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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약속 특별판 〈영남의 어른⑥〉-역사학자 故이이화 선생

  • 강병규(안동MBC PD)
  • 2020-10-05 오후 1:4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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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마지막 인터뷰
선생님을 처음 만났던 것은 2004년 6월이었다. 때마침 《한국사 이야기》 22권이 완간되었고 출판기념회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지역 출신 명사들을 모시는 자리에 출생지가 '대구'라는 이유를 붙여 출연 요청을 드렸다. 당시 프로그램의 진행자인 김주영 선생과는 대학 동문이자 비슷한 연배인 관계로 재미난 이야기는 두 시간을 넘게 흘러갔다. 정규 역사학을 전공한 적이 없어 '재야'라는 수식어를 붙이기는 했으나 해박한 역사지식은 막힘이 없었고, 깊은 곳에서 나오는 역사에 대한 통찰은 절로 고개를 숙이게 했다. 그리고 이이화 선생님의 울림 있는 포효는 그날도 여전했다. 부조리와 왜곡이 있는 곳이라면 늘 앞장서서 맞서 싸웠고, 불의에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았던 거인 이이화.

다시 만나고자 연락드리고 찾았을 때 너무 많이 야윈 모습에 가슴 아팠지만 인터뷰 내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생각을 펼쳐냈고, 어머님 이야기를 할 때는 끝내 목이 메어버린 선생님의 여전한 모습에 고마웠다. 하지만 프로그램을 완성해 보내드리고자 연락드렸을 때 입원하셨다는 사모님 말씀에 걱정이 앞섰는데 결국 일어나시질 못했다. 부디 평화로운 나라에서 영면하시기를 바랄 뿐이다. 어쩌다 선생님의 생전 마지막 인터뷰를 하게 된 〈영남의 어른〉, 그 전문을 여기에 기록한다.
 

 

 ▲ 선생의 서재에서(ⓒ이이화)

 

저희 프로그램 제목이 '영남의 어른'입니다. 대구에서 태어나셨으니 선생님 고향이 경상도가 맞는 거지요?
그렇죠. 나는요 역사 기행을 많이 알리고 하면서 내 후배들, 독자들과 같이 다니면서 여기 가도 고향이고 저기 가도 고향이고 고향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왜 그러냐하면 경상도로 가면 내가 대구 비산동에서 태어났어요. 달성공원 있잖아요. 거기가 빈민촌이었어요. 우리 아버지께서 나신 곳은 경상도 김천이야. 거기에 우리 이李씨들 많이 살아요. 그리고 우리 아버지는 내가 7살 때 전라도 익산으로 이사를 왔어요. 그 후에 해방되고 나서는 전라도와 경계에 있는 충청도 대둔산으로 들어 왔어요 거기가 논산이에요.
 
그리고는 전쟁이후에 안면도로 또 이사를 갑니다. 그러고는 조금 있다가 부여로 이사를 갔는데 아버지는 부여에서 돌아가셨어요.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학교를 안 보냈어요 한문만 가르치고, 그래서 내가 열여섯에 대구로, 부산으로 또 여수로 엄청나게 돌아다녔죠. 결국 광주에서 자리를 잡고 고등학교를 졸업했죠. 그러니 가는 데가 다 고향이지 뭐 허허. 그럼 내가 한마디 재미있는 얘기 하나 해 줄까요? 중국에 역사 여행을 갔었는데 광주 사람들 몇 사람을 만났는데 억양이 좀 비슷했나봐 내가 10대 때 광주에 살았으니까 고향이 어디냐길래 그래서 내가 광주요 그랬더니 그 사람 내가 광주 아닌 걸 다 알면서도 내가 맥주 좋아하는 걸 알고는 술도 사주고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내 고향은 광주라고 했죠 뭐.

고향 얘기를 하던 중에 학교를 안 갔다고 하셨어요. 왜 그러셨어요?
우리 아버지가 유명한 주역의 대가 야산 이달 선생이십니다. 지금도 인터넷 들어가서 야산 이달 검색하면 다 나와요. 그런데 그분은 일제강점기 때는 학교 보내면 일본놈이 된다. 해방 뒤에는 서양놈이 된다고 하시면서 안 보내셨어요. 아버지께서 산속에 어린애를 데리고 있으니까 가만히 앉아가지고 먹는 것도 없고 정말 힘들잖아요. 우리 어머니가 이리에 사셨는데 일 년에 한 번씩 한 달쯤 다니러 보내줬어요. 그때 어린아이가 산속에 살면서 쌓였던 스트레스를 푸는 거죠. 우리 어머니한테 가면 닭도 잡아주고 다 해주시잖아 그래서 좋았는데 그게 중요한게 아니었어요.

