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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생애사 “우야든동 산다”-때를 못 만난 탁오출 할매

  • 서미숙(작가)
  • 2021-05-25 오후 5:51:08
  • 1,924

때를 못 만난 탁오출 할매

 

여기 아흔 넘은 할매가 있다. 일본군 위안부로 군용 트럭에 실려 가다 코스모스 더미에 몸을 던져 운명을 바꾼 여인.

다시 끌려가지 않으려 열다섯에 비녀 찌르고 급히 시집을 갔다.

좌익 활동으로 가정을 돌보지 않은 첫 번째 남편과 헤어지고 지금의 영감님을 만났다.

영감님이랑 만나기 전에 혼인신고도 하지 않았으니 ‘요새 사람 치면 바람 한 번 피운 거’로 퉁 치자는 할매.

그렇게 한 결혼도 인물 하나 보고 해서 삶은 평탄치 않았다.

근현대사의 파고 속에서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고 살아왔던 할매는 ‘굴신을 못하면 스스로 요양원에 가 삶을 마감하겠다’고 한다.

때론 해석하기 어렵고 때론 미루어 짐작해야 할지도 모르겠으나 할매의 생생한 입말을 그대로 살려 싣는다. _편집자

 

 ▲탁오출 할매(ⓒ서미숙)

 

탁오출(91세)은 안동시 길안면 구수에서 태어났다. 광산 탁씨 집안에 칠 남매 중 다섯째라 오출五出이다. 집에서 부르는 이름은 ‘재호’다. 있을 재在, 호경 호鎬, 여자 이름 획수 많으면 좋다고 글사장이 지은 이름이다. 아버지는 탁형만이다. 열세 살에 아버지 돌아가시고 오빠 밑에서 자랐다. 안타깝게도 어머니 이름을 모른다. 이름 덕에 먹고 산다 했는데 끝내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택호는 춘산댁이다. 영감님 전처가 춘산댁이라 상처한 후 후처로 와서 그대로 부르게 되었다.

할매는 너무 힘들게 살아서 행복한 기억이 없다고 한다. 그래도 어릴 적에는 남동생 청했다고 아버지한테 사랑받고 자랐다. 시대를 잘못 만나 꼬여버린 탁오출 할매의 한 많은 사연을 밤이 이슥토록 청해 들었다.

 

‘마쓰야마 사이호’라 불리던 시절

그때는 우리 마을에 딸아가 많아도 학교 가 니는 몇 안 된다. 세라복 입고 학교 가는 아-들이 불버. 아이 셋이 학교에 다니면 한 명은 월사금 안 내던 시절이랬어. 열두 살에 길안 소학교에 입학해서 조카들과 같이 댕기며 학교 맛만 봤지 뭐. 그래도 올케는 아 안 업어주고 학교 간다고 실룩거렸다. 제 나이에 들어간 옥이, 순이는 끝까지 다했고. 학교 가는 길은 집에서 십리 길이래. 짚신도 신고 게다도 신고 자갈밭을 걸어 재를 넘어 댕겼어.

 

한국 선생이지만 이름이 ‘하로시’였어. 나는 ‘미쓰야마 사이호’, 덩치가 커서 친구들이 니가 선생하라고 그랬다. 2학년이 되자 방위라며 딴 방에 빼내가 며칠을 갈채능게라. 거는 학교에 안 댕기는 딸아-들도 섞여 있어. 교실에서 배우던 거 하고는 달라. 숫자 맞추기도 하고 다른 걸 갈채드라고.

어느 날 꺼먼 군용 도락구(트럭)를 갖다 대. 앞에 탔는데 싣는 거 보이 수상해. 한 머리 싣느라 정신이 없어. 가마이 살피다가 근처에 있는 코스모스 더미에 뛰내려 부랬어. 달리다 보니 신발도 잃어버렸고 맨발로 울퉁불퉁한 재를 넘었어. 양고개 재를 넘어가면 되는데 붙잡힐까 봐 평소에 댕기던 길로 안가고 용계로 가서 산을 타고 구수 2동 남촌 집으로 왔지.

 

동상 안죽 어리재, 오빠 혼자 가지고 아부지도 없고 농사는 많이 짓고 하는데. 올캐 속사 징징거리재. 클났다 어야꼬 카고 있는데, 우리 고종사촌이 길안장에 댕겼어. 위가(외가)라고 들와 보이 우리 어매가 한숨을 쉬고 그카는 게라.

