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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의 현장 그곳①-안동지역 민주화운동의 성지 목성동성당

  • 안상학(시인)
  • 2020-10-30 오후 3:4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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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천주교 안동교구 목성동주교좌성당(경북 안동시 목성동 산1번지, 이하 목성동성당)은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안동의 대표적인 랜드마크로서 한 시대를 누렸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붉은 벽돌과 높은 첨탑이 인상적인 고딕양식에 가까운 건축물이었다. 풍수지리로 살펴보면 잠두혈 자리다. 명당중에 명당이다. 안동시가지가 훤하게 내려다보이는 목성산 이마 위에 올라 앉아 있었다. 안동시가지를 조망할 수 있는 자리라면 어디서라도 높은 산 위에 올라앉은 성당 건물을 쉽게 발견할수 있었다. 외부 사람들이 안동을 둘러보고 이미지를 새긴다면 몇 손가락 안에 들기에 모자람이 없는 품격을 지니고 있었다.

 

안동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다. 목성동성당의 존재감은 누구나 인정할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억을 더듬어 가보자. 성당 들머리에서부터 눈길을 끄는 매력이 있다. 근대건축물로 손색이 없는 옛 교구청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창문을 빼놓고는 온통 담쟁이덩굴에 뒤덮여 있는 모습은 무척 이국적이다. 담쟁이벽돌로 지은 집 같아 보인다. 이 건축물은 쓰임만 달리 했을 뿐 원형을 유지한 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성당으로 오르는 길은 오래된 수목들을 거느리고 있어서 자못 운치가 있다. 그 길을 올라가면 무슨 아늑한 동산이라도 있을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길섶에는 성모마리아 상이 안동 시내를 굽어보고 있다. 가파른 그 길을 지그재그로 올라가면 그 끝에 검붉은 외양을 지닌 성당이 지긋이 앉아 있다. 오래된 수목과 서양 건축의 맛이 어우러져 독특한 풍경을 그리고 있다. 다 기억속의 풍경이다. 붉은 벽돌의 성당이 없는 지금은 알맹이 없는 그 무엇과 같은 격이다.

신자들에게는 참으로 신성한 공간이지만 일반 시민들에게는 훌륭한 공원이나 다름없었다. 가난한 연인들에게는 더없이 아늑한 데이트 장소였다. 안동시민들에게는 소중한 추억이 서려있는 정서적 공간이었다. 목성동성당의 자연지리적인 아름다움과 건축물이 지니는 독특한 멋은 두고두고 이야기해도 모자람이 없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다 설명했다고 한다면 목성동성당을 잘 모른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큰 가르침을 나누는 아름다운 영혼의 울림이 있는 성소라는 점은 상식이니 접어두고 하는 말이다. 민주화운동의 성지. 유신의 망령이 날뛰던 70년대와 군부독재의 군홧발로 짓이겨지던 80년대에 걸쳐 저항의 외침과 투쟁의 깃발이 끊임없이 이어진 역사적인 공간이라는 점이다.

두고두고 아쉽지만 이제 그 시대의 목성동성당은 없다. 기억 속에서만, 역사 속에서만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허물고 재건축을 한 것이다. 지붕에서는 비가 새고 마룻바닥에서는 찬바람이 숭숭 올라오는데다가 붕괴 위험마저 감지되어 허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자리에 현대식 성전을 지은 것이다. 목성동성당을 아껴 찾던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아쉬움이 크다. 신도들에겐 믿음의 손때가 묻어 있고, 시민들에게는 추억이 깃들어 있으며, 근대건축물로써의 가치와 역사적인 현장의 기록들이 버무려져 있는 성소의 유무형의 자산을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은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하지만 사람의 기억과 역사의 씨줄과 날줄에 새겨진 그 소중했던 자취와 기록은 쉽게 허물어질 성질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세월이 지날수록 사무치게 떠오른다. 벽체를 이루던 벽돌과 기둥, 서까래와 대들보는 뿔뿔이 흩어졌지만 사람의 기억과 역사의 기록 속에 존재하는 성당의 생명력은 오히려 한층 조밀하게 서로를 끌어안고 더 강고하게 어깨를 겯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특히 민주화운동 과정의 노래와 외침과 투쟁과 눈물과 환희는 벽돌이 되고 기둥이 되고 서까래, 대들보가 되어 또 하나의 성전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 1970년대 목성동성당(ⓒ천주교 안동교구청)

