 30년 만에 10권째 완결편을 냈다는 것은 웬만한 뚝심 아니면 안되었을텐데, 9권을 쓰시고는 왜 그때 멈추셨어요?

그때가 아마 한국에 신문연재 사상 없었던 일인데, 9권 째 끝나는 지점에서 한국 최고 원고료를 받았습니다. 신문연재 할 동안 인기가 대단했거든요. 그런데 9권 째 분량을 쓰고 나니까 진이 확 빠지는 거예요. 더 못 쓰겠는 거예요. 그래서 서울신문 임영숙 문화부장한테 더 못 쓰겠습니다 이러니까, ‘그러지 말고 한 5개월 정도 시간을 줄테니까 계속 쓰라’ 하더라구 요. 도저히 안되겠습니다 여기서 끝마치는 게 좋겠다 라고 했는데 임부장이 뭐라고 했냐하면 ‘더 쓰고 싶을 때 반드시 얘기해라. 다른 신문에 가면 안 된다.’ 그렇게 얘기 하는 거예요. 알았다고 하고는 한 20년 흘렀습니다.

그 후에 산악인 엄홍길 씨가 나한테 와서 얘길 하는 거예요. ‘김 선생님, 내가 울진 십이령을 다녀왔는데, 거기 함부로 못 들어갑니다. 허가 받아야 들어가는데 그 길이 옛날에 보부상들이 다니던 길이라 고 그러더라’ 이래요.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 조사를 그렇게 다녔었는데도 울진에 그런 길, 보부상들이 돌아다녔던 길이 있다는 건 난 몰랐거든요. 그래서 울진에 혼자 갔죠. 가니까 놀라운 게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왜 십이령길이냐면 동해안 지방 울진, 삼척 이 지방에서 소금장수들이 십이령 고개를 넘어가지고 봉화로, 봉화 장이 옛날 조선시대에는 굉장히 컸거든요. 그게 소금쟁이였어요. 소금장수들이 드나들었던 십이령 고개 길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런 얘기에요. 왜 그 길이 남아 있었냐면 거기가 금강송 보호지역이어서 막아놨던 겁니다. 거기 그대로 서낭당도 있고 다 있어요. 그 길을 처음으로 제가 발견한 겁니다. 그리고 삼척이나 울진에 가면 토염이 있었습니다. 소금을 구웠어요. 토염 값이 굉장히 비쌌습니다. 낙동강에도 소금배가 드나들었지만 물이 많아진다든지 갈수기나 우기가 된다든지 하면 소금배가 그만큼 못오는 대신에 울진 지방에서 넘어갔던 소금을 그 지방에서 풀어 먹였던 거예요. 그때 가격을 보니까 나락 한 가마 보다 소금 한 가마가 거의 배로 비쌌어요. 그리고 봉화로 넘어가니까 소금장수들이 정착했던 마을이 있어요. 봉화군에서 토지를 사줘가지고 소금장 수들을 살게 한 그런 마을이 있었어요. 그 사람들이 다 죽었거든요? 근데, 그 사람들 사줬던 토지는 남아 있어요. 거기서 나온 소출을 가지고 그 사람들한테 제사를 지내는 비석도 있었습니다. 이런 걸 내가 몰랐잖습니까?

 

『객주』에 다시 불을 지피셨네요.

9권 째 소설을 보면 천봉삼이가 진령군의 도움을 받아서 사형장으로 가다가 몰래 풀려납니다. 그리고 하염없이 가는 걸로 끝을 맺었어요. 더 쓴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죽이지 않고 살려놨던 거죠. 그 사내가 그 옛 고을에 다시 나타났죠. 이어져있는 겁니다. 30년 후에 서울신문에 다시 연재했습니다. 얘기가 많아요. 『객주』라는 소설 쓰면서 만들어낸 이 야기가 소설 한 권 정도는 될 겁니다.

 

『객주』의 주인공 ‘천봉삼’이라는 인물은 어떤 존재인가요?

