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ㆍ예천 교류와 상생의 근대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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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ㆍ예천 교류와 상생의 근대기행

[우리 마을 이야기] 향교골 명륜동 이야기
안동시공동기획연재] 2019 안동·예천 근대기행(7)

  • 신준영
  • 2020-01-21 오전 11:51:39
  • 2,932

- 사람을 밝히는 동네 명륜동
- 상가와 주택으로 형성된 작은 마을

 

2019년 안동예천 근대기행은 생생한 르포취재를 통해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궤적을 다룬 <구술생애사>와 안동과 예천 두 지역의 역사와 문화, 생활사의 근간이 되는 ‘마을’을 테마로 한 <우리 마을 이야기>를 그려낼 예정입니다. 두 번째 <우리 마을 이야기>는 향교골 안동시 명륜동입니다. -편집자

 

1. 1990년~1996년

1990년 2월 4일 일요일, 흐리고 약간의 비

차에 몇 가지 짐을 싣고 오는 내내 불안에 휩싸였다. 곧 새 생활이 시작 될 테니까. 명륜동 338-28번지 1통 4반. 자취할 집은 아주 작고 초라하다. 엄마는 어쩌다 이런 집을 찾아냈을까… 주인은 할아버지 할머니 내외이시고 안동여고 3학년인 언니 두 명과 중학교에 입학하게 될 남자애 한 명이 이 집 별채에 살고 있다. 세 명은 한 방을 쓴다. 동생과 내가 있을 방은 집의 규모에 비하면 큰 편이다. 새 장판이 깔려져 있고 도배지 여섯 롤이 구석에 세워져 있다. 책상과 찬장, 옷장은 내일 사기로 했다. 내일 엄마와 동생이 가버리고 나면 얼마간은 나 혼자 남게 된다. 낯선 학교와 아이들, 처음 해보는 자취 생활, 모든 것이 두렵고 불안하다. 얼른 토요일이 오고 봄방학이 왔으면….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

1990년 2월 5일 월요일

새벽에 여러 번 깨었다가 잠들었다. 결국 6시 30분에 일어났다. 연탄불이 꺼져서 집 앞 구멍가게에 가서 번개탄을 사왔다. 겨우 불을 살리고 걸어서 시내로 나가보았다. 우연히 경안고등학교에 다니는 친구 도철이를 만났다. 경안여자상업고등학교에 다니는 현주도 보고 숙자 언니도 보았다. 어쩌면 안동이란 곳이 생각만큼 낯설지만은 않은 곳일지도 모르겠다. 9시 넘어서 새로 맞춘 교복을 입고 엄마와 함께 전학 하는 학교로 갔다. 학교는 시내를 조금 벗어난 언덕에 자리하고 있었다. 개학날이라서 아이들은 모두 청소를 하고 있었다. 담임선생님께 인사만 드리고 다시 명륜동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영경이와 함께 동생을 버스터미널까지 걸어서 바래다 주었다.

 

그 옛날의 자취방 ⓒ신준영

 

고등학교 1학년을 마칠 즈음 의성에서 안동으로 전학을 했다. 이전에도 가끔 안동에 올 기회는 있었다. 시내 중심가의 아디다스, 나이키 대리점에서 운동화나 양말을 사 신기도 하고 맘모스 제과점, 코끼리 분식점, 스쿨서점, 교학사, 삼방사에 들러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짐을 싸들고 살러 온다는 것은, 그것도 내가 나의 보호자가 되어서 낯선 방, 낯선 사람들에게 나를 부리워 와야 한다는 것은 상당한 두려움과 불안이 따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명륜동과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명륜동(明倫洞)은 안동시청과 대구교육대학교 안동부설초등학교, 국도 35호선인 퇴계로를 따라 형성된 상가들, 그리고 그 사이의 주택들로 구성된 작은 동네다. 1931년 4월 1일 안동읍제 실시에 따라 안막동의 일부를 분할해 이곳에 있던 안동향교의 강당인 명륜당의 이름을 따서 향교골, 즉 명륜정 1정목이라고 했다. 1947년에는 일본식 동명 변경에 따라 명륜동으로 개칭하였는데 향교가 있던 자리는 명륜동 344번지로 안동의 대표적인 명당자리로 유명하다.

