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ㆍ예천 교류와 상생의 근대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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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생애사] "아무것이 할배 장개 잘 들었다." 예천군 호명면 박호녀 할매 이야기
안동시공동기획연재] 2019 안동·예천 근대기행(3)

  • 서미숙
  • 2019-08-29 오후 4:4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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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명면 밀양박씨 박호녀 할매의 파란만장한 삶

사람들은 말한다. 지나가는 노인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소설책 몇 권 분량의 이야기가 나온다고. 격동의 시대를 살아온 세대이니 그럴 법하다. 동시대를 관통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치열하게 세상과 맞짱 뜬 여장부를 만났다. 스무 살에 아이 업고 보따리 장사 시작해서 입으로 말할 수 있는 장사는 다 해봤다는 박호녀 할머니다. 장사도 이문만 남기지 말고 베푸는 장사를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굽이마다 지나온 발자국이 우리 근대사와 많이 겹친다.

 

박호녀 할머니 ⓒ서미숙

 

호명면 밀양박씨 여식이라 박호녀

박호녀 할머니는 1932년 경북 예천군 호명면 오천리에서 태어났다. 일곱 살 때 일본 오카야마로 건너갔다. 아버지(박돌이)가 탄광에 광부로 일하러 갔기 때문이다. 엄마와 삼남매(오빠, 여동생)가 함께 갔다가 해방되던 해 돌아왔다. 막내 동생은 한국에 와서 태어났는데 여동생과 13년 터울이다.

일본에 머무는 6년간 내내 전쟁을 겪었다. 당시 일본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에 열을 올리며 식민지 야욕을 불태울 때가 아니던가.

"딴 거는 기억 안 나고 피란 댕긴 거만 기억나. 산속으로 갔어. 오까야마겐 구메군 요시오까무라, 거도 촌이래. 그때는 따라다니는 거라고 다니고 아무것도 몰랐어. 비행기 소리가 나면 산으로 올라가고 해제 사이렌 불면 내려오고, 우리 있는 데는 폭탄은 한 번도 안 던졌어. 집은 나가야 사택이라고 기다랗게 생겼어. 화장실도 있고 방이 세 개였지. 탄광에 일하러 오는 사람들 살라고 지은 모양이래. 아버지는 아침 8시에 나가고 오후 다섯 시 반이면 돌아왔어. 땀났을 땐 매란 없고 집에 오마 목욕 가야지. 만날 너무 힘들게 사께네, 미안타 불쌍타 공부 열심히 해야 성공한다 그랬어. 엄마도 식당에서 일했고."

일본 가서 6개월 정도 있다가 요시오까 소학교에 입학했다. 2학년 때 속이 안 좋아서 몸이 퉁퉁 부었다. 보는 사람마다 죽는다고 했을 정도다. 1년 3개월 정도 학교를 쉬었다.

"엄마가 함바집에 가서 오래비 생일이라 소고기를 구워 먹었는데 그 길로 아가 아픈 것 같다고 얘기를 했어. 배를 사다가 숟가락으로 긁어 주라 해서 두세 숟가락 먹었는데 조금 있으니 숨이 탁 터지는 것 같애. 그걸 먹고 잠이 들었어. 그래서 살아났어."

공부가 그렇게 하기 싫었다고 한다.

"숙제 해오라 하면 글자 크다끔하게 써서 장수만 채운 게 생각나. 4학년 다니다가 해방되어 돌아왔지."

 

박호녀 할머니 가족이 살았던 일본 오카야마(출처:구글 지도)

 

내 좋으마 다 좋아

"일본 친구들과도 잘 어울렸어. 처음엔 말이 잘 안 통해 조센징이라 놀리기도 했는데 일 년쯤 지나니까 괜찮았어. 내 좋으마 다 좋아."

한 반에 마흔네 명 중 한국 아이가 네 명이었다. 친구 중에 안동에서 온 친구와 풍산에서 온 친구가 있었다. 동갑인 친구 한 명은 이름도 기억한다.

"마쓰모도 세끼순이라고. 그 친구를 나중에 어쩌다 딱 한 번 만났어. 마흔 가까이 되었을 때지 아마. 우리보다 더 늦게 일본으로 갔던 친구인데. 예천 포목점에 옷감 끊으러 갔는데 암만 봐도 보던 사람 겉은데 싶어 물으께네 맞다 그래. 깜짝 놀랬지 뭐. 그때만 해도 20년 넘어 만났으니까. 이야기하는 음성 듣고 알았어."