또래 아이들이 중학교 다니면서 a, b, c, d 어쩌고 한국이 22만 평방킬로미터 저쩌고 하면서 떠드는데 내가 못 알아듣겠는 거에요 전부 다. 한문만 배우다 왔으니 그럴수 밖에요. 속으로 생각했죠 '내가 모르는 걸 쟤들은 아는구나.' 또 또래 여학생들이 하얀 교복을 입고 운동화를 신고 착 지나가는데 완전 천사 같은 거에요. 사춘기 때니깐 당연히 그런 생각이 들지 않겠어요? 이웃집에 사는 누나가 소설을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이광수의 <사랑>이니 <흙>이니 심훈의 <상록수>니 방인근의 <마도의 향불>이니 이런 소설이 쌓여있었어요. 그래서 그걸 가져다가 다 읽었어요 한글은 아니까. 그런데 이게 한문 세계하고 다르잖아요? 완전 신세계였어요 정말 신나더라니깐.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아버지가 데리러 오셨어요. 몰래 변소에서 책을 읽는데 문을 탁 여는 거예요 아버지께서. 그런데 읽고 있던 책을 뺏어보니 그런 소설 나부랭이거든 막 소리를 지르면서 버려 버리더라구요. 그러고는 다시 산으로 데려가셨어요. 이게 뭐 가출 동기가 된 거죠.
 

 

 ▲아버지인 야산 이달 선생(ⓒ이이화)

 

그럼 산에 아버지와 함께 살 때는 한문만 배우셨어요?
한문만 배웠지요. 그런데 이 한문에 과정이 있어요. 천자문이야 다 아는 거고, 동몽선습, 소학, 명심보감, 그 다음에 사서삼경. 내가 사서까지는 다 배웠어요. 그러니까 삼경에 막 들어갈 때가 열여섯인데 본격적으로 배움에 들어갈 때 도망을 나와 버린 거죠 내가. 그리고 아버지는 주역을 하셨으니 그 분의 가르침에는 '세상을 바꿔야 한다.' 신분차별, 양반, 상놈, 부자와 가난뱅이 이런 걸 다 바꿔야 된다. 그런데 그것을 주역 사상으로 해결하려고 그러는 거에요. 또 하나는 일제 식민지가 되어 일본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던 상황이에요. 이것을 어떻게든 막아야 되는데 자기가 김구처럼 나가서 투쟁을 하지 못하면서 '주역이론으로 의식을 개조해야 된다'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나를 자기식대로 자식을 키우려한 것이에요. 그런데 나도 머리가 굵어지고 나이가 드니까 아버지 마음대로 안된 거에요. 비뚤어졌으니 자식 키우는 것은 실패한 셈이죠.
 

▲이이화(1937.8.23.~2020.3.18. ⓒ강병규)

 

어쨌든 아버님은 아들이 산속에만 있는 게 안타까워서 가끔씩 처가로 보내서 말하자면 세상 구경을 시킨 것인데 거기서 선생님은 눈을 떠버린거네요?
그렇지. 세상에 눈을 뜬것이죠. 아버지 세계가 아닌 다른 세상을 공부한 셈이지요. 그때 사실 내가 내 인생을 바꿨다니까? 내가 또 하나 더 얘기해줄까요? 내가 16살때 가출을 과감하게 했어요. 6.25 전쟁 때인데 부산으로 갔어요. 고아원에 들어갔잖아요. 당시만 해도 고아원은 깡패, 소매치기, 거지들 집합소나 다름없었어요. 나같이 조그마한 놈이 거기서는 맨날 얻어터지고 그랬어요. 내가 공부한다고 또 때리는 거에요. 공부하는 거 싫어하거든. 그렇지만 거기서 난 집요하게 공부를 시작했어요. 그리고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된거지요. 몰론 아버지 밑에서 한문을 계속 익혔으면 역사학자가 아니라 한문에 일가견이 있는 정도는 되었겠지요. 후배들도 그런얘기를 해요.

그 대단하셨던 아버님, 자식을 뜻대로 키우지 못하셨지만 이름은 아버님이 지어주신 거죠?
그렇지요. 그러니까 아버님이 주역을 공부하시다가 자식을 낳으면 주역 식으로 이름을 다 지어줬어요 순서에 따라서. 제일 큰 아들은 진화, 감화, 주역 아는 사람은 다 알아요. 내 차례가 왔는데 떠날 이 자, 이괘. 주역의 제일 중요한 게 건곤감리 중 감, 리가 중간인데 그 중간이에요. 그래서 나한테 줬는데 남들이 뭐라 하냐면 내가 성질이 굉장히 급해요. 아버지도 불같이 급하고 그러니까 이 괘가 불을 상징하는 것인데 불을 가지고 중화시키는 거야. 불은 뭐야? 쇠도 녹이고 다 하는 거잖아. 그래서 사주팔자에 따라서 성질 급한 넷째 아들한테는 이 괘를 줬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 해석입니다 내가 볼 때는 순서대로 주다보니까 내가 걸렸는데. 그 이름 때문에 두가지가 있어요. 장점도 있고, 나쁜 점도 하나 있어요. 옛날에 내가 글 많이 쓰고 할 때인데 전화도 많이 오고 편지도 왔어요. 그런데 전화가 오면 이름 때문에 내가 여자인줄 알고 약간 사랑고백 식으로 '여자가 왜 이렇게 글을 잘 쓰냐. 여자가 왜 역사공부를 했냐?' 이런 식으로 오해도 있었어요. 또 다른 것은 내가 광주고등학교 다닐때 7반인데 내 이름이 특이한 거에요 그래서 내 동창생들이 내 이름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근데 그 이름이 글자 뜻보다도 발음이 이화니까. 그래서 내가 아주 이름때문에 유명해졌다니까요.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가출 이야기를 해보죠 선생님. 새로운세계를 찾아 떠나신 거죠?
그때 그러니까 나는 우리 아버지 같은 그런 방식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가봐야 되겠다는 생각을 한 거에요. 그래서 나는 작정을 했어요. '나는 나간다. 우리 아버지 손에서 벗어난다.' 그래서 겨울에 내가 책을 다 싸들고 고갯마루에서 절 한 번 하고 부여로 나와서 버스 타고나온 거지요.