“아들 잃아뿌마 딸아 다섯이 다 죽어도 아들 하나마못한데 기집아 때문에 그라마 어예데노. 위숙모 그카지 마고 비네(비녀) 질내라, 비네 질내라, 단발머린데 비네 질내면(지르면) 안 잡아간다.” 보국대 가면 피 뺀다는 동 이불 밑에 여 놓고 발 만져보고 데리고 간다는 동 뭐 별소리를 다 해, 우리 엄마는 밥도 굶고 정신이 없다.

밤에 겁이 나서 잠도 못자. 우리 집이 여(여섯)칸 접집이랬어. 방이 네 개고 사랑 툇마루 있고 복판에 온 칸 마루가 큰 게 있어. 덩그렇게 져 놨는데 돌 디딤돌 놔 놓고 마루 밑에 아름드리 낭구(나무)로 기둥을 해 놨어. 그걸 끌어안고 숨어 있으이 마루 밑에 쥐 빈대가 많아 온몸이물려서 가렵고 벌겋게 부풀어 올라. 이틀 후에 금테 두른 순사들이 찾으러 와서 딸 내놓으라고 난리를 치는 게래. 딸 안 내놓으마 오빠를 보국대 끌고 가겠다고 날마다 협박을 해. 올케는 시누이 때문에 신랑 죽게 생겼다고 울고, 궁리 끝에 이웃 마을로 시집가서 해산한 셋째 언니 옆에 누워있었어. 금줄을 쳐놓은 집에는 일본 순사도 안 갈 때였으니까. 시집가도록 거가 있었지. 딸 낳아서 수껑, 소깝 꼽았는데 소깝 마르마 금줄 안 띠따 카까봐 알소깝 꼽아가며 있었다카이.

 

단발머리 시집보내다

코스모스 필 때 뛰내려 피해 댕기다가 섣달그믐께 단대목에 날 받아가주 섣달 스무여드레날 단발머리를 시집보냈어. ‘달이’라고 둘러가 자박머리 해서 갔지. 시집갈 때 머리꼬리를 아바이가 풀어주대요. 아부지 없으이 나는 오빠가 풀어줬지. 오빠가 머리 쓰다듬으매 그캐. “세월도 원수다. 우리 아부지 딸 하나 남겨놓고 돌아가셨는데, 내가 잘 키와 보낼라 캤디.” 오빠가 대감(가장, 집안의 기둥을 이르는 말)인데 저칼다 싶어 나도 가심이 찡하더라. 돌보는 산지기들이 들어와 꾸며가 색시 맨드래 놓고. 오빠가 집안 기둥이래가 엄마가 마음대로 모해. 우리오빠가 사장한테 서당 글 갈채가주 날 잘 키워 시집보내줄라 캤는데 시간이 없잖니껴. 보국대 안 보낼라꼬 천지도 모르고 외사촌이 “위숙모, 집안 좋다. 보내라” 카이 길안 대곡으로 시집을 갔어요.

 

모티(못질) 카는데 큰 동네래. 신랑이 내보다 네 살 더 먹었어요. 열다섯 나는 게 시집 갔잖니껴. 더럽은, 때도 못 만내고. 그래 바빠가주고 아무따나 후지져가지고 비네질래 부께네 아(안)오드라 카이. 한글은 한자도 못 배우고, 우리 사장(글 선생) 있어도 일본 글 갈챌 때는 한글 못 배우그러 했어요. 그때는 그 글 가주고 하가끼(엽서) 쪼가리에 친정에 편지했어요. 열다섯에 시집 가 놓이 누가 글 갈채 주니껴. 아라비아 숫자는 그거대로 써먹으마 되는데 한글은 한 자도 모르는 거래. 배울 데도 없고 갈채 니도 없고 하도 애들버가주요, 되나마나 자꾸 들다보고 해가주고 이제 전화부 누구 이름 찾고 이 정도는 돼요. 핀지는 출출 못써도 간판은 보고 글씨는 알아보거든.