해방되어 서둘러 귀국하느라 그랬을까? 아니면 당초에 노동을 착취하려는 음모가 있었던 걸까? 아버지가 탄광에서 일하고 받은 월급을 저금해놓고 찾지도 못하고 왔다니. 귀국 후에도 고단한 삶은 계속된다.

"고향에서 못 살아 서울 답십리 가서 사는데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아야 했어. 아부지는 톱 미고 댕기며 나무 썰어야 되고, 오빠는 연탄공장에 댕기고, 나는 열네 살부터 성냥공장에 댕겼어. 성냥공장에 1년 반, 그다음에는 양말 짜고 수건 짜는 공장에 가서 2년 반 동안 숱한 고생을 했어. 엄마는 양말 짜 놨는 거 집에 가져와서 시야게(꿰매기)하고, 장갑 목 따는 부업해서 돈 벌고."

동생은 어려서 아무것도 모르고 온 가족이 일을 했다.

"답답하니까 공장에 갔다 와서 천자책을 한 번씩 들따보곤 했어. 일본에서 한자를 배웠기 때문에 한글도 천자책 놓고 그 밑에 가나 있어서 나 혼자 배웠어. 지금도 쌍받침은 어려워. 학교에서 배운 거 써먹는 거는 구구단배께 없어. 구구단은 지금도 외우는데. 내 이름자만 아는 거야."

고된 서울살이에서 전쟁의 소용돌이로

서울 시절에 대한청년단 활동도 했다. 대한청년단은 우익 청년 단체였다. 8.15 광복 후 조직적인 지지기반이 필요한 이승만 대통령이 1948년 12월 19일에 만들었다. 문화운동, 사상 계몽을 표방했지만 이승만을 지원하는 정치활동에 치우쳤다. 전국 조직으로 단원이 20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열여덟 살이었는데 입단하고 4개월 만에 단장을 시켰어.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도 있었는데. 1반에서 5반까지 70명이 한 조였어. 동장이 젊은 사람들 모집해서 아침저녁으로 한 시간씩 가르치고 배우고 그랬지. 열다섯 이상부터 서른다섯까지 의무적으로 가야 했거든. 아침에 모이면 운동장 한 바퀴씩 돌고 노래 부르고. 뭔 날 되면 차 타고 시가행진하고. ‘물리치자 공산당, 깨트리자 3·8선, 대한민국 만세’ 구호도 외치고."

할머니는 아직도 대한청년단에서 불렀던 노래를 기억한다. 3절까지 있어 가사가 앞뒤로 살짝 꼬이기는 했지만 한창 때 불렀던 그 노래를 차분하게 다시 불렀다.

양양한 앞길을 바라볼 때에
혈관에 파도치는 애국의 깃발
높고 넓은 사나이 마음
생사도 다 버리고 공명도 없다
들어라 우리들의 힘찬 맥박은
가슴에 울리는 독립의 소리

 

서울살이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열여덟에 6.25를 만나 칠월에 인민군 뒤따라 내려왔다.

"서울서 호명 오는 데 20일이 걸렸어. 구십 난 조모를 데리고 아버지, 엄마, 우리 삼 남매까지 여섯 식구가 같이 왔어. 원주로 해서 문막으로 제천, 단양으로 걸어왔어. 한 동네서 이틀 밤만 자면 인민군들이 오빠와 나를 붙들러 와. 숨어숨어 오느라고 도망을 다녔어. 산에 나무가 없어 빨갛고 작은 파닥 솔뿐이래. 노루가 지나가도 보이고 개가 지나가도 보이고. 그래도 낮으로 걸어야 해. 밤에는 안 보이니까."

처음에 피란 올 때는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움직였다고 한다.

"나중에는 자기 고향 찾아가느라 뿔뿔이 흩어졌어. 산중에 들어가 외딴집 마당에서 자기도 하고. 먹는 거는 그 집에서 감자 삶아주면 먹고, 보리밥이라도 해가 주면 먹고, 강원도 땅이라서 옥수수도 삶아주면 얻어먹고 그랬지. 빈주먹으로 내려와서 주는 대로만 먹었어."

 

시어머니와 남편 신사출

 

 

청송 주왕산에서 남편과 친척들. 아래 우측이 박호녀(사진제공: 박호녀)

 

상이군인이 뭔지도 모르고

고향 호명에 정착해 살다가 중매로 결혼했다. 스무 살 각시와 스물일곱 신랑이었다.

"남의 집 사는 거 보고 내 입 하나 던다고 갔는데, 신랑은 좋은 사람 만났는데 생쥐 볼 같은 것도 없어. 쌀 한 도배기도 없어. 없는 걸사 금방 결혼하고 군에 가버려 가주고, 1월에 결혼하고 11월에 군에 갔어. 지금도 그 생각만 해도 벌벌 떨리."