『객주』의 천봉삼이는 가공인물입니다. 다른 예를 하나 들 수 있어요. 류주현 선생의 『대원군』이라는 소설에 보면 대원군이 양광시절에 한문으로 ‘양광’이라고 하는데. 뜻이 뭐냐면 거짓 미친 척 한다 이거죠. 그럴 적에 길거리에 주색잡기를 하고 다니면서 가난하니까 술값은 없는데, 기생치마에 난초 쳐주고 그걸 술 값으로 대신하고 그런 대목이 나와요. 그런데 그렇게 떠도는 사람의 심중을 아는 사람, 저 사람의 가슴 속에 뭐가 들어 있다는 생각을 하는 기생 하나가 있었어요. 그 사람 이름이 초선이에요. 그 소설을 읽어 보면 초선이라는 인물이 없으면 하나도 재미없는 소 설이에요. 초선이라는 인물은 기록에는 없는, 작가가 만들어낸 가공인물입니다. 그런데, 류주현 선생이 초선이라는 기생을 하나 만들어서 그 소설에 중심을 잡아가는 겁니다. 대원군이라는 미친 척 하는 사람의 가슴 속에 뭐가 들어 있다는 것을 초선이라는 기생 하나는 딱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 얼마나 중요한 인물입니까? 『객주』의 천봉삼이도 제가 만들어 낸 인물이에요. 정의로운 사람, 배신하지 않고 신의를 지키는 사람, 장사꾼이지만 권력에 아부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으로 나는 천봉삼이라는 인물을 하나 만들어 낸 거예요.

 

소설은 어떻게 보면 선생님의 자서전 같은 것이다 라는 글을 읽었었습니다.

문학이라는 게 궁극적으로 그렇지 않습니까? 푸시킨의 시를 예로 들 수 있죠.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여워하지마라’ 하는 시가 있지 않습니까? 그 시가 원래는 잡지나 신문에 발표됐던 시가 아니었습니다. 푸시킨은 그 당시에 아주 진보적인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시베리아로 유배를 보내집니다. 거기 유배지 농장에서 한 소녀를 만났습니다. 아주 누추하고 무식했던 그 소녀가 고생고생을 하면서 농장 일을 하는 거 예요. 그래서 그 아가씨한테 종이를 한 장 달라고 해서 그 시를 써 준 겁니다. 그게 바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하는 시입니다. 그 시 하나 때문에 그 사람이 죽은 지 180년이 다 되어 가는데, 지금 러시아에 살고 있는 그 주부들이나 할머니들이 자기 집 텃밭에서 기른 꽃을 꺾어다가 푸시킨의 동상 앞에 바치고 가는 겁니다. 시골에서 모스크바에 올라오는 가정 주부들이 자기 집 텃밭에서 기른 생화를 기차를 타고 사흘, 나흘 걸려서 바치고 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바로 시 한 편입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여워하거나 슬퍼하지 마라. 뭡니까? 그게 바로 위로입니다. 돈도 아니고 출세도 아닙니다. 무슨 로또 복권 같은게 아니에요. 문학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보석 같은 진리는 위로에 있다는 겁니다. 그러데 위로를 안 주는 작품들이 너무 많습니다. 내 작품들 중에도 위로를 줄 수 없는 그런 글들이 너무 많습니다. 위로를 줄 수 있는 그런 문학작품을 써야 한다고 깨달은 게 몇 해 되지도 않습니다. 나 아까 둔재라고 얘기 했죠? 죽을 때 다 돼서 이런 걸 자꾸 느끼는 겁니 다. 이게 큰일 났어요.

 

선생님은 『객주』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셨지만 사실 그게 굉장히 어려운 일 아닙니까?