 

난리 나는 데만 찾아 댕겨난리 난리 캐도 그런 난리가 없어. 난리 나는 데만 찾아 댕겼어. 그 동네는 딴 성은 하나도 없고 같은 성만 50호 사는 동성마을이래. 동네가 쪼박쪼박 있고. 천날 만날 남자 여자 모예가주 윷도 노고 드시게 노는데 재미는 있어. 명절 때 되이 심심치는 않애. 우리는 집안에 사장(나이 많은 어른) 있고 희성받이(흔치 않은 성씨) 사느라 아무 집에 마음대로 놀러도 못 가고 그래 살았는데. 쪼매 지나고 보이 그 동네 뺄개이질을 실실 하드라카이. 좋은 게 아인데 싶어 보고 있었는데 형들이 남자(신랑)한테 뺄개이질을 시겠는게라. 내가 뭐라 카이 말을 듣나. 친정에 가서 이야기를 했어. 밤에 어디 가서 떨어와가주 삶아 먹고, 도둑케와가주 먹고 카드라. 우리 친정에는 후회를 하는 게라. 우리 오빠가 이캐. “우릅 해가 산다카디 별 지랄 다한다. 문중 큰 데는 행동도 지랄이라. 놔도 봐라. 안 보낼라카다 보내 놓으이!” 우리 친정은 후회를 하고 사기결혼이라고 혼인신고를 안 해줬어. 내가 사촌을 때려 죽여분다카이 내 무섭어 외가도 모왔어.

 

열다섯에 시집가서 열여섯에 해방이 됐어요. 일본놈들이 날 붙잡아 갈라고 카다가 해방 됐다 카이 오죽 분으껴. 단발머리에 비녀 질러서 갔으이. 우리 친정에는 배나무하고 감나무가 돌아가면서 마이 있어요. 제국시대에 빌나게 캤는 면서기들, 명 뒤배고 하던 지도자들이 만날 따먹고 그랬어요. 해방 돼고 친정에 가 있다가 면서기들한테 왜 남의 배 따먹노 카면서 머리에 비녀를 달아가주고 장대 들고 두드려 패고 쫓아내이 으이쿠 카면서 전부 도망갔어요.

 

강원도 탄광촌으로 떠나다

친정에서 사위한테 꼬수투라고.

“너 딴 데 가서 살고 싶나?”

“어데 가서 살 데 있어요?”

“취직자리 구해 주께 가라.”

그랄라 케. 외삼촌이 강원도 탄광에 오야지를 하고 있어. 그 끈으로 강원도로 갔어요. 그 집에 이야기도 안 하고 뺄개이질 안 씨길라고 옷만 및 가지 싸 가주고. 열일곱이었으이 그때 하마 아를 하나 났어요. 천지도 모르고 강탈해도 아는 생겨요.

 

강원도길 험한데 오가다도 없고 도라꾸 차를 타고 가이 철암 탄광이래. 거 드갔는 사람들은 시간되이 옷감도 갖다 주고 쌀도 주고요. 저 돈 받고 그래 살았는데 한 1년 됐는 동 안 됐는 동, 강원도 또 난리 난데이. 난리 나가주고요 총소리가 콩볶듯하고 마구 순경들은 다 쫓겨가고 방송이 자꾸 나온다. 고향 있는 사람 빨리 가라고. 방송은 나오재 그래도 있었으마 민간인은 안쥑이는데 우에 우두머리 해먼 거만 잡아가지.

비오는 밤에 아무것도 간수도 못하고 사던 살림 다 내삐래부고 보따리랑 뭐 옷가지 싸가 짊어지고 그 위에 아를 얹어가주고 놔부면 사람 못찾아요. 광목을 째가주고 줄을 매가주고 아 업고 가는 보따리에다 끈가리 달아가주 해야 내 식구 따라가재. 길도 못가고 산으로 산으로 어데로 해가주 강원도서 열 사흘만에 걸어오이께네 봉화래 봉화. 비를 맞고 걸어오고 봉화오이께네 촌 마실하고 고향이다 싶어. 방아찧는 집에 피란민이다 카고 들어갔어. “그케, 강원도 전쟁 났다 카더라.” 보리방아 찧다 갈라 어디있노 어디있다 카고 나를 물으이 “아이고 우리 딸하고 동갑이네” 이카골라 추리(자두)를 한 바가지 따주매 “먹고 가소” 그래가 얻어먹고 한밤 자고 대곡까지 또 걸어왔어.

 

걸어 오이 거는 이제 평화가 돼가주 뺄갱이나라가 돼가 뺄갱이질 아한다고 욕하던 놈들이 위원장 됐니 뭐 됐니 카면서 길안지서 가 앉았드라카이께네. 그라면서랑 “이느므 자슥 기집한테 빠져가주 처갓집에 가디 왜왔노”카며 불러내가 귀때기를 때리는 게라. 방에서 들어보이 암만 생각캐도 저건 아이다. 니 암만 그케봐라. 나는 뺄개이질 안했다. 그래가 구수간다. 여는 못 이겨 따라갔데이. 내가 암만 말리이 되나. 좀 따라 댕기드라카이. 따라댕기면 니는 또 뺄개이 돼라. 못살았으면 못살았지 나는 그래 모한다. 집에 자로도 모오거러 하고. 뺄개이 동네 가 자라. 쫓아내부고 내 혼자 마 있었어요.