아버님한테 직접 '아버님 저는 여기서 한학 못 배우겠습니다' 이렇게 하지는 못했죠?
그런 말은 엄두도 못내요. 아버지께서 하도 엄해서 언제 얻어맞을지도 모르고 너무 무서워서 혼자 끙끙 앓다가 어머니하고만 상의했어요. 그래서 제가 처음에는 성주에 있는 외가 쪽으로 갔습니다. 거기서도 학교는 못갔기 때문에 결국 부산으로 내려갔죠. 고아원에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지능고사'라는 입시 문제집도 보고, '새벗'이라는 잡지도 보고 거의 내가 독차지 했어요. 그래서 서울 한영중학교가 부산 보수동에 피난학교를 세웠는데 거기로 입학을 했지요. 그때 경기고, 경복고 같은 일류학교들이 부산에 다 내려와 있었어요. 근데 거기는 고아원 원장이 안 보내줬어요 돈 들어간다고. 그래서 한영중학교에 1등으로 들어갔어요. 지능고사 달달 외워버렸지요 뭐.
 

 

 

그럼 그 고아원에서 언제 나오셨나요?
6.25때 고아원이라는 게 정말 부정부패의 소굴이었어요. 미군부대에서 보낸 물자도 있고 음식도 외국에서 오는 구호물자가 있었어요. 엄청났는데 그걸 다 뒤로 빼돌려서 팔아먹은 거죠. 그렇게 빼돌린 돈으로 원장 아들은 경기외고중학교를 다녔는데 나보다 조금 선배지만 옷도 잘 입고, 시계도 차고 다니고 했어요. 정의감이 일어났지요 분노가 치밀었어요. 그래서 몇몇 친구들하고 그 놈을 몽둥이로 두드려 패버렸어요. 그러고는 고아원에서 도망 나와 버렸지요. 그래서 그 다음에는 여수로 갔어요. 열일곱 살 때일 겁니다.

여수도 고아원이었어요. 여수 보육원. 예전 아버지께 배우던 한문 책 보따리를 들고 갔는데 고아원 담당이 보더니 뭐냐고 물어보더라구요. 한문책이다 하고는 다 읽어버렸더니만 고아원에서 곧바로 인정을 해주더군요. 그래서 나더러 사무실 일을 좀 보라고 시키더라구요. 그 이후로 한 학년 건너뛰고는 중학교로 편입을 한거죠. 그리고는 2학년에 다녔는데, 나를 알아봤던 그 원감이라는 사람 비리가 또 엄청났던 거에요. 요즘 말로 성폭행도 있었고, 물자 빼돌리기는 다반사였고 그래서 또 화가 나서 싸우고는 또 나와 버렸죠 고아원에서. 다시 광주로 갔어요. 그래서 광주에서는 여관에 물건팔러 다니고 이러면서 또 학원에 다니고 가짜로 졸업을 했죠. 그리고는 입학원서를 써서 광주고등학교에 간겁니다. 광주고등학교가 그때는 전국의 명문이었어요. 1955년도였는데, 학원에서 가짜 졸업증을 만들어서 입학원서를 냈는데 유일하게 나만 입학을 했어요. 가짜졸업생이었는데

학교는 들어갔지만 공부는 제대로 못 했겠네요, 먹고 살아야하니까
그렇죠. 여관보이를 했었는데 말하자면 여관 종업원이에요. 그때 여관이 지금 모텔하고는 달라요. 그렇게 여관종업원을 하는데 손님들 심부름 다해줘야죠 무슨 공부가 되겠어요. 그래서 수학은 거의 과락수준, 자연과 학계통은 아주 밑바닥이었는데 그래도 인문 과목은 재미가 있었어요. 거의 최우수등급이었죠. 성적도 양극단으로 간 거죠. 여관에서 일하면서 공부를 못하겠으니까 소설, 시 이런 거만 읽었어요. 그때 <전쟁과 평화>, <레미제라블>이라든가 미국의 <에반젤린> <롱 펠로Longfellow>라든가 이런 시, 소설을 다 읽었어요. 학교도서관에서. 여관 일하면서 받은 팁으로 책도 좀 사보고 했고, 그렇게 읽다 보니 나도 좀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습작 비슷하게 써나간 겁니다. 학교 교지에도 내고 신문에도 내고 학술잡지에 내봤는데 다 실어주더라니까요? 그렇게 하다 보니 내가 문학 소년이 돼버린 거죠. 아직도 가지고 있는 책인데 전국 고등학교 문예작품집이라고 거기에 내가 들어가 있다니까요. 허허