안동향교는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는데 당시 대부분의 문서도 함께 분실되어 정확한 연원은 알 수 없지만 1361년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으로 몽진했을 때 '복주향교에 봉안'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그 즈음으로 추정한다. 1983년 향교복설추진위원회가 발족되어 송천동에 터를 잡아 1986년 중건하였다. 안동의 교육기관 거의가 이 향교 터에서 문을 열었다. 1933년 안동공립농림학교 설립을 시작으로 1942년 5월에는 4년제 안동공립고등여학교를 설립하여 같은 해 10월에 옥야동으로 교사를 신축, 이전하였는데 이는 안동여자중학교와 안동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이다.

1947년 7월에는 안동사범학교가 설립되었고 1962년 3월에는 도립 안동농업초급대학으로 개편 되었다가 1965년 3월에 안동교육대학으로 다시 개편되었다. 안동교육대학은 1978년 2월에 국립 안동초급대학으로 개편되었고 1979년 3월에 다시 4년제 국립 안동대학교로 승격되었다. 1983년 2월에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같은 해 3월에 송천동으로 이전하였다. 1991년 안동시청이 이 자리에 청사를 지었다. 2019년에는 안동시의회 건물이 신축되었다.

 

현재의 안동시청 ⓒ신준영

 

 

현재의 안동시청 ⓒ신준영

 

 

안동시청 앞 표지판에 안내된 지도

 

명륜동에서 1990년 2월부터 1996년 늦가을 까지 6년여를 살았다. 이후로는 한 번도 찾아간 적이 없었던 그 골목, 그 집, 그 방은 대신 가끔 꿈에 나타났다. 지난 달력을 정갈하게 찢어서 그 달의 공과금을 적어주시던 주인 할아버지의 섬세한 손과 그보다 연상이었던 피부가 곱던 할머니, 방주인이 자주 바뀌던 별채와 토마토가 익어가던 마당의 텃밭, 바지랑대를 높이 세우던 빨랫줄, 마룻장을 들어내야 나타나던 연탄아궁이, 수시로 창호지를 뚫고 들어와 머리맡에 앉던 달빛과 알 수 없는 그림자들.

연탄 냄새와 응달 냄새로 깊고 서늘한 골목을 통과해야 그 집에 닿을 수 있었다. 골목을 통과하는 동안 세 채의 집을 지나가야 하는데 마지막 집에는 학교에 다니지 않아 보이는 내 또래의 여자 아이를 비롯해 여럿의 형제가 늘 큰 소리를 냈다. 다투는 듯도 보였고 어쩌면 늘 그렇게 크게 말하는 습관이 있는 듯 보이기도 했다. 그 집 앞엔 대용량 토마토케첩과 식용유가 툇마루 위에 쌓여 있었다. 어느 날은 다른 동네에서 개조한 손수레에서 핫도그를 팔고 있는 그 집 식구들을 본 적이 있다. 잘 아는 얼굴이었지만 아는 척 할 수 없었다. 서로가 그랬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주변에는 중학교 동창 여럿이 자취를 하고 있었다. 당시엔 경안여자상업고등학교가 아직 신안동에 있을 때였고 경일고등학교와 길원여자고등학교도 명륜동에서 가까웠다. 친구들과 선후배들을 길에서 자주 마주치곤 했다. 자취방 사정들은 대동소이했다. 방 한 칸에 간이 부엌이 딸린 정도였고 화장실은 외따로 떨어진 공용 화장실이었다. 중학교 때 체육선생님이 안동으로 전근 와 계셨는데 선생님의 자취방도 신안동 산 위에 줄줄이 늘어선 집들 중에 하나거나 명륜동의 대로변 상가에 딸린 작은 방 한 칸이거나 그랬으니까.

아침이면 얼굴이 뽀얀 아이들이 노란 모자를 쓰고 남색 체육복을 입고 언덕을 올랐다. 명륜동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대구교육대학교 안동부속국민학교 학생들이었다. 아이들의 손엔 악기가 들려 있곤 했다. 대구교육대학교 안동부설초등학교는 1956년 4월 1일에 안동사범학교 부속국민학교로 개교했다. 1966년 3월 1일에는 안동교육대학 부속국민학교로 개교했으며 1978년 3월 1일에는 다시 대구교육대학교 안동부속구민학교로 개칭했다. 2001년 3월 2일에 대구교육대학교 안동부설초등학교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른다.