 

운짐다마 바른말 하라

그 사이에 하마 군인이 덮앴어. 군인시대가 돼가주 다 붙들어 가고요. 다리-는 숨어 부고, 남자는 숨어부이 안붙들래고 나는 죄 안 지었으이 뺄개이질 안 했으이 안 숨었거든. 근데 붙들랬어 내가. 옆에 시집 금방 왔는 새딕이 하고 내하고 그 동네 뺄개이질 아했는 남자 서이하고 다섯명이 붙들래가주고 보국 구데이 뺄개이 구데이 갈채 달라고 온산에 데리고 댕기는 게라. 총을 날 미해(메여) 가주고. 내가 스물한 살인데 바른말 아하이 신도 벗으라 캐. 고무신 신었는데 신도 빗개 가주고 저가 가방에 짊어지고 댕게. 우리는 맨발로 아주 험한 데는 길로도 못가고 니는 저리가라 절로 가라 그래. 운짐다마 바른말 하라 이거래. 온 발에 찔려 피가 나고 따라댕기이 산에 디루 가서 홀딱 벗으라 캐. 군인들이 까맣게 붙었지 산에. 디게 운짐다마 바른말 하라고. 그 새딕이는 고마 운짐다이께네 밤에 신랑하고 같이 자는데 새로 도망가더라 이 칸데이.

 

열여덟이 제사 한 날 드니더

순경 하나 왔는 거 이 집들이 얼매나 패가 묶어났는거 내가 풀어 놔부랬어. 총에 맞아 죽은 신랑들이래. 백정 거라(도랑에) 갖다 놓고 한 총에 죽었어요. 열여덟이 제사 한 날 드니더. 우리 옆에 놓고 두 명을 그 자리서 때려 죽이드라 카이. 몽두리 가주고 때려죽여요. 숙질간을 옆에 놓고 죽이는데 안 죽디더, 안 죽어. 중노동이래. 하다하다 안 죽으이 니 좀 해라 이카고. 뚫어진 구여 피가 수도꼭지처럼 뿜는다카이. 내다 앉으마 “왜 내다 앉노. 왜 내다 앉노. 들다 앉아라” 카고. 훌떡 벗게 세워놓고 떠덕떠덕한 작대기 가지고 쑤시고, 어예가주 바른말 받아낼라고. 새딕이는 삼베 적삼을 입고 왔는데 때려도 똑 가시 꼭꼭 배긴 걸 가주 때려가주 피가 치쿠치쿠 나는데 앉아가주 우는 거 보이. 정부에서 무전이 오는데 “여자는 죽이지 마라.” 어떤 남자 하나가 내한테 귀에 대고 갈채 주드라 카이. 내가 지 각시하고 나(나이)가 동갑이라고 맨발로 실컨 데루 댕기다가 가마이 신을 펄쩍 던져 주며 ‘안아, 신어라’ 카고 “여자는 안죽인대이 겁내지 마라.”그래.

 

나는 한글거치 했던 소리만 하지. 뺄개이 동네 시집 온 거 폐도 아이고 나는 철없어 몰랬다. 나는 뺄개이는 아했다. 말 안들었다 막 도디케 먹는거도 봤다만, 나는 안갔다. 깐연에 맞아 죽어도 나는 바른말 할란다. 그카다 그카다 신랑이 어예 생겼노 카대. 옛날에 복상니 해여찮니껴. 복상니를 같이 해였는 사람이 동갑내기 하나 있어. 육촌간이래. 오다가 보니 그 사람이 죽어 있어요.

점드륵 데리고 댕겨도 우리 집이 내려다 비는데 안보내주는 게라. 너 동네 남자 다 죽었다. 가만 뭐하노 그래. 내가 어예 생겼다고 이얘기(이야기)를 해줬어. 복상니 해 였다. 나(나이)는 몇 살이다. 이케줬더니 들써 보디만 복상니 이게 너 신랑이다. 여 와 봐라. 카는게라. 가보이께네 그 사람은 신랑이 아니고 육촌간이래. 안 붙잡해 갈 욕심으로 개라 캤어. 신랑 맞다 그랬어. 집에 가라 칼랑가 싶어서. 근데 울어라 울어라. 왜 안우노. 아인 갑다 안 우는 거 보이, 이케가주 울었다 카이요.