 

목성동성당은 안동의 성당 중에서 가장 먼저 세운 것이다. 천주교 안동교구의 본당이다. 병인박해(1866)를 전후해서 난을 피해 이주한 신자촌과 공소를 중심으로 전교활동을 하다가 1927년에 처음으로 율세동에 공간을 마련했다. 1949년에 현재의 자리에 옮겨 앉았다가 1956년에 화재로 재건축을 했다. 점차 교세가 확장되자 1962년 증축을 하여 사용하였다. 이 건축물은 보기 드물게도 하늘에서 보면 거대한 십자가 형태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대구교구에서 분할되어 경북북부지역을 아우르는 안동교구를 설정하고 목성동성당이 주교좌 본당이 된 것은 1969년 6월 29일이었다. 교구장은 두봉(레나도) 주교였다. 그는 새 교구의 기초를 다지려고 행정 체계를 확립하고 경제 질서를 바로 잡는데 주력했다. 1990년까지 주교좌로 활동하며 목성동성당이 민주화운동의 본산으로 쓰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보수적이고 소극적인 사회참여의 성향을 지닌 천주교가 민주화운동에 문을 열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은 유신정부가 1974년 당시 원주교구 지학순(다니엘) 주교를 구속한 사건에 대응하면서부터다. 그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긴급조치 1, 4호를 위반했다는 혐의를 쓰고 구속된 것이다. 그의 석방을 위하여 천주교가 일어섰다. 안동교구도 이 사건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나섰다. 이때부터 목성동성당은 자연스럽게 민주화운동과 맞물려 집회와 시위의 중심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 해 9월 11일 목성동성당에서 ‘지학순 주교 석방을 위한 기도회’를 개회한 것이 신호탄이었다. 그 의미를 두봉 주교는 〈1975년 사목 방향〉 메시지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지 주교님 사건은 한국 교회를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교회가 쇄신되어야 하고 사회 안에서 빛의 역할을 해야 되겠다는 것을 우리 많은 이가 절감하게 되었다. 일 년 전만 해도 한국의 사제들이 사회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나서리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현 시국에 관련된 운동에만 국한되어서도 안 되고 앞으로도 꾸준히 오래 지속되어야 할 것이며 우리 주변의 모든 분야에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지학순 주교는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의사를 분명히 밝히고 민주헌정을 유린하는 군법회의에 출두할 수 없다는 것을 골자로 한 양심선언을 했다. 이는 큰 파장을 불러왔다. 젊은 사제들은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을 조직하고 즉각 대응에 나섰다. 이후 이 단체는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와 길항하며 굵직굵직한 시국사안에 발 빠르게 대응하며 시대의 선봉에섰다. 당시 안동교구는 포교의 방향을 문화부문과 농민부문을 주 대상으로 삼았다. 어느 교구보다 빠르게 대규모의 안동문화회관을 건립(1973년)하였으며, 사목국에서는 한국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협의회(1977년 8월 24일 창립)를 조직하고 연합회를 건설하는 작업에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안동지역의 특성상 이 두 부문이 지역민들과 연대할 수 있는 통로라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 1970년대 목성동성당(ⓒ천주교 안동교구청)

목성동성당과 더불어서 당시 민주화운동의 집회장소로 쌍두마차 역할을 한 곳이 바로 안동문화회관이다. 이 건물에는 동부동성당이 있었고 대규모 공연장이 있었다. 옥내집회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1977년 10월 18일 「농민·노동자·양심수인 석방을 위한 기도회」가 열렸다. 이 사건으로 류강하, 정호경 신부가 구속되었다. 10월 30일에는 이 사건으로 구속된 두 신부를 위한 전 교구 차원의 미사가 열리기도 했다.

