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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리 드로잉⑨- 안동 와룡의 정미소

  • 김상년(서예가)
  • 2021-08-26 오전 11:35:22
  • 1,793

 

쌀을 쓿다, 삶을 쓿다

 

19세기의 근대화는 사회 전반에 많은 변화와 영향을 가져왔다.

1920년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량공급기지로 만들기 위해 강제 추진한 산미증식계획은

농촌의 기계화에 영향을 미쳤고,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 정미소이다. 정미소 이전에는 방앗간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방아는 작동 원리에 따라 디딜방아, 연자방아, 물레방아, 퉁방아 등으로 나눌 수 있으며

디딜방아는 사람의 힘으로, 연자방아는 짐승의 힘으로, 물레방아와 퉁방아는 물의 힘을 이용하였다

지금의 방앗간은 떡을 만들거나 기름을 짜는 등 기존 정미소들의 역할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정미精米는 ‘쌀을 쓿다’는 뜻으로 타작한 벼의 껍질을 벗기거나 곡식을 찧는 도정搗精과 같은 말로 쓰이기도 한다.

정미, 도정소가 현대에는 미곡종합처리장(RPC)으로 통칭되어

현미기, 현미분리기, 정미기, 계량기 등 일련의 기계를 갖추고

건조, 저장, 포장에 이르는 전 과정을 자동화한 시설로 변모하였다.

 

 

 ▲ 복주정미소 ⓒ김상년               

 

정미소 살라이껴? 복주정미소

 

복주정미소는 와룡면에 들어서는 초입이자 안막동 끝자락에서 70여 년을 지켜온 정미소이다.

후대에 넘겨줄 일이 없어 팔거나 폐업 할 작정이라며 사무실 소파에 와룡처럼 누운 여소장이

“정미소 살라이껴?”라며 인사를 건넸다.

“아니요”라고 하니 “난 또 정미소 사러 온 동 알았지”라며 파안대소破顔大笑하였다.

행색이 남루한 나에게 정미소 팔 생각을 한 것을 보면 조급한 마음이 탄로 났거나, 찾아오는 이 없는 무료한 일상에 던지는 농弄이었을 것이다. 얼마 전 여소장한테 정미소를 넘겼다는 백발의 전前 소장에게 정미소가 멀쩡한데 왜 팔려 하냐고 하니 쌀이 커피 한잔보다 싼 시절인데 돈이 되겠냐며 한 호흡 훔치더니 ‘쌀을 찧는다는 게 머리를 찧어 다친 기억밖에 없다’며 사무 실 밖으로 나가 담배에 불을 당겼다.

 

 

   ▲ 태동정미소 ⓒ김상년          

 

 아버지 쌀 팔았어요, 와룡태동정미소

 

1968년 12월에 건립해 3대를 이어 운영 중인 와룡태동정미소는 와룡면소재지에 위치하고 있다. 정미소 입구에 들어서자 한 노부부가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와 쌀값을 흥정하고 있었다. 시골 정미소에서 젊은 사람이 일을 하고 있는 모습에 의아해하며 사무실 문을 열었다. 사장으로 보이는 분과 인사를 나누는 사이 젊은 일꾼이 사무실에 들어와 책상 의자에 걸터앉으며 “아버지 쌀 팔았어요”라고 한다.

할아버지를 이어 2대와 3대가 함께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가슴 한 켠이 훈훈해졌다. 정미소 일은 오랜 세월 같은 일을 거듭 해온 터라 특별히 기억될 만한 것이 없고, 우연히 방송국에서 촬영을 와서 크게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고 하시며 아들이 가업을 이어 정미소를 잘 운영해주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라고 하였다.

 

 

    ▲ 와룡정미소 ⓒ김상년          

귀향 후 구비한 지게차, 와룡정미소

 

와룡정미소는 2008년에 개소한 1인 기업형태의 정미소이다.

개업 초창기에는 지게차도 없고 건조기가 보급되지 않아 작은 포대로 일일이 담아 옮기며 일을 하다 보니 너무 힘이들어 잠시 객지에 나가 생활하다가 다시 들어왔다고 한다. 귀향 후 마을 단위로 한 대씩 보급된 건조기와 대형마대를 옮길 수 있는 지게차를 구비하여 현재에는 수월하게 일을 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 주계정미소 ⓒ김상년          

한 시절 분주하게 돌아갔을 주계정미소

 

와룡정미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주계정미소는 정미소를 지키는 사나운 개 한 마리와 굳게 잠긴 문사이로 보이는 도정기뿐이었다. 정미소 옆을 돌아 도정기들이 잘 보이는 틈새로 자세히 살펴보니 복잡하게 얽힌 기기들이 뽀얀 먼지를 덮고 있었다. 아직 녹슬지는 않은 것으로 보아 운영을 중단한지는 오래되지 않은 듯하였다.

한 시절 분주하게 돌아갔을 정미소를 뒤로 하고 감애정미소로 향했다.

 

 

 ▲ 감애정미소 ⓒ김상년          

문화재 등재가 코앞이었는데, 감애정미소

 

기계를 돌리다 나온 가냘픈 여소장은 여러 기관에서 일 년에 두어 번씩 정미소를 찾아와 문화재로 등재시켜주겠다며 사진을 찍어 갔다는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3대째 이어오는 감애정미소는 몸이 불편해진 아버지를 대신해 서울에서 생활하던 아들이 내려와 9년째 운영 중이라고 하였다.

옛 구옥의 서까래 사이로 복잡한 도정기들이 얽히고설켜 있었지만 정미기에 문외한인 필자가 보기에도 정확한 구도와 체계가 엿보였다. 정미소의 뼈대를 올린지 67년 만에 정부보조금을 받아 정미소의 틀을 다시 잡으려 하였으나 무마되었다며 푸념 아닌 푸념을 하고는 도정기 사이로 몸을 감추었다.

 

와룡면과 인근에 위치한 정미소들의 수와 규모는 그곳에서 생산되는 곡류들의 양과 비례한다 할 수 있다.

긴 시간 공들여 가꾼 작물들을 싣고 정미소로 향하는 농사꾼의 마음과 그것을 받아 도정하는 도정꾼의 마음은 틀리지 않았을 것이다. 정미소를 찾아 와룡을 둘러본 짧은 기행은 작게나마 그들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시간이 되었다.

김상년(서예가)
2021-08-26 오전 11:3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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