2. 1956년~1968년

안동사범병설부속국민학교와 안동사범병설중학교, 안동교육대학 출신 권부옥(1947년생)

"중앙국민학교에 다니다가 안동사범병설부속국민학교가 신설되면서 그리로 옮겼어요. 시험을 봐서 들어간 거 같아요. 당시에 교육에 관심을 가진 부모들이 아이들을 부속국민학교에 보냈어요. 우리 집도 그랬지만 돈이 있어서 보낸 건 아니에요. 새로 생기는 학교니 교육적으로 우수한 학교일 거라는 기대가 있었지요. 우리 집이 신안동에 있어서 학교 다니기도 편하고 그래서 그랬는지 3학년 때 학교를 옮겼어요.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던 기억, 서후까지 송충이 잡으러 걸어간 기억이 있어요. 그날은 하루 종일 수업도 없이 송충이를 잡았어요. 쥐 잡은 증거로 쥐꼬리도 잡아오라 그러고 했던 시절이니까. 1960년 2월에 내가 2회로 졸업했어요. 그리고 그 친구들이 대게 그대로 안동사범병설중학교에 입학했어요. 내가 13회인데 안동사범학교가 없어지니까 안동사범병설중학교도 2학년 때 없어졌어요. 그래서 우리는 공부는 거기서 하면서도 안동중학교 졸업장을 받았지. 남녀공학만 다니다가 안동여고에 들어갔는데 여자학교에 적응이 잘 안되더라고요.(웃음) 그러다가 안동교육대학이 생겨서 시험 쳐서 들어갔어요. 1968년에 졸업해서 첫 발령을 와룡 이하 문청국민학교로 받았지. 시내서 와룡까지 기차로 통근했어요."

 

안동교육대학 교정

 

3. 1974년~1976년

안동교육대학 졸업생 장국수(1956년생)

"1974년 3월 5일 입학해서 1976년 2월 16일 졸업했어요. 12회가 마지막 졸업생인데 내가 10회야. 한 학년에 우리는 300명, 위는 400명, 우리 아래는 200명. 지금 안동시청 본관 자리에 학교 건물이 있었어요. 나는 학도 호국단을 했는데 당시는 교원이 부족할 때라서 교육대학에 들어가면 군에 안가고 학교 다니면서 소정의 군사 훈련을 받는 것으로 군에 가는 걸 갈음을 해주지. 여름 방학 때 36사단에 가서 1학년 때 3주, 2학년 때 3주 교육을 받고 하사 계급장을 받아요. 의무적으로 학교에 5년간 근무를 해야 해요. 만약 근무를 안 하면 다시 군에 가야했어요."

 

안동교육대학 교정

 

 

안동교육대학 교정

 

 

학생군사교육단 수료증

 

 

1976년 안동교육대학 제10회 졸업기념 앨범의 첫 장과 기념사진

 

"당시에 전공반이 10개 반이었는데 반 별 30명씩 300명이야. 도덕교육연구반, 국어교육연구반, 사회교육연구반, 산수교육연구반, 자연교육연구반, 체육·무용교육연구반, 음악교육연구반, 미술교육연구반, 실과교육연구반, 초등교육연구반 이렇게 열 개 반이지요. 남녀 비율은 남자가 180명, 여자가 120명쯤 된 거 같아요. 나는 체육·무용교육연구반이었어요. 음악반은 아무래도 악기를 잘 다루고 체육반은 달리기나 기계체조 같은 운동을 잘하고. 나는 기계체조를 했어요. 미술반은 그림에 소질이 있었겠지요. 학교 뒤에 연못이 있었어요. 그 앞에서 그림도 많이 그리고 했어."

 

교내 체육대회

 

 

교내 체육대회. 뒤로 시내 전경이 보인다.

 

 

체육연구반 활동

 

"학교 가서 입학시험을 쳤어요. 면접 볼 때 음치는 아닌지, 피아노는 칠 수 있는지 신체검사도 하고. 당시 교문은 지금 시청 입구 그대로예요. 동아리 연구 활동, 문학의 밤, 시낭송, 작품 활동, 대학축제인 명륜제도 생각이 나고. 명륜제 때는 반 대표로 노래자랑에 나가서 2등인가 한 기억이 있어요. '춘향아 울지 마라'하는 노랜데 제목이 기억이 안 나네."

 

학교에 가서 입학시험을 치렀다.