목성동성당이 민주화운동의 상징적인 공간으로 전국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79년 ‘안동농민회사건’ 싸움을 주도하면서부터다. 이른바'‘오원춘 사건'으로 더 잘 알려진 이 싸움은 7월 30일 열린 기도회를 촉발로 전국에서 기도회와 집회가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전국의 모든 싸움의 이목은 안동의 목성동성당으로 쏠려 있었다. 아름답고 평화롭기 그지없던 공간이 하루아침에서슬 푸른 유신정권에 정면으로 대응하는 요새가 된 것이다. 유리창마다 구호가 나붙고 붉은색 글씨도 선명한 현수막이 펄럭였다. 밤샘 농성으로 불이 꺼지지 않았다. 탄압도 정도를 더해갔다.

오원춘 사건은 정보기관이 조작한 것이었다. 천주교의 발언이 날로 강도를 더해가는 데다가 급기야는 1978년 12월 27일 한국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연합회까지 창립하자 탄압의 빌미로 삼은 것이다. 1978년 당시 '함평고구마투쟁'에서 피해 농민들이 공권력을 상대로 보상을 받아 내는 쾌거를 이룬 일대 사건이 있었다. 따라서 농민운동 진영이 한층 고무되어 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때를 같이하여 안동교구농민회 소속인 영양 청기분회가 감자 피해보상 싸움에서 승리를 거머쥐었다.

 

이를 이끌어낸 인물이 바로 오원춘이었다. 그들에겐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정보기관은 마침내 그를 납치하여 폭행, 협박을 한 것이다. 오원춘은 양심선언을 했다. 범 천주교 차원에서 그를 옹호하며 싸움이 이어졌다. 그러나 오원춘은 물론이고 관련자들 구속은 피할 수 없었다. 법정에서 납치를 둘러싼 진위 여부 공방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10·26이 터졌다. 유신정권이 종식되자 구속자들이 전원 석방되면서 사건도 종결되었다. 천주교 차원에서 조직적이고도 지속적으로 투쟁을 한 것이 유신독재를 종식시키는데 일정한 역할을 하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 현장의 중심에 목성동성당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 안동교구 오원춘 기록사진(ⓒ천주교 안동교구청)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공간이 있다. 바로 안동농민회관이다. 1981년 천주교 안동교구에서는 전국 어느 곳보다도 먼저 농민운동의 거점을 마련한 것이다. 축성 미사에는 근 500명이 참석하여 추수감사제, 농민대회, 한마당 큰 잔치를 열었다. 이 공간은 이후 활발하게 전개되는 안동지역 농민운동의 교육장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로써 농성과 기도의 거점인 목성동성당을 중심으로 집회와 대중강연을 담당한 문화회관, 농민교육의 산실인 안동농민회관으로 이루어진 공간의 트로이카 시대가 열린 것이다. 천주교안동교구는 지역 민주화운동의 정신적 토대였으며 목성동성당은 물적 토대이자 상징이었다.


1986년 4월 16일 「농민·노동자를 위한 기도회 및 농가부채탕감대회」를 문화회관에서 가지고 안동역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때 안동에서는 최초로 최루탄이 등장했다. 이날 집회도 목성동 성당이 최후의 보루였으며 밤샘 농성의 횃불이 타올랐다. 9월 1일에는 「미국 농·축산물 수입반대 농성」, 9월 3일에는 「고문 및 미국 농·축산물 수입 규탄대회」가 이어졌다. 1987년 4월 29일에는 민주헌법 쟁취를 위한 호헌 철폐 단식투쟁이 목성동성당에서 있었다. 김영필 신부 외 10명의 사제들이 참여했다.