세상 모든 일, 뭐 건축이든 노동이든 경영이든 모든 일들은 많은 실적이 쌓이면 나중에 쉬워지죠. 말하기 그렇습니다만, 시각장애인도 한 길을 계속 다니다보면 나중엔 더듬거리지 않더라도 비교적 익숙하게 갔다 올수 있지 않겠습니까? 수많은 연습, 실적이 쌓이기 때문에 그런데, 문학만은 그게 아닌 것 같습니다. 할수록 어려워져요. 지금 내가 조그마한 동화 한 편 을 쓰고 있는데요. 3개월이 걸려요. 너무 어려운 거 예요. 내가 젊은 시절, 데뷔한 지 1년 지나고서는 하룻밤에 단편 하나를 썼습니다. 그것도 한 80매 정도 되는 소설을 하룻밤에 썼습니다. 그 열정 혹은 가지고 있는 에너지 같은 게 작용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게 있다고 해도 못 씁니다. 왜냐하면 생각할 게 너무 많은 거예요. 이렇게 쓰면 안 되지, 저렇게 쓰면 안 되지, 이게 많이 작용하는 겁니다. 다른 학문도 있지만 문학만은 할수록 어려워요. 그건 정말 실제로 그래요. 엄살이 아니고 할수록 어려운 게 문학이라 생각합니다.

 

 ▲객주문학관 (ⓒ강병규)                 

그만큼 글 쓰는 것에 대한 무게감이 있기 때문인가요?

대신 이제 젊은 작가들한테 주고 싶은 말이 하나가 있는데, 여기 문학관에 창작관이라고 있거든요. 문화예술위원에서 지원을 해서 매년 초가 되면 여기 주거 할 수 있는 작가들을 모집합니다. 방도 아주 근사해요. 호텔 수준입니다. 시설이 아주 근사하게 되어 있습니다. 방 안에 없는 건 텔레비전뿐입니다. 이제 여기서 3~4개월, 혹은 많이 있는 사람은 6개월 동안 활동하다 갑니다. 주로 젊은 작가들이죠. 올 때 인사하 고 하는데, 갈 때 언제 갔는지 몰라요. 무슨 선물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갈 때 ‘선생님, 정말 잘 있다 갑 니다.’라든지, 안 그러면 거기 담당하는 직원에게라도 인사는 해야 하는 건데 한 마디 말도 없이 가버리는 거예요. 나는 젊은 작가들한테, 그런 자세는 좀 고쳐야 되지 않겠나 그런 생각해봅니다. 내가 여기 와서 절대 간섭 안 합니다. 내가 어려운데 어떻게 너 이렇게 써라, 니가 쓴 것 좀 보여줘라 이런 얘기를 합니까? 절대로 그저, 식사 때 만나면 ‘어떻습니까? 뭐 먹고 싶은 거 얘기하세요.’ 이 정도 얘기 하지, 글을 어떻게 쓰라든지, 너 여기 와서 실적 내놓으라든지 그런 얘기 절대로 안 합니다. 부담 줄 필요 없지요. 그런데 다만 갈 때, 잘 있다 갑니다, 라든지 손 한 번 흔 들고 가면 되는데. 그것도 안해요. 요새 젊은 작가들이 그렇더라고. 안타깝습니다 그냥.

 

선생님에 대한 기사를 정리하다가 이 말이 저한텐 참 감동적이었었는데, ‘약자에 대해서, 그런 분들의 삶에서 나오는 진한 감동을 한 여름에 매미가 우는 것처럼 같이 울어주겠다.’ 였습니다.

그게 내 희망입니다. 약자에 대한 애정이 깊은 사람입니다. 왜냐면 내가 약자로 자랐기 때문에, 외톨이로 자랐기 때문에, 약자에 대한 애정이 아주 깊죠. 아마 일생동안 그럴 겁니다. 제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모두 약자입니다. 『뜻밖의 생』이라는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은 아무런 결함이 없는데 키가 작아서 겪는 고통, 괄시, 냉담함 등 온갖 고난을 다 겪습니다. 키 하나 작을 뿐인데, 아무런 결격 사유가 없는 사람인데, 순진할 따름인데, 교육을 못 받았을 따름인데, 군대에 가서도, 살아가는 데에 있어도, 자기 어머니 아버지한테도 괄시 받는, 말하자면 자기 아버지는 ‘이 녀석을 곡마단에 팔아먹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가지는 정도입니다. 그런 사람에 대해 애정을 갖는 거, 그게 내가 소설 쓰는 희망이고 목표고 신념이고 그래요.