 

별꼴 희한한 꼴 다 봤다 카이. 인민군이 밀려올 때는 동네 또 인민군이 꽉 찬다. 내가 혼자 있으니까 우리 집에 와서 자드라 카이. “나는 뺄개이질 아했다, 하기 싫다.”카는데 뺄개이가 돈을 갖다 주드라 카이. 그런 거 안한다 카는데 자꾸 조가 어디 땅에 묻어부랬어. 한참 있으마 군인이 거멓게 온 동네 꽉 찬데이. 그래도 난 안 쫓겨갔어. 나는 죄 안졌어. 뺄개이 동네 살아도 나는 뺄개이질 안했다 카이. 진해집이라고 그 앞에 있는 데 쌀로 몇 가마이 갖다 놓고 밥해 먹고 주둔해가 있데이. 이것들이 오래 있으이 팬티가 건지럽어 놓으이 국방색 광목 같은 비를 갖다 주고 팬티를 만들어 달라 그래. 내가 하는 거는 잘해. 틀도 없고 손으로 팬티를 하루 열세 개, 열네 개 맨들어 줬어. 감빵도 갖다 주고, 아줌마 잘 살아라 나중에 뭐 되거든 뭐 어예 주께 이 카매. 군인들은 저가 쌀 가와가주 밥해 먹고 이래는데, 뺄개이들은 이웃에 나락 가마 들어 와가주 떡해 쳐먹고 밥해 먹고 닭 잡아 먹는다 카이.

 

난리 난리 캐도 내겉이 오지게 만낸 사람은 없어.

아 배가주 가서 배가 처져 있는데 딱대기로 쑤시고 했다 카이요. 천지 사람이게네 어짤 수가 없잖아. 온 몸땡이 피고 사람 겉지도 안 했지뭐. 칠월에 딸을 낳는데 그 군인이 또 온데이. “니 이제 얼라 낳네.” 이 카메 들다 보고. 온다 카이 겁이 나가주 안(아이인)동 뭔동 내삐래 뿌고 거러 물 웅디에 들앉아 있어뿌래가주 몸띠가 거러버 가주 병이 생겼어요. 그래가 또 식겁하고.

 

혼인신고도 안 하고 안 살기로 작정했어. 그 사람은 내가 말려도 안 되고 뺄개이질 하다가 붙들려 가뿌랬지. 열여덟이 죽은 동네 나머지 사람 스물여섯 명이 가족 다 데리고 쫓겨가는 데 따라갔어. 나는 안 갔어. 내가 왜 가노. 니 혼자 가라. 기집 자석 놔두고 가서 뭐하노. 넘어다 보이 콩 볶는 소리가 나드라는 게라. 다부 돌아오다가 붙들려 가서 13년을 감빵 살았어. 스물네 살까지 내가 대곡 살았거든.

 

암만 봐도 이런 솜씨 없더라

그 상간에 아를 데루고 남의 일해주고. 여덟 살 먹은 아를 할매 할배한테 놔두고 대구를 갔어. 아는 집도 없는데 가가주 아는 사람을 만났어. 한약방에 취직해가 약봉지를 싸는 데 내가 일등했어. 제일 이쁘게 싼다 그래. 내가 손재주가 있어. 대곡 있을 때도 동네 시집 장개 가는 바느질 다 해주고, 한 해 삼동에 장개를 여섯 명 일곱명 보냈어요. 낭근있나 냉바 자부동 깔고 앉아 명을 한 저울 달아가주, 고거 잣아가주 베를 열시 아홉시 해가주 두루막 껍디기하고, 명주 안 뜯어가주 두루막 해가주 동네 우티 다 해주고. 옛날에 시집가는 사람 적삼 홋깃 카는 게 있어. 내가 수타 해조거든. 육촌 시누가 시집갈 때 적삼을 해 줬디 “아이고 형님아, 내가 적삼을 씻어가 물에 띄와 놓고 보이 깃이 하도 곱게 잘돼. 요런걸 어예 손으로 했노 싶어. 내가 암만 봐도 이런 솜씨 없더라.” 내가 저 집에 안 사고 나와도 내만 보면 형님 형님 그래.