그러고 난 다음에는 대학교 가려고 하셨겠네요?
그렇지요. 당시에 명문이었던 광주고등학교에서 내가학예부장도 하고 문예반장도 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광주고 학예부장이면 무조건 서울대 문리대에 들어가는 전통이 있었어요. 선배 중에 박봉호라는 유명한 시인이있었는데 그분도 학예부장 출신이었어요. 하지만 나랑비슷해서 수학 같은 것은 못했거든 그래서 광주고 학예부장 출신 중에 서울대 문리대 못 들어간 사람은 내가 두 번째였죠. 결국 나는 공부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 시간도 안 맞고, 가정교사도 없고 해서 서울대를 못 들어갔죠. 성적이 좋으면 장학금 받고라도 들어갔겠지만 안그랬으니까 학비 적게 들고 장학금도 받을 수 있는 곳을 찾았죠.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게 서라벌예대였어요. 신문광고도 나고 포스터도 띄우고 그랬거든요. 그래서 찾아 봤더니 서정주, 김동진, 박목월 이런 명강사들이 쫙 깔려있고 장학금 혜택이 많이 있더라구요. 시험에 붙어서 장학금을 받고 서라벌예대를 들어갔죠.

그럼 대학 가느라 서울로 올라가신 거네요. 어디서 사셨어요? 대학생활은 어떻게 하셨구요?
우리 어머니가 부산서 참기름 장사를 해서 번 돈으로 종암동, 월곡동 근처에서 방을 얻었어요. 서라벌예대가 미아리에 있었거든요. 그래서 학교를 다녔는데 처음에는 재미있었죠. 적성에도 맞는 것 같았고. 그렇게 공초, 오상순 같은 문학하는 사람들 하고 명동바닥을 어울려 다니면서 재미있게 놀았어요 정말. 그런데 어머니가 암에 걸리셔서 나랑 같이 살게 됐는데 결국 어머니 간병하느라 돈벌이하느라 학교를 더 이상 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학교는 그만 중퇴를 하고 말았죠. 그 후로부터는 서울 시내에서 별별 장사를 다했어요. 그 당시에는 한옥이 많아서 집집마다 빈대가 엄청나게 많았지요. 그래서 종로3가 뒷골목쪽에서 빈대약 치는 걸로 돈 벌었어요.
치약도 팔고 안해본 장사가 없었죠. 나도 살아야 했지만 무엇보다 우리 어머니를 살려야 했으니까요. 군대도 못가고 어머니 살아 계실 때까지는 그렇게 살았어요.

어머니께서는 언제 돌아가셨습니까?
어머니가 몇 년 누워계셨는데, 나는 우리 어머니 생각하면 말을 못해. (한참 동안 울먹이시다) 내가 서른 살 때 돌아가셨어요. 사실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까지 기복이 꽤 많았는데 내가 불교신문기자도 하고, 가정교사도 하고 했지만 그것이 일정한 수입이 안되니 무척 어려웠지요. 또 주소가 일정하지 못하다 보니 입대 영장을 받지 못해서 군대 기피자가 되어 버렸어요. 김천이 원적이었는데 그리로 입영 영장이 간 거에요. 내가 알 길이 있나 그때는 이미 김천에는 아무도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본의 아니게 군대 기피가 되어버렸습니다. 당시가 5.16 쿠테타가 막 일어났을 때인데 군대 기피자 단속이 심했어요. 그래서 취직도 못하고 제대로 된 일도 못했던 거죠. 그래서 우리 어머니가 서른 살에 돌아가시면서 뭐라고 말씀하셨냐 하면 '내가 팔자가 세니까 내가 죽어야 니들이 아마 필 것이다'. 내 동생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진짜 어머니 유언대로 돌아가시고는 일이 풀리기 시작한겁니다. 그 후로는 고생을 덜했죠.