 

지금까지 걸어오시면서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글쎄,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많은 배려를 받고 살고 있거든요. 아까도 조금 말씀 드렸습니다만, 전혀 나랑 관계없는 사람들이 나를 많이 도와줍니다. 이건 배려에서 나온 거거든요. 그렇다면 나도 다른 사람 위해서 배려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되지 않겠느냐. 그리고 내가 소설 속에 약자를 주인공으로 삼는 것도 약자에 대한 배려를 가지자는 내 나름대로 목표가 있죠. 그래서 사람한테 제일 중요한 게 배려 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신심이 깊은 그런 분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남긴 말을 기억하고 있는 게 한 서너 분 되는데, 그분들은 전부 다 신앙을 가지고 계신 분 들이었어요. 이 양반들이 마지막 남긴 말이 뭐냐면, ‘인생 살아보니 아무것도 아니더라‘ 이거에요.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숱한 굴곡을 겪었을 거 아닙니까 그 렇죠? 그런데 마지막 돌아가시기 전에 유언처럼 남긴 말들이, 세 분 모두 허무하단 얘기죠. 어떤 분은 자기 막내딸에게 시집 갈 때 물려주려고 모은 돈을 몽땅 떼여 버린 거예요. 근데, 그걸 신앙심으로 극복 하더라고요. 원망하지 말란 말이야. 그게 내 운명이 다, 이거야. 그런 딸이 아직도 시집 안 가고 늙어가고 있더라고요. 그런데 그분은 그 사람 원망하지 않더라고요. 그 사람도 내 돈 떼먹으려고 했던 게 아니고 실패했기 때문에 떼먹은 거 아니냐는 겁니다.

 

80인생을 사셨지만 지금도 충분히 열정이 남아 있으신 것 같아요.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으신지?

인터뷰 시작하기 전에 여기 방문한 분들에게 강연을 좀 해달라고 해서 내가 몇 마디 해준 게 있는데, 그 때 내가 내 자신에 대해 얘기했어요. 나는 일생 동안 지금까지 살면서 보험을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리고 통장에 예를 들어서 100만 원의 잔고가 있다면 그걸 못 써서 안달한다. 그래서 나는 내 인생은 지금까지 그날 벌어서 그날 산거다. 그러나 전혀 불안하지 않다고 얘기 드렸어요. 나는 그냥 강연을 한다던지 책이 조금 팔리면 거기서 나오는 인세로 사는 거죠. 그걸 가지고 그동안 신세졌던 사람들에게 불러서 많이도 아니고 막걸리 한 잔 대접하고, ‘니 참 고마 웠다, 그때’ 이런게 너무 즐거운 겁니다. 그러니까 돈에 욕심이 없으면 굉장히 사는 게 즐거워요. 욕심 없으면 편해요.

그리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단순하게 살려고 합니다. 이것저것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리고 만나는 사람 숫자도 줄이고, 하나하나 정리해 가는 거죠. 저승사자가 나한테 올 때 지저분하게 따라 오는 사람이 없도록, 주변을 하나하나 정리하는 겁니 다. 내 다리 잡고 올라오는 사람도 없도록.. 염라대왕 앞에 가면은 줄이 많이 서 있죠. 어제 온 사람도 있고, 오늘 심판 받으러 많이 나와 있잖아요. 염라 앞에 서 있지 않겠어요. 그런데 나이가 한 18살 쯤 먹어 보이는 젊은 놈이 하나 나타나더니 줄 똑바로 서 라고 합니다. 이 노인들이 삐뚤빼뚤 서 있으니까 막 차고 귀싸대기를 때려 붙이면서 줄 똑바로 서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나이 많은 사람이 ‘자네 이리 좀 와보게’ 그러니까 그 녀석이 뭐라냐면, ‘나 말야?’, ‘응, 자네 말야. 자네, 나이가 아무리 봐도 18살 밖에 안 보이는데, 여기 전부 다 백 살 넘은 사람들이 서 있어. 근데, 자네 그래서 되겠나?’ 그러니까 눈도 깜짝 안 하면서 되묻는 거예요. ‘자네, 언제 죽었나? 어제 죽었지? 야, 이 녀석아, 나 임진왜란때 죽었다, 이놈아.’ 선배, 대선배였지요. 임진왜란 때 병정 나가가지고 18살 에 죽은 사람이 거기서 줄 세우고 있는 거예요. 염라대왕 앞에 가서 그런 욕 듣지 않도록 주변 정리를 해 가면서 지금 살아야 되는 나이가 아닌가 합니다.