 

대구 신천동에 방 얻어 놓고 직장 댕길 때 군인 가족이 옆에 마이(많이) 살아요. 내 손으로 자수를 놔서 자부동(방석을 뜻하는 일본말)(출처:우리말 1000가지, 이재운, 예담)을 맨들어 껍데기를 빨랫줄에 널어놓으니 군인 마누래가 “아줌마 이거 어디서 샀어요?” 카고 자꾸 물어. 사기는 내가 맨들었다 카이 자꾸 그런거 하나 맨드러 달라는거라. “천 떠 주면 맨드러주께요.” 카이 불란서 실 사가주 왔어. 그래서 책보에 그림 보고 맨드러 줬어. 몇 해 있으이 한약방 사장님 마누래가 나를 자꾸 탐을 내. 저 색시는 어디서 왔노 물어도 안 갈채 줬어. 나를 불러서 두루막 동전 달 줄 아나 카고 되도록 해주께 내 자꾸 날 불러 꼬수트라카이게네. 좋은데 권해주면 안되까. 고향도 있고 남자가 감방 가 있는데 돈 벌러 왔다캤지. 김장하는데 실고추 곱게 싸니까 솜씨 아깝다 카면서 저 동상이 좋은 게 있는데 내 말 들으소 카며 시집가라고 그래.

 

내가 도둑놈한테 속으마 어야꼬 싶어서 구수에 본가가 있는데 근바 가야지 싶어서 고향으로 왔어. 와도 대곡은 가기 싫애. 길안 최약국이라고 그 집 장모가 내하고 같은 탁씨고 대곡 있을 때 같이 살았어. “솜씨도 있고 아까운 사람 시집 잘못 가가주 신세 조져 놨다. 아지매, 내하고 여기 사자.” 최약국집 베도 짜주고 영감 두루매기도 해주고 이래 했어. 옛날 두루막 안 우게 하는 거 힘들어요. 안안 밖이 여가 하는 거. 길안 있다가 길안 사람한테 넘어 가가주 지금 영감 만나 살았지. 우리 영감이 군에 가가 7년 살다가 내보다 두 살 더 먹었으이 내가 스물일곱이, 스물아홉 아이껴. 유들유들한 게 억수로 인물이 좋아요. 그게 뭐든 동 내가 인물에 넘어갔어. 제대를 해가 오는데 처형 집에 들어왔어. 가마이 내한테 선을 비는 게라.

 

내가 돈을 벌어놓은 게 있었어. 나는 돈은 손에 들어오만 어예든동 꼭 가주 있어. 돈도 있고 없는 거는 겁이 안나드라 카이게네. 벌어가매 사면 되지. 사람은 저만하면 안될라 싶어 마음에 들드라카이. 한 번 딱보고 우리 큰 집이 백자에 있어 거 가 있으이 어예 알고 찾아 왔드라. 날 불러내가 카는 거래. 딸아 하나 있어. 나는 남의 자식 못키운다 그이 절대 안 매낀다 그래. 키우는 사람 따로 있다고. 그래 넘어가주 왔어.

 

저 집에도 그쿨 없는 걸 내가 맨들어 줘가 사도록 해 놓고 왔는데 뺄개이질만 아했으만 내하고 살았으만 먹고 사껜데. 우리 친정도 마이 봐줬어요. 이 집에도 와보이 너무 없어. 내가 이날까지 혼자 벌어놓은 거 가주 이 집 식구 다 먹여 살렸니더. 베도 메(몇) 필하고 우리 친정에 삼을 하도 잘 해가주 한 단씩 주마 솜씨 있으이 가주 와가주 삼베 생내이 하고, 명도 얻어와가 명비도 해놓고, 뭔 일을 하더라도 안 되거러 안 하고 되거러 해주이 놀 새가 없어.

 

여 올 때는 돈 하고 옷하고 살림살이를 언니한테 맡게 놓고왔어. 언니가 와 보고 니는 이런 집에 와서 못산다. 이 집에 아홉 식구가 니 하나 빼고 다 불쌍타. 막내이 딸로 태어나 남자 동생 청했다고 세상없는 게 아부지한테 사랑받고 컸는데 왜 이런 집에 와서 살아야 돼노. 뭔 정이 들어가주 카노. 날 데릴러 두 번 세 번 왔어. 그래도 남자가 탐이 났든 동 가기 싫어. 안 간다 그랬어.