여든이 넘은 어른도 어머니 생각하니 눈물을 훔치시는군요. 어머니 얘기를 좀 더 해주시죠.
누구에게나 어머니는 다 그런 존재이지만, 우리 아버지가 주역의 대가고 유명한 사람인데 성주에서 과부가 되어서 혼자 살고 계시던 어머니가 재가를 하신거죠. 거기서 내가 태어난겁니다. 말하자면 서자였죠 내가. 나는 큰어머니가 키우셨어요. 정말 훌륭하신 분이었고 가정적으로도 큰 문제 없이 컸었죠. 어렸을 때부터 똘똘하다고 얘기를 많이 들었으니 우리 어머니는 나만 바라보고 사셨어요. 평생을 나한테 바치신거죠. 그런데 그런 어머니가 병석에 있었으니 나는 취직도 못하고 서른이 되도록 장가도 못간거죠 당시에는 엄청 노총각이었지만. 하여튼 지금도 내 인생에 가장 후회되는 것이 우리 어머니를 제대로 못 모셨다는 겁니다. 우리 아버지는 잘난 분이셨지만 우리 어머니는 나하고 동생 이렇게만 모시고 있었죠. 그래서 내 가슴에 혼자 묻어두고 있어요 지금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는 곧바로 공부를 하신 겁니까?
그렇죠 공부를 했어요. 한때는 문학에 관심도 있고 했는데 나중에 보니 내가 별 재주가 없는 것 같더라구요. 그러다가 20대 중반에 관심이 한국사로 갔습니다. 그래서 서라벌예대를 그만둔 뒤에 명동에서 리어카를 끌고 군밤 장사를 했어요. 낮에는 허용을 안해줬으니 저녁에 장사를 했죠. 요즘 롯데호텔 자리에 국립도서관이 있었는데 낮에는 거기서 한국사 공부를 했어요. 한문에는 자신이 있었으니까 낮에는 역사 공부, 밤에는 군밤장사를 했어요. 20대 중반에 명동에서 군밤을 팔고 있는데 광주고 동창생들 중에 잘난 놈들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고시에 합격한 사람도 있고 육사 들어간 동기도 있고 했는데 어쩌다 그 동창생을 만난겁니다 거기서. 어린 마음에 그때는 정말로 뭐라면 좋을까 내가 낙벽인생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놈들은 육사 나와 장교가 되어 있고 고시 합격했다고 난리칠 때인데 난 군밤장사하고 있었으니까 오죽 비참했겠어요? 아마 오기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낮에는 도서관에서 죄다 역사책만 읽었어요. 그때부터 역사로 돌아갔죠 ‘이제 내가 이것을 평생 해야되겠다.’고 생각했죠. 아까도 말했듯이 문학 쪽은 소질이 없었던 것 같아요. 문학인들 보니 실패도 많고 복잡한데 우리 역사를 보면 침략도 많이 받고, 식민지도 되어 봤고 아주 곡절이 많은 거에요. 그래서 역사를 좀 제대로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죠.

역사에 관련된 정규적인 교육은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었던거네요?
안 받았지. 그런데도 후에 내가 논문을 많이 발표하고 그랬어요. 동아일보에 임시로 들어가서 민족문화추진회 고전번역도 하고, 그 후에 서울대 규장각에서 고전 해제도 했는데 그때 발표한 논문들이에요. 그런데 그 논문들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죠. 내가 뒤에 역사관련 글을 <창작과 비평>이나 <신동아> 등에 발표하고 그러니까 이름도 없던 놈이라 “도대체 이이화가 누구냐?” 이랬었죠. 학계에서는 인정도 안해 줬지요 물론. 그러나 그 후에도 내가 막 창간된 <뿌리 깊은 나무>에도 계속 글을 발표하고 하니까 결국 사람들이 조금씩 인정해 주기 시작한 거에요. 말하자면 글을 써서 학벌을 극복한 거였죠. 지금도 학계에는 내 제자뻘 되는 학자들이 수두룩 합니다. 역사문제연구소나 민족문제연구소 관여할 때부터 그랬어요.

 

 

 

 

선생님 얘기했던 문학계에도 친일파가 있었듯이 정통 역사 학계에도 꽤 있었을텐데, 결국 못 참으셨던거죠?
그렇지. 당시에 나는 진보성향의 글을 쓰고 있었지요. 86년 당시 역사문제연구소가 시작하게 되었는데 내가 거기 합류했죠. 평론가 임헌영 씨가 초기에 친일파 역사 학자들에 대항해 우리는 민족사학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제가 동의한 거죠. 사실 난 교수지망생이 아니었으니 기존 친일역사학자들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어요. 그래서 내 주장을 강하게 펼쳤고 그게 오히려 사람들한테 먹혔던 것 같아요. 사실 교수되면 강의하고 책을 못 써요. 책 쓰는 게 제일 중요한 역사학자한테 강의만 하면 재미없잖아요 그래서 내가 말하자면 선구자가 된겁니다. 교수가 아니면서 자유롭게 강의하고 책을 쓰는 역사학자. 그때 선견지명이 있었다고나 할까 그랬어요.

어쨌든 학위도 없이 그렇게 계속 역사 관련 글을 썼던 거네요?
그렇지요. 그러니까 이이화는 학위를 어떻게 했냐 하고 본다면 동아일보에서 썼던 논설이나 고전 해제 같은 글들이 나의 학사과정이었어요. 그 후 민족문화추진회에서 옛날 고전들 번역하고, 검토하고 수정, 윤문하는 과정이 석사과정이라고 할 수 있죠. 그리고 규장각에서 옛날고전 해제를 하고 해설을 하면서 젊은이들과 같이 했던 공부가 박사과정이라고 할 수 있죠. 정식 학위는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나중에 원광대에서 명예박사, 서원대에서 석좌교수는 해봤어요. 그래서 교수도 되고 박사도 되고 다 하긴 했죠 허허.
 

