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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속 안동③-‘길 안과 길 밖의 경계, 안동에서 울다’ 장정일과 안동

  • 신준영(이육사문학관 사무차장)
  • 2022-05-03 오후 3:04:38
  • 1,945

마스크가 일상이 된 지 두 해가 지났다. 상상 밖의 일들은 현실이 되어 들이닥쳤는데, 현실의 혼 란 속에서도 여전히 아이들은 태어나고 아이들은 자라난다. 마스크가 얼굴의 일부인양 자연스럽 게 받아들이는 아이들의 모습이 신기하면서도 한편 안쓰럽다. 이제 사람들은 마스크를 삶의 일부 로 생각하며, 마스크 없는 세상을 오히려 불안해한다. 

마스크는 말 그대로 ‘가면’이다. 우리는 지금 가면의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닐까. 가면 뒤로 표정을 숨기고 마음을 가린 채로 말이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걸어온 길과 걸어가야 할 길 어디쯤에 잠시 멈춰 서서 호흡을 골라야 할 시점이다.

길 안과 길 밖의 경계에서 혼란스러울 때, 문득 장정일의 「길안에서 택시잡기」라는 시가 떠올랐다.

 

 길안에서의 택시잡기 / 햄버거에 대한 명상 ⓒ시집도서관 포엠

 

 

길안에 산이 높고 그 물이 맑다. 길안에 나무가 푸르고 나뭇가지 위에 비둘기떼가 지어올린 흰구름은 마치 건축같이 아름답고 웅장하다.

멀리서 바라봄이 아니라 길안 가운데 있을 때 길안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여행자는 독일빵같이 커다란 슈트케이스를 길가에 내려 놓고, 택시를 기다린다.

웬일인지 꽤 오랫동안 택시가 오지 않고 택시를 기다린 시간만큼. 저녁이 가까워왔다.

이름 모를 잎새들의 흔들림, 여행자는 자신이 혼자임을 느낀다. 이름 모를 새떼가 햇빛 한 조각씩을 물고 서쪽으로 지고, 연이어 모래단지를 엎지른 듯 이름 모를 별들이 흩어졌다. 사십 년 간의 도시생활이 어린 시절 시골에서 익힌 동식물과 별자리 이름을 깡그리 잊게 했다. 모두가 이름 모를 것들. 

여행자는 갑자기 심한 부끄럼에 휩싸인다. 고향에서 떠나 도시에서 사십년 간 살았던 한 오십대가 있어 오랫동안 찾아보지 않았던 고향에 온다. 길안……. 

길안에 갔다.

길안이 아름다워 나는 울었다.

길안에 어둠이 내렸다.

길안에 택시가 보이지 않는다.

길안 바깥에서 나는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 생각을 한다.

길안이 불편해진다.

길안이 내 모든 약속을 퍼지르고 앉았다.

길안이 불안하다.

 

길안의 바깥에 있을 때 자동판매기에서 커피 빼먹던 생각을 한다.

길안을 빨리 벗어나고 싶다. 길안 벗어날 수단이 없구나. 길안이 불가해하게 느껴진다. 길안의 산과 물이 역겨워 진다. 길안의 나무들이 유령같이 곤두섰다. 아아 상종 못할 자연

이해 못할 자연이다.

 

길안의 비문명이 공포스럽다.

 

그러나 나는 어디로 가게 되는 것인가?

내가 가야 할 거기가 어딘가? 택시를 쉽게 잡기 위해

택시잡기 어려운 이곳으로부터 빠져나가야 할 그곳은 어딘가?

과연, 길안을 떠나 다시 길안으로 돌아올 수 있겠는가? 길안에서 처음으로

길안 바깥이 불안으로 닥쳐온다. 나는, 너는, 모든 길들은 어디로 가게 되어 있는 것일까? 우리 있을 데가 없다.

풀이 우거진 자리에

한 무전여행가가 검은 슈트케이스를 든 채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늬엿늬엿 해가 지고 있었지만

 

택시는 보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여행가가 쉽게 포기할 것 같지도 않았다.

- 장정일, 「길안에서 택시잡기」

 

   (『길안에서의 택시잡기』,민음사, 1988) 중 일부

 

시인 장정일과 안동, 그리고 길안의 인연에 대해서 는 자세히 아는 바가 없다. 그러나 그가 안동, 특히 길안과 어떤 식으로든 인연을 가졌으리라는 짐작은 충분히 가능하다. 장정일의 시에 나타난 ‘길안’은 우리가 아는 안동시 길안면과 길의 안쪽을 동시에 가리키는 중의적 표현이다. 길안을 고향으로 가진 자의 입장에서건, 여행자의 입장에서건 ‘멀리서 바라봄 이 아니라 길안 가운데 있을 때 길안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지나와 생각하면 평범한 일상 가운데 있었을 때 그 일상 역시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그러나 우리는 일상의 아름다움을 자각하면서도 길 밖의 것들을 갈구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다시 시인은 ‘길안에 어둠이 내렸다. 길안에 택시가 보이지 않는다. 길안 바깥에서 나는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 생각을 한다. 길안이 불편해진다. 길안이 내 모든 약속을 퍼지르고 앉았다. 길안이 불안하다.’라고 적는다. 장정일의 시에서는 길 안과 길 밖이 비문명과 문명으로 구분 되어 표현되지만 이는 지금의 코비드 시대 이전의 일상과 이후 비일상의 혼란으로 환치하여도 무리 없게 읽힌다. 그리하여 다시 시인은 말한다. ‘나는, 너는, 모든 길들은 어디로 가게 되어 있는 것일까? 우리 있 을 데가 없다’라고. 이 시가 쓰인 1980년대에도 그랬 고 40년이 지난 지금도 갈 길을 몰라 헤매고 있는 건 여전하다. 우리는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갈 데가 있기는 한 걸까, 라는 질문을 안은 채로.