 

집은 오두막집에 식구가 아홉이래요. 친 할매도 아이고 시외조모가 있어. 시어마님이 무남독녀래가 딸 하나 가지래. 딸 따라 여 와서 살다가 딸이 죽어뿌고 외손자 키워주고 있어. 시아바님 할마이 죽어 뿌래가 혼자 있다. 시동생 둘이 하나는 장개 갔고 하나는 안 갔고. 시누 서인데 하나는 시집 갔다 아 못 놓는다 카매 와있고 둘은 쪼맨하고. 아라 카는 거는 첫돌도 안 지냈는 걸 똥은 밤마다 싸 재키제. 잠도 잘 데가 없어. 아홉 식구에 방이 두 갠데 시누 둘이하고 할매하고 아하고 큰방 차지해뿌이. 우리 둘이 모다 줄라그마 사랑 어른은 만날 남의 사라(사랑에) 가서 자고 시동상도 친구 집에 가서 자고.

 

남의 대장 가슴을 이래 아프게 하마 잘 되겠나

우리 언니가 와가 아이고 야야 니는 여기 못산다 니가 왜 이래 살아야 되노 가자 카는 기라. 낯짝 보고 따라왔다가 진짜 이 고생하고 못 살다 싶어 갔거든. 대구 방 얻어 놓은 거 정리도 안했고, 이 아프다 카메 핑계 대고 이 빼러 간다고 갔어. 화목까지 걸어가는데 영감이 날 델따주러 따라왔어. 같이 가자만 돈이 없어. 내 돈 보고 따라 올라카만 챙피시럽잖니껴. 화목까지 버스에 탁 태(태워) 주고 자기는 돌아오는기라. 나는 아온다고 계산이 나왔지. 와 봐라, 거 있을라.

 

차를 타고 앉아서 보이 질삼(길쌈)해가주 하얀 에리 달고 노란 노타이 하나 해준 걸 입고 가면서 자꾸 돌아보는데 불쌍트라카이. 내가 남의 대장 가슴을 이래 아프게 하마 잘 되겠나. 돈이 문제라 돈 벌어가 사면 되지. 내 돈 있는데 그거 가주 먹고 사면 안될라 싶어 마음을 돌랬어.아(아이) 불싸 가지고 쌀 서되 받고, 복상 한 접 사고, 콧디 볼 민경도 하나 없어. 채경 이만한 거 사가주 보따리해 이고 왔어요. 오이 온 식구가 감동해가주 좋아 못사드라카이게네. 그래 가지고 이제껏 살았는데 인간 구제는 할 게 못되요. 조카 처음 났는 거 귀타고 내 돈 가주가가 사가 입해고. 시동상 그쿨 거돠가 장개 보내고. 이눔의 집구석에 와서 고상한 거 생각하면 말도 마소.

 

13년 만에 나와서 남자가 찾아왔어. 나는 챙피스럽잖니껴. 여 와가 하마 머슴아 큰 거 낳고 딸아 낳고 타박타박 걸어 댕겼어. 곽중에 그 남자를 데리고 왔어. “내가 내한테 과한 여자 만내가 말을 들었으마 되껜데 미안코 죄송하다.” 카면서 항복을 하드라. 하게나 말게나 “인제는 필요없다, 소용없잖아. 호적상 당신 여자 아이다. 함부로 나는 헛다리 짚어가 고상했고 우리 오빠 엄마가 대쪽 겉이 살고 있고 그 험한 구디서 별 지랄을 다해도 안 넘었다. 돈 없는 게 흉이지 난 너한테 한 개도 밑질 거 없다. 그 동네 가가주 시집 장개 숱한 사람 내 손으로 다 보내고.” 이만저만하다고 이야기를 다 했지. 결국 처녀 장개 갔어. 그런데 오래 못 사고 죽어부랬어. 내가 요새 사람 치면 바람 한 번 피운거배께 안돼.

 

 

 ▲남편과 만난지 1년 되었을 때, 27살에 찍은 사진(ⓒ탁오출) 

 