 ▲이이화 선생의 저서 《허균의 생각》(ⓒ이이화)

 

오히려 학교에 다니면서 석·박사 하신 것보다 훨씬 더 혹독하게 자기 공부와 노력을 통해 진짜 학위를 받은 거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어요. 누워서 내 인생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어떻게 살아왔나 싶어요. 아까 말한 대로 한국사 22권을 한길사에서 내려고 하는데, 이게 교수였으면 절대 못써요. 교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쓴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거꾸로야. 오히려 정식 학위 받지 않고 교수 안 된 것이 나한테는 더 보람을 가져다 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정식으로 학위를 받을 여건도 안됐지만 다 과감하게 노력으로만 해결한 거라고 할 수 있죠. 사실은 이렇게 글쓰고 책 팔아서 우리 식구 먹여 살리는 일을 했어요 아이들 공부도 시키고.

역사에 관한 글을 쓰는 사람으로의 '이이화'란 이름은 언제 유명해지게 된 것인가요?
아마 창비하고 뿌리 깊은 나무에 글을 실게 되면서부터 일겁니다. 30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난 다음 동아일보나 민족문화추진회에 쓴 글이 창비와 대중적인 잡지에도 다 나왔어요. <신동아>, <월간조선>, <월간 중앙> 그때 세 개 잡지가 우리나라에서 최고였고 <뿌리 깊은 나무>는 그 뒤에 나왔는데 그 잡지에 모두 내가 글을 썼어요. 논문이 아니라 대중적인 글을 썼던거죠. 그래서 그때부터 인기가 있었어요. 내가 낸 첫 책이 《허균의 생각》인데 지금 네 번째 개정판이 나왔어요.

왜 첫 책을 허균으로 잡게 되었나요?
그것이 80년에 나왔는데 《허균의 생각》입니다. 허균은 사상이 자유분방하고 신분제도를 깨려는 사람이었고 소위 말해 유교에만 빠져 있지 않은 사람이었어요. 사람들은 소설 홍길동의 저자라고만 알지, 이분이 신분평등을 주장했다라던가 이런 내막은 잘 몰라요. 그래서 내가 그 이야기에 파고든 겁니다. 나중에는 베스트셀러가 됐죠. 전두환이 독재정치를 하고 있을 때입니다. 그런데 허균이 어떤 사람입니까? 자유사상가잖아요? 분방하잖아요. 전두환 군부독재시절이니 시기도 딱 맞아떨어졌던 겁니다. 그래서 좀 유명세를 탔죠. 그때 한5~6만부 팔렸습니다 대단했지요. 나는 허균을 좀 다르게 봤어요. 허균을 홍길동 작가로서가 아니라 사상가로서 봤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새로운 시각이었죠, 아주 획기적인 발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원문이 너무 어려웠어요 그걸 해석하느라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몰라요. 그러니 웬만한 국문학자들도 감히 손을 못 대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과감하게 달려들었습니다. 한 3년을 공부했어요.

그처럼 일반인들과는 다른 시각으로 보는 이이화의 사상은 어떻게 생긴 건가요?
내가 자랑삼아 얘기하는건데 당시 〈월간 중앙〉에 '한국의 파벌'이라는 글을 1년 넘게 연재했어요. 한국의 파벌이 뭐냐면 그때 경상도, 전라도 지역감정이라고 박정희가 부추겨 낸 사회 갈등이 일어났던 시대인데 그것을 이야기로 풀어낸 것입니다. 오늘 날에도 유효합니다. 학벌, 신분, 양반, 상놈 따지는 것 등등 옛날 있었던 당쟁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월간 중앙〉에 1년 연재할 때 내 관점이 무엇이었냐 하면 그런 파벌을 깨자는 거였습니다. 나처럼 경상도 출신에다가 전라도 가서 학교 다니고 충청도 살고 했던 직접적인 경험이 그런 글을 쓸 수 있게해 줬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그런 관점에서 허균의 신분타파 같은 혁명적인 사상을 높이 평가하면서 글을 썼던 배경이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나는 똑같아요. 지역감정, 신분이나 양반 상놈 따지는 이런 것을 싫어해요. 그래서 내가 그런 것만을 따지는 안동사람들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안동사람이 전통을 생각하는 양반문화는 좋은데, 마치 양반 상놈 따지는 것을 주자학 정통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내가 반대합니다. 당당하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내가 안동대학에서 강의할 때도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독립운동가 중에 훌륭한 분들이 많은데 신규식 선생을 조명하셨습니다.
신동아에 처음 발표됐어요 그게. 신규식 선생이 분열되어 있던 임시정부를 통합하려고 무진 애를 쓰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어요. 통합이 안 되는 임시정부, 그리고 신규식 선생의 노력에 주목을 했었습니다. 상해임시정부가 창조파니 개조파니 좌파 우파 막 깨져있을 때 분열된 임정을 통합하려고 가장 노력한 사람이 신규식 선생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선택했죠. 그때 당시에는 식민사관이 판을 칠 때입니다. 그럴 때 쓴 이야기니 주목을많이 받게 됐죠. 이처럼 파벌뿐만 아니라 신분사회, 양반 상놈, 동학농민혁명이 연구한 것도 그 맥락입니다. 1930년대, 20년대 말기의 전국에서 형평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백정들의 운동이었어요. 법적으로는 백정한테 아무 차별 없었어요. 근데 관습적으로 학교를 들어가면 백정아들이랑 같이 학교 못 다닌다면서 동맹휴학하고 그랬어요. 그때 가장 열렬하게 백정반대운동을 한 지역이 어딘지 아세요? 경상도 내륙. 안동, 예천 그쪽이었습니다. 이게 바로 잘못된 양반의식인거죠. 나도 경상도 출신이지만 이래가지고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그런 글을 쓰게 된 것입니다. 물론 요즘이야 그렇지 않지만요.