 

그래도 글은 놓지 않으실 거죠?

글쎄, 글은… 요새 신문에 칼럼을 한 달에 한 번씩 쓰고 있죠. 되게 조심스러워요. 한 달에 한 번인데 왜 그렇게 빨리 다가오는지 모르겠어요. 옛날에는 하루에 7, 8매를 썼는데, 뒤돌아보면 또 그 시기가 오고 참 그래요. 어려워요. 그러나 계속 해야 되겠죠. 죽을 때까지 계속 해야 되겠죠. 난 할 수 있는 것은 그것 뿐입니다. 그렇게 평생을 별러서 얻은 직업인데 나이 많다고 해서 놓아 버릴 수 없죠. 계속 써야 되겠죠.

 

후대에 김주영 선생님께서는 어떤 사람으로 기록되거나 남았으면 싶으십니까?

다른 건 별로 안 바라고 그냥 잘 웃는 사람으로 남았으면 싶습니다. 나중에 뭐 기억 안 하겠지만, 혹시 아는 사람이 있다면 ‘옛날에 그 김주영이라는 작가, 그 사람 잘 웃었다 그러더라’ 그랬으면 좋겠어요. 한 1년 전 얘긴데, 신문에 박스 기사로 났던 얘기입니다. 공식적인 기록은 아닌데 캄보디아에서 120살까지 산 할머니가 있었어요. 왜 공식적이 아니냐면, 이 양반이 출생신고를 안 했어요. 이웃 사람들이 말하기를 저 사람이 120살 먹어서 죽었다 이렇게 된 거예요. 그 할머니 살아 있을 적에 기자가 가서 장수비결을 물었습니다. 그랬는데 아주 간단해요. 뭐냐면 ‘오래 살려면 많이 웃어라. 그리고 남의 일에 너무 신경 쓰지 마라. 그 다음에 이빨 관리를 잘 해라’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내가 그걸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일종의 무슨 좌우명 같은 건데요. 아까도 말씀 드렸습니다만 난 울고 싶을 때 웃습니다. 그러면 기분이 좋아져요. 그게 수명으로 이어질 수 있습 니다. 울고 싶을 때 많이 우는 것도 좋지만, 그냥 울고 싶을 때 웃으면 수명은 더 늘어난다 이겁니다. 그리고 이빨, 치아 관리를 잘 하라고 하더라고요.

난 그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걸 물으셨는데 내가 너무 쉽게 대답했는지 몰라도 나중에 누가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면, 『객주』를 쓴 김주영이라는 작가, 그 사람 잘 웃었다 그러더라. 그렇게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내가 노총각일 때 진행자와 연출자로 만나 십 수 년 인연을 맺어 왔으면서도 난 선생님의 바람이 그저 죽 을 때까지 글을 잃지 않는 것이라고만 생각해 왔다. 늘 호탕한 웃음에 막걸리 한 사발이면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껄껄거리시는 모습에 어쩌면 우리 시대 마음 좋은 아버지 상이 아닐까 생각했다. <김주영의 사람 과 사람>의 서작가는 정말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하는 존재로 김주영 선생님을 만나왔다고도 했다. 얼마 전 뉴스에서 만난 선생님은 흰머리가 훨씬 많아졌고 더 듬성해져 보였다. 한동안 찾아뵙지 못해서 어쩌면 조금 낯설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내게는 훤칠한 키에 넉넉한 웃음뿐이었던 선생님이었는데. 갑자기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조만간 신간을 들고 진보시장에서 막걸리 한 사발 청하며 저자 서명을 받아야겠다.

강병규(안동MBC PD)
2021-08-25 오후 4: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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