우리 아홉 식구 봄을 살아야 된다

우리 신랑이 노름을 해가 노름빚이 받으러 자꾸 오는게라. 너무 수답게 오이 시아버지가 “야들아, 상방에 뭔 대단한 소이(손님이) 왔는데 날마다 쌀밥 해다 퍼다 주노.”이카제. 그때 돈은 안가 오고 옷은 거진 가주 왔어. 비로도 처매, 양단 저구리, 손목시계, 옥양목 한 통, 베도 한 필 들었고, 돈 될만한 것은 다 쌌어. 이거 맡아 놓고 돈 받으로 오지 마소. 돈 벌어가 갖다 줄 챔이니까. 우리 동상 갈 단에 있어라. 있어 보이 그 값어치가 더 되는 게라. 그 집에 딸 하나 치울 게 있어. 딸 치우는데 다 해 줘 부랬어. 돈 안 갖다 주이. 우리 동서는 운데이. 중간 동서는 아깝아 죽는다. 평상 비로도 처매 구경도 못해 봤는데, 형님요, 그런 걸 왜 갖다 주니껴. 그까짓 노름돈 졸래만 졸래는 게지. 준 게 아이다. 맡겨 놨다. 돈 받으러 자꾸 오이 시끄럽어 죽는다. 밥해 주는 거 몸서리난다. 그걸 갖다 주고 오는데 날도 안 잊어뿐다. 이월 초하루래. 오다가 재에서 시아버지를 만냈어. 아버님 어디 댕겨 오시니껴? 내 앉을 자리 봐 놓고 온다. 그게 무슨 말인 동 몰랬어. 여자는 시집 잘 보내면 앉을 자리 안 카니껴. 나이 스물한 살 된 시동생이 저녁을 안 먹어. 죽었으먼 죽었지 난 이제 남의 집 안 간다. 이제는 한집 살아봤어. 우리 동상하고 동갑인데 우리 동상은 엉디 뿔나는데. 할매는 또 뭐라카노 하마 “저놈의 자슥 오늘 저녁에 밥 한그릇 죽한 그릇 다 먹으겐데. 아바이라 카는 게 자슥 어디 잽혀놓고 서숙 한 가마이 받아가주 먹고 살라고 저칸다,” 카메 혀를 끌끌 찬다. 옳다, 저거 머슴살이 보낼라고 그라는게다. 하도 불쌍해가 “내가 아버님요 보내치 마소.” “야야 어야노, 우리 아홉 식구 봄을 살아야 된다. 지 하나 고상해도 할 수 없제.” “내가 서숙 한 가마 보태 주께요.” “니가 뭔 도(돈)이 있노. 아이고 새사람아, 니가 그라마 안 된다. 미안해가.” 할매는 시동상 얼매나 주께대노. 말만 안 들으마 저 놈의 새끼 형수 아이마 니그 집에 가가 죽으겐데 말 안듣는다고. 한 해는 말 잘 듣더라고. 그래 안 보내코 데리고 키워 장개 다 보냈지.

 

너무 어물어가주 정이 안 들어

내겉이 험한 꼴 당한 사람 없다. 영감이 여자를 델꼬와도 여사로 봐요. 영감이 내한테 안 맞어. 나는 처음에 인물만 보고 돈은 겁이 안나드라카이. 벌이만 되잖아. 지 밥벌이 모하는 게 어딨노 육신 성은 게. 이런 마음 먹고 덤불었는데, 너무 어물어가주 고마 정이 안 들어. 내 안비는데 가서 잘 살아라 싶으고, 내한테 부닥치지는 마고 성만 안 가세라 싶은 게 내삐리 놔 뒀지. 영감은 무진생으로 79세에 돌아가셨어.

 

요새 아-들은 돈은 없어도 효자질은 하니더. 대구에 사는 막내아들이 희한하이더. 지금도 막내아들은 절대 엄마 요양원에 안 보낸다 카는데 내 굴신을 못하면 요양원엘 가야지요. 내가 복이 없어요. 여자라고 아무거도 모하는 사람도 잘만 사드라만 나는 내 모가치 돌아온 거 남한테 빌어본 적이 없어요. 동네 베 다 날아주고 명주 두 필 세 필 물들여가주 다 다듬이 해주고.

 

혼인신고 전에 딸 하나를 낳았다. 결혼할 때 전처소생 큰딸이 첫돌 무렵이었다. 당신이 낳은 2남 4녀까지 모두 팔남매다. 영감님이 돌아가셨을 때 큰아들은 사우디에 가 있었다. 더운 나라라 못 있고 와서 할매 비자금 다 털어 사과 농사지으려고 준비를 했다. 3년째 가지가 벌어질 무렵 큰아들이 쓰러졌다. 큰아들은 몇 년 전 뇌경색으로 세상을 떠났다. 지금도 혼자 있을 때면 큰아들 생각이 나서 눈물짓는다.

할매는 많이 베풀지 못한 게 후회된다. 친척들에게 쓰고 싶어도 가진 게 없어서 쓰지 못할 때 안타까웠다고.

다시 태어난다면 베풀면서 살고 싶다고.

때를 못 만나 험한 세상을 살아야 했던 할매는 아직도 아픈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이라도 할매 가슴에 대못을 박은 사람들이 살아있다면 잘못을 알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묻어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서미숙(작가)
2021-05-25 오후 5:5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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