 

 

입학시험

 

 

1974년 입학식

 

"농촌 봉사활동도 청송 어느 산골로 나간 기억이 있어요. 전국교대체육대회에 체조 선수로 출전도 했어요. 학교 다니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그림 과제였는데 일주일에 8절지에 두 장씩 의무적으로 그려 내야 했어요. 잘못 그리면 '불가' 판정이 나요. 나는 그림 실력이 없어서 졸업하는데 애를 먹었어요. 풍금도 애국가 4절을 4부로 쳐야 됐고. 우리 안동교육대학이 우수한 점은 현장에 나가면 아이들을 좀 더 잘 교수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 예체능 쪽에 상당한 비중을 두고 교육 시켰다는 거예요. 팔방미인이 되도록 말이죠."

 

체육회 활동

 

 

mbc에서 실황중계했던 교내 음악대회

 

 

1974년 3월 21일 명륜체육대회 행사 후 뒤풀이 중인 학생들

 

 

RNTC 군사훈련

 

 

청송으로 갔던 농촌봉사활동

 

"당시에 학교 주변 모습을 떠올려보면 북문시장은 형성이 되어 있었는데 학교 주변에 가게는 흔하지 않았어요. 구내식당이 있었고 둘레둘레 자취생들이 많았어요. 지금은 복개됐지만 신안동에서 내려오는 큰 도랑이 있어서 건너 다녔어요. 안동의료원 뒤쪽 북문동에 특히 자취생들이 많았어요. 나는 학교 수업만 열심히 듣고 다녀서 대학 문화라든가 기억에 남을 만한 일이 별로 없어요(웃음). 학교 졸업하고 첫 부임지는 의성 안평면의 도옥초등학교예요. 지금의 시청 옛 자리에 안동교육대학이 있어서 많은 교사가 배출이 된 까닭에 우리나라 인재 배출에 큰 역할을 했다고 봐요."

 

졸업사진

 

 

졸업증서

 

 

졸업앨범 편집위원

 

4. 1995년~2019년 현재, 2차선 도로와 4차선 도로 사이

명륜주유소, 대신종합건설 김명자(1954년생)

 

김명자 ⓒ신준영

 

 

명륜주유소 ⓒ신준영

 

"옥야동 영호초등학교 후문 근처에 살다가 1995년 1월 15일에 명륜동으로 이사 왔어요. 옥야동 살던 어느 날 남편에게 외식을 하자고 졸라서 웅부공원 옆 선미식당에서 국수를 먹었어요. 그러고 나서 시청 근처로 구경 가자고 또 졸랐지. 시청 앞 어디쯤에 서서 저 건너에 보이는 저 집이 매물로 나왔다는데… 하고 남편에게 넌지시 얘기했어요. 안풍기계 사장 집이었어요. 남편이 그 집이 안동 부잣집인데 좋지 안 좋나? 하더라고요.(웃음) 그래서 그 집을 사서 이사를 하게 됐지요. 문 열어놓고 수리할 적에 사람들이 안이 어떤가 하고 구경을 할 정도로 튼튼하게 잘 지은 집이었어요. 밖에서 보면 2층인데 안에 들어가면 4층이었어요."

 

1997년경 명륜주유소 짓기 전 주택에서

 

 

뒤로 보이는 대문이 1999년에 도로에 편입되었다.

 

"명륜주유소 건물이 있는 여기가 일제강점기 때는 사방관리소가 있던 자리예요. 사방관리소 사무실을 리모델링해서 검도장으로도 쓰다가 잠시 태평양 횟집이 들어오기도 했고. 또 여기에 안전카서비스센터가 있었어요. 지금 우리 집 옆에 있는 새마을금고까지가 사방관리소가 있던 자리예요. 1999년경 집 앞 도로가 2차선에서 4차선으로 확장 되면서 도로변 상가들이 뜯어지고 없어지고 신축되고 했어요. 4차선이 되면서 거리가 완전히 바뀌었지요. 우리도 한 100여 평이 도로에 편입됐어요. 도로 확장 되면서 대문이 편입이 됐거든요. 그래서 안전카센터를 사서 대문을 옆으로 돌렸어요. 2000년도에는 검도장 자리에 태평양 횟집이 잠시 들어섰을 땐데 그 집도 그때 샀어요. 2002년에서 2003년에 걸쳐서 명륜주유소 건물을 준공 했고요. 네 필지 전체가 사방관리소 자리였지요."

 

사방관리소가 있던 자리에 명륜주유소와 명륜새마을금고가 들어섰다.