 

이때 지역 농민·노동자·학생 등이 대규모로 참여했다. 이 싸움은 6월 항쟁까지 장기적으로 이어졌다. 가두진출과 퇴각이 이어지던 그 싸움의 배수의 진 역할을 한 것도 바로 목성동성당이었다. 1988년 벽두부터 <민주쟁취 국민운동 전국 농민위원회>가 성명서를 발표하며 장기적인 투쟁의 결의를 밝혔다. 고추생산비 보장, 농산물 제값 받기, 쌀 생산비 보장, 민주농협쟁취 등 꼬리를 물고 일어난 전국적인 투쟁이 이어졌다. 안동을 중심으로 하는 경북북부권역도 산발적인 싸움을 전개하다가 10월 2일 안동농민대회에 5,000명이 집결한 가운데 대대적인 연합시위를 벌였다. 이때부터 연말까지 3개월에 걸친 장기투쟁의 거점이 된 곳이 목성동성당이다.

목성동성당은 1989년 여름 이후 전국교직원노동조합합법화 투쟁을 비롯해서, 1991년 분신정국, 1992년 민주대개혁과 민주정부수립을 위한 총선, 대선 정국에서도 일정한 역할을 했다. 효순이·미선이 사건과 국가 보안법철폐 운동까지도 사제들과 시민들의 연대가 이어졌다. 안동지역 민주화운동의 성지요, 숨 막히는 정국의 허파였으며, 공권력의 무차별 폭력과 대치하던 피난처요,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는 통로이기도 했다.

 

더 이상 열거하지 않더라도 목성동성당은 안동지역 민주화운동의 거점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안동지역 어느 곳에서 시위를 벌이더라도 늘 마지막 보루였으며, 장기적인 농성의 처음과 과정은 물론이고 마무리를 지켜준 강고한 성벽이었으며, 공권력과 대치하며 격렬한 싸움을 펼치던 고지였다. 성당 안쪽은 시위대, 성당 앞 좁은 도로는 전경들, 그 주변에는 시민들이 에워싸고 발을 동동 구르던 풍경은 그 시절의 일상적인모습이었다.

아름다운 풍경과 민주화운동의 자취가 남아 있던 목성동성당은 그 수명을 다했다. 근대건축물을 문화재로 지정하는 움직임이 한창 때 일이었다. 앞뒤 사정은 알수 없지만 유서 깊은 목성동성당은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허물어졌다. 2004년 4월 25일 새 성전을 짓고 봉헌했다. 당시 주임신부는 민주화운동의 핵심에 있었던 조창래 신부였다. 2005년 어느 날 그와 김영필 신부를 사제관에서 만나 당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비록 상징적인 공간은 외양을 달리 했지만, 그 역사와 그때 같이 했던 사람들은 그대로 있어요. 목성동성당은 역사발전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그렇게 쓰인것이지요. 그 당시는 다른 장소도 빌릴 수도 없었고, 우리 천주교 또한 그런데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죠. 공권력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곳, 경찰이 맘대로 들어올 수 없는 곳이 여기다 보니 자연 그렇게 함께 했던 거죠. 교회의 이상과 사회적 움직임이 잘 맞았던 거죠."

언덕 위의 빨간 집, 그 목성동성당 대신 새로운 성전이 목성산 주인이 되어 있다. 목성동성당, 이름은 의구한데 옛 모습은 사진 속에서 바래가고 있다. 비교적 평안해 보이는 새 공간은 새로운 세월의 때를 입으며 역사를 더해갈 것이다. 종교적인 역할만 수행해도 좋을 역사만 써내려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 본 글은 『기록창고』 1호에 수록된 내용이며 E-book에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안상학(시인)
2020-10-30 오후 3:4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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