말씀하셨던 것처럼 역사를 공부하시고 쓰다가 말하자면 운동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네요?
역사가 운동이죠. 자연스럽게 민주화운동, 인권운동으로 이어져서 그 분야에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되었어요. 되돌아보면 한 세 가지 정도 일을 한 것 같아요.
 
우선 첫째는 동학농민혁명입니다. 새롭게 조명을 했어요. 전봉준을 역적이라고 하던 시대였어요. 하지만 답사도 다니고, 공부도 하고 해서 특별법도 통과시켰죠. 국가기념공원도 세웠습니다. 종로 1가에 가면 전봉준 장군 동상도 세워져 있습니다. 참 뿌듯한 일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두 번째는 한국전쟁 때 벌어진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운동입니다. 한국전쟁 때 100만이 넘는 민간인이 죽었다고 합니다. 제가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범 국민위원회 대표였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 일에 관여하고 있구요. 과거사 청산 특별법도 통과시켰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때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진상규명 위원회가 만들어졌고 위원회 활동을 통해 수많은 민간인 희생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이 이루어졌어요.
 
세 번째는 친일청산운동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 편찬 작업을 지금도 하고 있어요.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만들고 대표를 맡았었죠. 역사문제연구소도 지금은 많이 안정화 되어 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은 국가에서 기념공원까지 만들어줬으니 성공한 셈인데 과거사 청산운동,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문제는 아직 50% 정도로 진행중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친일 청산 문제는 이영훈(《반일 종족주의》 저자)같은 사람이 저렇게 설치고 다니는 것을 보면 아직 멀었습니다. 친일 인명사전도 아직은 30~40%밖에 진행되지 않았다고 봅니다. 나도 일본을 많이 다녀봤지만 일본인들 중 친한파는 10% 정도 밖에 안됩니다 매우 소수죠. 그런데 혐한파는 30%가 넘는 것으로 조사되어 있습니다.
 
일본은 정치나 사회 문제에 관심이 없어서 희망이 없는 나라라고 봅니다. 어쨌든 민족문제 역시 국수주의에 빠져서 무조건 친일파에 복수하자 이런식으로 가면 안됩니다. 나 역시 지금까지 그렇게 일해 왔어요.이제 그런 감투들도 다 내려놓으려 합니다. 작년부터 조금씩 내려놓고 있어요.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직만 내년(2020년) 2월까지로 되어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 작업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3권짜리 동학농민혁명 통사입니다. 마지막 작품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노근리 사건이나 경산 코발트광산 학살사건등 민간인의 희생이 정말 많았었죠. 유독 거기에 그렇게 힘을 쏟은 이유가 있습니까?
그건 인권운동입니다. 동학농민혁명, 이것도 인권운동입니다. 물론 일본의 침략을 반대했지만 기본적으론 인권운동이고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도 인권운동입니다. 재판도 없이 마음대로 사람을 죽이는 겁니다. 저의 외삼촌이 소위 말해 진짜 빨갱이입니다. 사회주의자였어요. 일본 동경으로 유학을 다녀온 후에 일어난 사건인데 우익들이 마을에 와서는 땅을 줄테니 보도연맹에 가입하라고 해서 거의 모두가 가입했는데 우리 외삼촌만 낌새가 이상해서 도망을 갔는데 우리 외삼촌만 살아남았어요. 나머지 마을 사람들은 보도연맹으로 몰려 다 죽었습니다. 이런 억울한 죽음이 수없이 많았는데 한이라도 풀어줘야 할 것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인권운동이죠. 어떤 기자들은 물어보더라구요 '당신 할아버지가 동학에 관련되어 있느냐? 6.25전쟁 때 누가 죽기라도 했느냐?' 사실 말씀드린 우리 외삼촌 외에는 아무 관련이 없어요. 그냥 순수한 인권차원에서 글을 쓰고 운동을 한 것입니다. 이것이 올바른 역사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선생님 대표작 중에 한국사 이야기가 있죠? 어떻게 그렇게 큰 일을 하실 생각을 했습니까?
그러니까 그게 내가 민주화운동을 하고 있을 때인데 94년에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행사를 했어요. 한길사 김언호 대표가 나한테 이런 운동도 좋지만 전체를 바라볼수 있는 통사를 한 번 써야할 것 이니냐, 시대가 달라졌으니 한두 권이 아니고 좀 길게 써야 될 필요가 있지 않느냐라는 제안을 했어요. 그래서 내가 좋다하고는 시골공기 좋은 곳을 10년 동안 돌아다니면서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22권으로 마쳤습니다. 사회활동을 전혀 안한 것은 아니지만 거기 맞추려고 비교적 충실하게 작업을 했죠. 그랬더니 한국에서 두 번째로 개인이 쓴 한국통사가 된겁니다. 지금도 독자들이 많이 찾고 있더라구요. 딱딱한 논문 형식이 아니라 대중들이 읽기 편하고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쓴 것이 독자들이 많이 찾게 된 이유가 된것입니다. 평소에 생각하던 기존의 낡은 관습과 관념을 깨뜨려야 한다는 생각이 좀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죠.