 

 

 ▲길안소재지 입구, 2021년 ⓒ신준영

 ▲길안사거리, 2021년 ⓒ신준영

 

 

장정일은 『길안에서 택시잡기』(민음사, 1988) 이전에 낸 『햄버거에 대한 명상』(민음사, 1987)이라는 시집에서도 안동을 소재로 쓴 몇 편의 작품들을 수록하고 있다. 

 

언젠가 왔던 듯 한 도시. 산림이 벽처럼 둘러쳐진 한국의 중북부

낮은 건축 사이로 울긋불긋한

바람이 지나가고 몇 개의 아이스크림

껍질이 흙먼지와 섞여 나른다. 중북부 누구나 이런 소도시에 오면 미국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생각해도 좋으리라. 여기에도 코카콜라를 마셔대는 갈증 난 목구멍이 있고. 문제의 외화를 보는 호기심이 있고. 광광 울리는 팝송이 있으니

중북부의 소도시. 어딜 가나

한국의 찻집에는 중년들이 있다.

정치적 예언가 역할을 즐기는 중년신사가 있어 개혁세력, 후계자 또는 한 재벌 기업의 어이없는 무너짐에 대하여 진단하고 의심하고 예언한다. 그 어딜 가나 한국에는 책임감 없는 논객이 있다. 세상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세상 사람 모두가 부르조아가 되면 될 것이라고 호탕하게 낄낄거리는 중년이 있다.

한국의 어느 도시엘 가나 문제가 있는 곳에 문제의 중년이 있고 추문이 있다. 나이 먹은 추물이

벌써 이곳의 어린 소녀들도 유행의 소매 끝으로 손등을 덮고 다닌다. 유아기적인 것과 가까와지려는 최근의 문화양식이 이곳 계집 아이들의 손등을 덮쳐 누르고 있다. 계집의 손등만 아니라. 모든 도시는 서울화. 모든 도시는 〈최근의 서울화〉인 것.

언제나 끊임없이 서울식의 삶을 반추해야 하는 소도시 출세를 결심한 자들이 칼을 갈며 떠나간 텅 빈 소도시로 서울이 덮고 남은 절정 없는 밤이 내려깔린다.

 

그러면 유격훈련에 임한 신병같이 한 번씩 아내의 이름을 부르고. 첫딸의 이름을 부르고. 낯선 소도시를 무대로 비장한 상술을 벌여놓은 약삭빠른 장사치들이 실비의 여관을 찾는다. 서적외판원이며 남성향수외판원. 캘린더 주문배수원들이 하나. 둘. 값싼 여관을 찾는다. 소도시의 3류 여관에서 출세한 자들의 서울에서 탈락한 뜨내기 서울내기들이. 하루의 피곤을 풀처럼 눕히리라.

언젠가 왔던 듯한 도시. 산림이 벽처럼 둘러쳐진. 한국의 중북부 거기에 싸락눈처럼 잠이 떨어진다. 그러나 잠들지 못하는 회한도 있으리라. 내가 왜 여기까지 왔지? 여기가 어디지? 끝? 끝?

 

그래 너는 이제 끝이야. 외판원이 너의 끝이야. 네 삶의 끝이야! 베개 속에 얼굴을 묻고 사나이는 울어 버린다. 중북부의 외진 소도시가. 썰렁한 소도시의 초라한 여관의. 꿉꿉한 이불이 다 큰 사나이를. 서울내기 사나이를 울려 버리고 만다.

- 장정일, 「안동에서 울다」

 

   (『햄버거에 대한 명상』, 민음사, 1987)

 

 