신랑은 군대 생활 8개월 만에 부상을 당해 제대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는 상이군인이 뭔지도 모르고 신청할 줄도 모르고, 육군본부가 어딘지 면에 가서 물으이 아무도 모른다 하고. 칠십이 넘어 우리 막내딸하고 육군본부를 찾아갔어. 사람 옷을 벗겨놓고 보이께네 매란 없거든. 그때사 신청해가지고 6개월 연금 타 먹고 돌아가셨어. 오토바이 타고 들에 가는데 뒤에서 차가 와가주 밀어버렸어. 맨날 둘이 댕겼는데 그날따라 콩 타작 한다고 내가 안갔디만 ……."

그렇게 황망하게 영감님을 보냈다.

"병원에 물리치료 하러 가서 누웠는데 어떤 할머니가 ‘잘못하면 칠팔월에 가면 그믐께 아야 그고 죽을 수도 있다’ 그는 걸 귀 밖으로 들었지. 돈 20만원 주면 막음을 해주껜데 그드라고. 속으로 이 할마이야 죽는 걸 어예 아노, 했는데 칠월 넘기고 팔월 초나흘에 죽었어. 내가 육십 아홉이었으니까 영감은 칠십 여섯이었지. 난도 죽는다 소리 들어서 영감 먼 옷 해놓고, 내 해 해가주 틀바늘에서 실도 안 끊었는데 가버렸어. 삼베 끊어가주고 내 손으로 할 때 해놓는다고 했던 게……."

 

오천 개고개재에서 수양이모 딸과 함께. 곱게 한복을 입은 박호녀(사진 : 박호녀 할머니 며느리 김경순)

 

 

30대 초반 호명 오천마을 골목에서. 뒷줄 맨 왼쪽이 박호녀(사진제공: 박호녀 며느리 김경순)

 

"우리 친정 할머니가 아들도 딸도 없이 아버지 하나밖에 없었거든. 손자 손녀들도 불면 날세라 쥐면 꺼질세라 귀하게 키웠는데 고생시키면 안 된다고 그래서 참말로 소리 한 번 안 질렀어. 어쩌다 내가 화를 내면 나가버렸어."

할머니 댁 기둥에는 국가유공자유족댁이란 명패가 붙어있다. 그때가 2001년이다. 몇 년 전만해도 보훈회관 미망인들 모임에 출근 잘하고 모범이 된다고 표창패를 받았다. 이제는 거동이 불편해 모임에도 탈퇴했다.

 

국가유공자 명패 ⓒ서미숙

 

 

국가유공자유족 표창패 ⓒ서미숙

 

슬하에 자녀는 육남매를 두었다. 딸 둘 아들 넷이다. "셋째 아들은 차 사고로 먼 데 가버렸고, 아들 하나는 농사짓고, 둘째는 객지로 댕기고, 서울 어데 가 있다는데. 막내아들은 장개도 안가고 혼자 댕게. 나이가 하마 오십 일곱인데. 맏딸은 대구 있고 막내이는 안동 있어. 막내 딸은 지가 잘해서 대학을 나왔고 다른 아들은 모두 중학교 댕겼어. 아이들은 말썽 안 부리고 잘 컸어. 남의 것 욕심내지 말고 올바르게 살아라, 싸워도 이길라 하지 말고 한 찰 맞아라, 했지. 그래가 우리 아-들은 싸울 줄도 몰래."

 

2009년 모범 국가유공자유족으로 예천군수 표창패를 받았다.(사진제공: 박호녀)

 

보따리 장사부터 안 해본 장사가 없어

사는 게 너무 힘들어 세월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른다고 한다. 스무 살에 젖먹이 업고 보따리 장사 시작해서 서른두 살까지 인근 마을마다 가가 방문했다.

"예천시장에 가서 풍기인견도 떼오고, 아들 난닝구 같은 거 가지고 댕기고, 과자도 가지고 댕기고. 죽으나 사나 머리에 이고 다니느라 무르팍을 못 써서 몇 년 전에 기어이 수술을 했다. 학용품 장사, 호떡 장사, 풀빵 장사, 우동 장사, 중화요리, 국밥집까지 …."

입으로 '뭔 장사' 말할 수 있는 장사는 거의 다 해봤다 한다.

 

24살 때 질부가 여경이어서 호명장날 지서 앞에서 만나 찍은 사진이다. 아기를 안고 있는 이가 박호녀.