 

 

2003년 명륜주유소 개업 안내장

 

"지금 동물병원 자리에 대우전파사가 있었는데 건물을 지어서 옮겨갔어요. 그게 지금의 대우철물, 대우공구예요. 그 아래에 북문세탁소가 있었고 교대(시청) 앞쪽은 주산학원, 고려지업사 옆에 영화장품, 명륜문구사, 금홍문구사, 수산낚시, 한양미용실, 북문유리점 등이 있었지요. 정일목욕탕은 우리 이사 온 후에 지었어요. 북문마트도 우리 오고 나서 지었고. 우리가 주유소를 연 이유는 우선 주변에 주유소가 없었고 만약에 자식들이 물려받게 된다면 주유소 마당이라도 쓸고 기름이라도 넣으면서 노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 했어요. 또 기름은 썩지 않으니 재고가 생겨도 문제없다 생각해서 주유소를 개업한 거지요. 처음 6개월은 제가 직접 운영해봤는데 그것 참 어렵더라고요. 당시에는 카드도 안 쓰던 때라 달로 외상을 끊어 줬어요. 학원이고 어디고 거래처 텄다고 좋아했는데 수금하러 가면 폐업하기도 하고 번호판 떼 가라 하기도 하고. 어려워서 손들고 세를 줬어요. 아무나 하는 거 아니더라고요."

 

명륜동 전경 ⓒ신준영

 

 

명륜동 전경. 왼쪽으로 신축한 안동시의회 건물이 보인다. ⓒ신준영

 

"처음 이사 와서 보니 도로변 좌우로 상가들이 쭉 늘어서 있었어요. 남의 동네에 살러 왔으니 여기 사람들과 섞여야지 하고 마음먹고 있는데 이웃에서 나보고 모임에 나오라고 해서 나갔어요. 원래 있던 모임인데 내가 나가서 이름을 ‘숙녀회’라고 지었어요. 지금은 일곱 여덟 명 남았어요. 그때 모임에 한양미용실, 북문세탁소, 민정칼라, 대우전기, 성희미용실, 영화장품, 고려지업사, 수산낚시, 북문시장 안 떡방앗간집 등 스물 세집이 있었어요. 매달 한 번씩 모였어요. 나이 많은 사람, 젊은 사람 한데 섞여 있었어요. 그때는 매월 만원씩 모았는데 지금은 이만 원씩 모아요. 한 달에 한 번씩 모여서 밥도 먹고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여행도 가는데 중국 장가계도 갔다 왔어요. 이름이 정확히 '명륜동 숙녀회'지요. 매월 25일에 모여요. 각자 집에 잔치 있으면 서로 부조하고 오고 가면서 정을 내요. 처음 이사 왔을 때는 옛날 거리 모습 그대로였어요. 1999년에 도로 확장 되면서 이사도 많이 가고 모습이 바뀌었지요."

 

명륜동 전경. ⓒ신준영

 

 

명륜동 전경. 멀리 목성동성당과 법상 상일아파트 등이 보인다. ⓒ신준영

 

5. 1983년~2019년 현재, 명륜동 숙녀회

고려지업사 김현숙(1959년생), 김재택(1958년생)

 

고려지업사 김현숙 ⓒ신준영

 

 

고려지업사 김재택 ⓒ신준영

 

"남편(김재택)은 1980년부터 도로 건너 지금의 동물병원 자리에서 고려지업사를 운영했어요. 1983년 결혼할 때부터 여기서 살았고요. 1999년에 도로가 2차선에서 4차선으로 변경되면서 2000년도에 이 건물을 지어서 이사를 왔어요. 장안카메라가 옆집이었는데 카메라 대여도 하고 그랬어요. 영화장품 할인코너도 옆에 있었고요. 맞은편 효성이발관 옆에 초대 시의원을 지낸 안상하 씨가 하던 북문세탁소가 있었어요. 그분은 명륜마을금고 이사장도 역임 했고요."

 

1985년 무렵 고려지업사 부근

 

 

1985년 무렵 고려지업사 부근

 

 

1985년 무렵 고려지업사 부근

 