누구에게나 울기 좋은 방이 있듯 울기 좋은 장소, 울기 좋은 도시도 있을 것이다. 외판원으로 지방을 떠도는 서울내기 가장이 ‘언젠가 왔던 듯한 도시. 산 림이 벽처럼 둘러쳐진 한국의 중북부’이며, ‘낮은 건 축 사이로 울긋불긋한 바람이 지나가고’, ‘거기에 싸 락눈처럼 잠이 떨어’지는 도시를 헤매고 있다. ‘잠들지 못하는 회한도 있’어서 ‘내가 왜 여기까지 왔지? 여기가 어디지? 끝? 끝? 그래 너는 이제 끝이야. 네 삶의 끝이야!’를 외치며 ‘베개 속에 얼굴을 묻고’ 울 어버렸던 도시가 바로 안동이었던 것이다. 1980년대 ‘중북부의 소도시’ 안동에 대해 시인은 ‘어딜 가나 한국의 찻집에는 중년들이 있’어서 ‘정치적 예언가 역할을 즐기는 중년신사가 있어 개혁세력, 후계자 또는 한 재벌 기업의 어이없는 무너짐에 대하여 진 단하고 의심하고 예언한다. 그 어딜 가나 한국에는 책임감 없는 논객이 있다’고 말한다. 그의 시처럼 ‘한 국의 어느 도시엘 가나 문제가 있는 곳에’ 있는 ‘문 제의 중년’이 되어 마스크를 한 채 찻집에 앉아있지 는 않았는지 스스로를 의심하고 진단해본다. 더불 어 시인이 앉았던, 혹은 보았던 1980년대 안동의 찻 집들을 짐작도 해본다. 

 

1987년 6월 항쟁과 6.29 선언의 결과로 치러진 13대 대통령 직선제 선거 즈음의 혼란이 성격을 달리하 여 20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는 2022년에도 여전하 다는 건 아이러니다. 진보와 보수, 야당과 여당, 성별 과 나이, 지역을 떠나 정책의 ‘숲이 크고 나무가 울창 하’다면 ‘무슨 오해가 있고 공해가 있겠는가’ 싶다. 

 

길안에 숲이 크고 나무가 울창하다

길안에 들어서니 여기 무슨 오해가 있고 공해가 있을까 여행자는 기분이 좋아 자신의 목에 메인 워크맨의 입력단추를 누르고 기능전환 스위치를 에프엠에 고정시킨다 그러자 차랑차랑한 높은 음악이 길안의 호면 같은 숲을 흔든다

서늘한 나뭇잎이 감전이나 된 듯 미세히 떨고 부르르 날개를 뒤틀며 새들이 하늘로 치솟아 오른다 그제서야 여행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복병이 있음을 안다 어느새 전파는 이렇게 깊고 고요한 길안에 마저 맹렬히 숨어들었나 보다

높은 산봉우리마다 거대한 송신탑이 섰는데 송신탑을 보자

인기팝송과 정부발표 같은 것들로 속이 메스껍다

여행자는 기분이 상해 워크맨을 바위에 던져 부서뜨린다

그러면서 전파를 만들었다는 양코배기를 비웃었다 길안의 구석구석 독처럼 차오른 전파의 폭우 속에서도 숲은 얼마나 커지고 나무들은 얼마나 푸르게 그 속이 차오르는가

- 장정일, 「전파 나무 나무전파」

 

    (『햄버거에 대한 명상』, 민음사, 1987)

 

다시 길안으로 돌아와 보자. ‘길안에 숲이 크고 나무가 울창하다 길안에 들어서니 여기 무슨 오해가 있고 공해가 있을까’ 싶었던 길안이지만 ‘어느새 전파는 이렇 게 깊고 고요한 길안에 마저 맹렬히 숨어들’어 ‘높은 산 봉우리마다 거대한 송신탑’을 세웠다. 송전탑들이 길안 과 가까운 지역에도 처음 세워지기 시작하던 때를 기억 한다. 어린 날 높은 산을 가로질러 에펠탑 같기도 하고 철제 빌딩 같기도 한 송전탑이 하나 둘 줄을 지어 세워 지는 걸 보면서 저 거대한 물체는 도대체 뭘 하자고 세 워지는 것일까 궁금했다. 호기심에 가까이 다가갔다가 ‘웅웅’하는 소리와 기운에 놀라 도망쳤던 기억이 있다.

 

경남 밀양시와 경북 청도군의 농촌 주민들을 비롯하 여 여러 곳에서 송전탑 설치로 인한 생존권 위협에 맞서 반대 투쟁을 벌여왔다. 이러한 투쟁의 기록을 담은 ‘밀 양·청도 송전탑 반대 투쟁 온라인 기록관’도 개관했다고 하니 그간의 투쟁 과정의 치열함을 짐작할 만하다. 송전탑을 보며 느꼈던 시인의 불안과 메스꺼움이 가까 운 미래에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끝내 이렇게 적는다. ‘길안의 구석구석 독처럼 차오른 전파의 폭우 속에서도 숲은 얼마나 커지고 나무들은 얼마나 푸르게 그 속이 차오르는가’ 라고. 속으로부터 차오르는 나무 한 그루의 푸름이 모여 결국 거대한 숲을 이룰 거라는 희망의 전언을 잊지 않고 있는 것이다.

 

지구 구석구석 독처럼 차오른 팬데믹 공포 속에서도 생명은 자라고 희망은 푸르게 그 속이 차오르고 있다는 걸 믿는다. 거듭 길 안으로 돌아와서 마스크 속에 가려 진 당신의 빛나는 입술과 붉은 볼을 다시 마주하게 될 날이 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기대어 울기 좋은 사 람과 마음 놓고 울어도 좋을 도시는 품이 넉넉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살아보니 그랬다. 울기에도 웃기에도 안동만한 도시는 없었다.

신준영(이육사문학관 사무차장)
2022-05-03 오후 3:0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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