 

 

마을 부인회에서 선몽대 나들이. 뒷줄 맨 오른쪽이 박호녀(사진제공: 박호녀 며느리 김경순)

 

"보따리 장사할 때 제일 멀리 간 곳이 풍북 괴정이래. 맏딸 업고 보따리 이고 어느 집에 갔는데 점심을 먹고 있었어. 주인 할머니가 ‘새댁이가 아까지 업고 장사하러 왔네. 요즘은 신랑이 군에 가면 다 죽는데 시집가라’며 보따리를 뺏어부래. 마을에 사람도 좋고, 거 가면 배도 안 곯는다고, 어른들 마음씨도 너그러운 집 있는데 권해 주께 그래. 하도 분해서 조밥 주는 거 먹지도 않고 보따리 뺏어가 돌아왔어. 무서워서 벌벌 떨리고 대문을 어떻게 넘고 왔는지도 몰래. 내가 적었기(겪었기) 때문에 다리한테는 마음 아픈 소리 생전 안 해. 지금도 근처에 가면 생각나고 평생 안 잊어 부래."

 

닭계장을 주로 했던 호명우체국 옆 삼오식당. 예비군 훈련을 받으러 오는 사람들에게 국수도 공짜로 삶아
주던 정이 있었던 시절의 박호녀

 

이문만 남기지 말고 베푸는 장사를 해야지

호명면 우체국 옆 도로변에서 있던 집을 잇대어 삼오식당도 한참 운영했던 호녀 할머니.

"옛날엔 사람들이 점잖았어. '아지매 여 술 한 잔 부 주소' 그만 난 그냥 안 있어. 끝까지 거절하면 물러나지. 이 근방에 내 모르는 사람이 없어. 지금도 만나면 아지매 국수 삶아주는 거 먹어가 생전 안 잊어뿐다 그래. 예비군 훈련받으러 오마 배고프다 그만 국수 1관쓱 사다 삶아서 공짜로 멕이고 그랬거든. 내가 너무 고생했기 때문에."

할머니는 장사도 이문만 남기지 말고 베푸는 장사를 해야 한다고 한다. 가게 할 때 하루 일당만큼만 벌면 문 닫아 버리고 집안일을 하거나 밭에 가서 농사를 했다.

 

제일생명 다니던 시절의 박호녀, 46세 생일을 사무실에서 함께 했다.

 

그뿐이 아니다. 마흔여섯에 보험회사에 들어가 십 이년을 다녔다.

"제일생명에 들어갔어. 인제는 회사 이름이 바뀌었어.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어떻게 했나 싶어. 한글도 잘 모르는데 이름 정도는 쓰고 계산은 빠르니까. 일 년 댕기고 안댕길라 카이 또 데릴러오고 해서 십 년이 넘었어."

그 와중에도 고부간의 갈등이 있었던 모양이다.

"내 속 썩은 건 하늘이 알고 땅이 알지. 가장 속 썩은 건 시어머니한테 애문 소리 들었을 때였어. 돈 벌어서 만날 친정에 다 갖다준다고 그랬거든."

그럴 때면 콩팥에 가서 풀을 뽑으며 스트레스를 해소했다. 할머니가 밖에서 일하는 동안 남편은 농사를 지었다.

"다리를 절면서 남의 밭 도지 얻어 서숙 농사지어 조밥도 못 먹고 죽 끓여 먹었어. 없는 살림에 식구 열하나가 먹고 살자니. 혼자 있는 시숙과 그 딸까지 거두었거든. 결혼하드메로 의용군 가서 다쳐 불구자 된 시숙을 평생 데리고 있었어. 6.25 때 인민군에 붙들려 갔다가 섬에서 의용군이 됐어. 못 걸어서 가매에 태워서 데리고 왔어. 겨우 걷기는 걷는데 일도 못해."

시숙모는 그런 남편과 딸을 두고 가버렸다 한다.

"오두막집에 방 한 칸, 부엌 한 칸 그랬지 뭐. 장사해가주 계하고 해서 돈 좀 벌어가주 방 한 칸, 가게 한 칸 해서 우동 장사하고, 좀 더 벌어 가게 딸린 지금 사는 집을 마련했지. 보험회사 그만두고는 농사짓고 누에도 쳤어. 우리 대소가에서도 꼽힜어. 대단타고. 방동댁이 겉으이 없다고. 내가 데면데면이 살았으면 이래 못살아. 아무것이 할배 장개 잘 갔다 소리 마이 들었어. 얘기만 해도 가슴이 답답해."

 

마을회관 가는 길 ⓒ서미숙

 

할머니 별명은 무던이

"마을회관에서 내 별명이 있어, 무던이. 아무리 농담하고 욕하고 싫은 소리 나쁜 소리해도 안 탄해. 항상 웃고 살아. 노인회 사람이 45명인데 입이 전부 각각 지끼잖아. 그 말 다 들으려면 쓸개 있으면 못살아. 쓸개 없이 살아야지."