"숙녀회에서 중국 장가계도 가고 울릉도도 가고 제주도도 가고 했어요. 참 재밌었지요. 2011년 10월 6일 중국 장가계 단체 사진에 회원들이 쭉 있어요. 건어물 가게인 진보상회 옥순희, 효성이발관 건물주인 이미옥, 대왕수퍼 박춘선, 영화장품 이준필, 고려지업사 김현숙, 민정칼라 송종숙, 화장지와 세제를 취급하던 길도상사 임종길, 수산낚시 박옥남, 한양미용실 권순옥, 명륜주유소 김명자 모두 들어있네요. 내가 이 모임 총무라서 이름을 다 기억해요. 명륜동 모임은 1990년경부터 시작됐어요. 35호선 도로를 따라 올라가며 양쪽 가게 주인들이 회원이고요. 제주도 갔을 때 사진에는 대우전파사 신혜숙, 북문시장 안 떡방앗간 하나 엄마, 영화장품 이준필, 이미옥, 진보상회 옥순희, 민정칼라 송종식, 중대장 부인, 박미경, 새성희미용실 박성자, 대왕수퍼 박춘선, 수산낚시 박옥남, 북문세탁소, 길도상사 임종길. 고려지업사 김현숙 이렇게 다 들어있네요. 이때만 해도 아가씨 같지요.(웃음)"

 

명륜동 숙녀회에서 간 중국 장가계

 

 

명륜주유소 김명자(왼쪽), 고려지업사 김현숙 ⓒ신준영

 

"상가 말고 주변 한옥들 중에는 하숙집이나 자취방들이 많았어요. 경안여상이 이 근처에 있을 때니까. 지금은 손자 손녀도 있는데 이 사진 속 우리 아이들보다 손자 손녀가 더 커요. 아들은 1984년생, 딸이 1986년생인데 당시 집 밖에서 노는 모습을 이렇게라도 찍어놔서 거리 모습이 남아있네요."

 

1980년대 중반 고려지업사 부근

 

 

1980년대 중반 고려지업사 부근

 

 

1980년대 중반 고려지업사 부근

 

 

1980년대 중반 고려지업사 부근

 

6. 2019년 현재

해결되지 않는 빚진 마음이 발길을 옮기게 했다. 오래 앓아온 막연한 서러움과 그리움의 정체를 알 것도 같았다. 외따로 희미한 별처럼 가족에게서 분리되어 나왔던 최초의 공간과 시간이 머무는 곳, 명륜동은 내게 그런 곳이다. 응달의 온도와 냄새를 알게 했고 그 길 끝에 몸을 웅크려 세상을 향한 도약을 준비하던 작은 방 한 칸이 풀잎으로 엮은 둥지처럼 숨겨져 있던 곳. 그 안에서 음악을 듣고 편지를 쓰고 글을 읽었다.

명륜동은 변한 거 같지 않지만 골목골목 돌아보면 참 많이 변했다. 암호처럼 날아오는 삐삐 문자에 답하기 위해 줄 서서 기다리던 공중전화 앞 구멍가게에는 원룸 건물이 들어섰다. 대나무 깃발이 높이 솟아있던 어느 집 마당에는 대신 태극기가 펄럭인다. 피아노 소리가 들려오던 언덕 위의 집은 카페로 변신했다. 언덕도 사람과 같아서 시간이 쌓일수록 키를 낮추는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 즈음 자취방이 있던 그 골목 앞에 섰다.

 

시간이 멈춘 듯 골목은 그대로다. ⓒ신준영

 

그 시절 골목 입구에서 치르던 나만의 의식을 생각해냈다. 바라는 것이 있으면 반대의 결과를 먼저 떠올리는 것, 가령 기다리는 편지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는 식의. 할머니 할아버지는 돌아가셨겠지, 살아계신다면 백 살은 넘으셨을 테니까. 그 집은 대문이 닫혀 있거나 허물어지고 없겠지, 하고 생각하며 나름의 의식을 치렀다. 의식을 치르고 나면 예측했던 결과가 나왔을 때 실망하는 마음이 덜하다. 물론 그 반대의 결과가 나오면 행운을 얻은 듯 기쁨 또한 더한 것이 된다. 시간이 멈춘 듯 골목은 그대로였다. 녹이 슨 녹색 대문은 굳게 닫혀져 있었다. 그 때 어디선가 본 듯한 남자가 툇마루가 있던 그 집에서 나와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이세요? 아, 옛날 주인은 다 돌아가셨죠. 집도 팔렸는데 지금은 아무도 안 살아요. 빈집이에요."

남자의 집 안에서 개가 사납게 짖는다.

들어갈 땐 몰랐는데 나올 때 보니 개 짖는 집 옆집은 불탄 흔적 그대로 안이 훤히 드러난 채 비어있다. 하얀 레이스 커튼만이 멀쩡한 채로 유리문 안쪽에 조용히 걸려있을 뿐. (글/ 신준영 5longgole@hanmail.net)

 

   
신준영
2020-01-21 오전 11:5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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