먼저 말씀하신 세 가지 중에 마지막 일제 잔재 청산을 하지못한 게 굉장히 아쉬울 텐데요?
지금도 과제입니다. 현재 아베 정권이 군국주의의 잔당입니다. 이것을 청산해야하는데 일본 사람들이 아직도 정치변혁에 별로 관심이 없는지 잘 안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문재인 정부는 비교적 잘하고 있는데 사실 일본의 아베보다 더 정치하기 힘든 것이 한국 대통령입니다. 남북문제가 걸려 있고, 미국이 걸려있고 참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미국이 무기 사달라고 하면 안된다고 해야합니다. 미국이 아무리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해도 개성공단 열어줍시다 그러면 좋겠어요 나는. 지금 2~30대 젊은이들은 미국 시킨다고 따라가는 것 좋아하지 않습니다. 독일 같은 데 보세요 잘못된 과거사는 모두 다 청산했잖아요? 프랑스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우리나라는 이 아픈 역사를 아직도 청산하지 못하고 있는것입니다. 분단이라는 것 때문에 더 심화되는 것입니다. 이승만이 친일파 데리고 일하고 분단 고착화 시키고, 박정희도 마찬가지였어요. 민주화된 정부에서는 그러면 안돼죠. 청산할 것은 청산하고 일본이 변하면 잘지내면 됩니다. 이웃나라랑 싸우기만 하면 안 될 일이니까요.

선생님은 역사학자입니다. 역사학자 이이화에게 역사는 뭐라고 말씀하실 수 있나요?
역사란 정말 해석하기가 힘든 문제입니다. 그렇지만 결국 내가 가장 화두로 삼는 것은 우월적 민족주의도 아니고 우리 민족만 잘났다, 우리 민족만 화려하다 이런 것은 아닙니다. 객관적이고 평론적이고 가치존중, 남의 인권도 다른 민족도 존중할 줄 아는 그런 역사가 되어야합니다. 내가 백두산을 13번인가 올라갔는데 내가 백두산 가는 이유가 우리 민족의 기운을 맞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백두산 올라갈 때마다 내가 울고 내려오고 그러는데 우리나라가 침략을 너무 많이 받았어요. 동학농민혁명도 그렇고 한국전쟁도 그렇고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요. 이게 아픈 역사입니다. 이제는 절대로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그러니까 내가 민족 우월 주의로 생각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역사를 인권에 기준을 둡니다. 인간 존중 사상에 맞춰서 역사를 풀어가야 한다고 보는 겁니다.
 

 

 

일본의 청년들 얘기를 하셨어요. 우리나라 청년들에게도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으실텐데?
아주 소박한 얘기입니다. 출세에 너무 빠지지 말라는 말입니다. 새 가정을 꾸리는 신랑 신부에게 주례를 설 때도 가끔 이런 말을 합니다. 이웃도 돌봐줄 줄 알고 사회도 좀 관심을 가지고 자기 살만하면 어려운 곳에 좋은 곳에 돈도 좀 낼 줄 알고 이렇게 사는 것이 좋지 그렇게 꼭 일류 대학 나오고 출세해야 좋은 것은 아니라고 해줍니다. 자기 하고 싶은 일 하고 열심히 행복하게 살면 그게 보람 있는 일 아닐까요?

평생을 야인으로 살면서 평등하고 평화롭게 인권을 존중하면서 살아온 역사학자 이이화. 비록 몸은 야위었고 병약한 얼굴이 눈에 띄게 보였지만 포효하는 목소리만큼은 누구보다 청년이셨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와 선생님께서 좋아하시는 안동소주를 보내드렸더니 사모님께서 연락을 주셨다. 고맙다며 좋은 프로그램 만들어 줘서 또 기쁘다고... 그리고 한 달여 다시 연락을 주신 사모님 목소리에 근심이 가득했다. 병원에 입원하셨는데 점점 상태가 안좋아지신다면서 어쩌면 못 일어나실 수도 있겠다는 말씀이셨다. 결국 얼마 전 신문을 통해 부음을 들었고 선생님은 그렇게 세상을 떠나셨다. 비록 체구는 작았지만 언제나 당당했던 큰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 생전 마지막 인터뷰를 여기에 담으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 본 글은 『기록창고』 6호에 수록된 내용이며 E-book에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강병규(안동MBC PD)
2020-10-05 오후 1:4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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