할머니 덕분에 마을에 따로 사는 큰아들은 농토도 제법 되고 밥은 먹고 산다고 했다. 아침 식사는 집에서 하고 점심 저녁은 경로당에서 주로 드신다. 경로당에서 날마다 함께 식사하는 분이 셋이다.

 

집 앞 평상에는 늘 이웃 할머니들이 모인다. 맨 왼쪽이 박호녀 ⓒ서미숙

 

"내가 고생해 벌었거나 말거나 아들이 넉넉하게 사니까 마음이 넉넉하잖애. 군에서 나온 쌀이 떨어질라그만 아들 시켜서 마을회관에 쌀 한 포 갖다 놓고, 미주 끓이라고 콩을 열닷 대 줘서 삼년 째 그 장 먹고, 고춧가루도 닷 근씩 빻아 놓고, 가을 되면 김치도 큰 통으로 한 통씩 해놓고, 다마네기도 만 원 주고 한 포 사니까 한 포 더 줘서 갖다 놓았고. 내 마음대로는 베푼다고 생각하는데... 우리 할머니가 해주오씬데 진짜 양반이래. 내가 노력해서 다리- 주는 거는 좋아 그고, 그런 거 봐 가주고 내가 그래."

지난날 당신이 어렵게 살아서 할머니는 어려운 사람의 심정을 잘 헤아린다. 단짝인 최상연 할머니가 거들었다.

"치매(마)를 입었으이 여자지요. 남자래. 여군자래."

 

박호녀 할머니 댁의 무화과 ⓒ서미숙

 

 

"별 것 아닌 내 인생도 뭐 얘기가 되나부지? 무화과처럼 그저 열리면 좋지!" ⓒ서미숙

 

무화과처럼 주렁주렁 열린 삶, 이 정도면 됐다

"실제로 내가 많이 아파. 엉치도 아프고 앉았다 일어나면 쩔쩔매야 되고, 허리도 아파서 유모차 없으면 다니지도 못해. 기억력도 자꾸 떨어지고. 돌아서면 잊어버려. 아프다 그마 남이 알아줘요? 아프다 소리 안 해. 남 듣는데 자꾸 아프다 그마 듣기 싫에 그래. 헌디라도 나면 아픈 줄 알지. 남 보기는 말가니까 유식이네 할매는 아픈 데 없는데 뭐 그래."

오로지 아이들 가르치고 배 안 골리기 위해서 열심히 살았다. 낫 놓고 기역자라도 가르치려고.

"지금은 아무 생각이 없어. 후회스러운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거는 다했어. 가난하게 사이께네 남 주고 싶은 거 주고. 가고 싶은 곳도 없고, 먹고 싶은 것도 없고, 냄새도 못 맡은 지 오년 째래.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아무 욕심이 없어. 이제 댕길 때 다 댕겼어. 내 발로 못 댕기면 다 댕긴 거야. 더 살았으면 싶은 생각도 없어. 이제 안 아프고 사다 죽는 거. 그래도 회관에 가보면 구십 넘은 할매도 아이고 저거 먹었으면 좋을 따, 저기 가고 싶다 그러는 사람도 있어."

하도 힘들게 살아서 하나도 생각이 안 난다던 호녀 할머니. 말문이 열리자 조곤조곤 옛이야기가 꼬리를 물었다. 그래도 장사하며 아이들 키울 때가 좋았다고 한다. 그때는 당신 자유로 살았으니까. 절대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했던 호녀 할머니야말로 우리 근대사의 묵묵한 영웅이 아닐까.

호녀 할머니 집 장독대 옆에 무화과나무가 무성하다. 20여 년 전 부산에 사는 딸이 아파서 다녀왔다. 그때 동래에서 한 줄기 얻어와 물에 담갔다가 심었는데 잘 살았다고 한다. 할머니의 삶도 그렇다. 비록 젊은 시절에 활짝 꽃피우지는 못했지만, 할머니 노력이 헛되지 않아 무화과처럼 주렁주렁 결실을 맺었다. 그 열매는 후손들이 거두게 될지언정.

"이찌지꾸가 일본 물견이래. 꽃 안 피고 바로 열매 달려. 여기는 생전 구경 못했는데 처음 봤어. 내가 가져와서 이 동네에 퍼뜨렸어. 이제 다 지꼈어. 이상 무."(글/ 서미숙 doragiseo@hanmail.net)

 

서미숙
2019-08-29 오후 4:4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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