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ㆍ예천 교류와 상생의 근대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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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ㆍ예천 교류와 상생의 근대기행

[우리동네-안동시 평화동2] 뽕나무밭과 옥동삼층석탑 이야기를 간직한 동네
[안동시공동기획연재] 2018 안동·예천 근대기행(13)

  • 이미홍
  • 2019-01-07 오후 12:00:55
  • 206
프롤로그
 
개천이 흐르고 그 개천 따라 나무가 우거진 오래된 큰 숲인 쑤가 있고 야트막한 산 아래 집들이 점점이 모여 있고 그 앞으로 배추밭이며 뽕나무밭이 있고 낙동강 강가로 흘러가는 개천 따라 논들이 펼쳐져 있었던, 그야말로 평화롭던 동네 평화동에 본격적으로 집들이 들어서고 지금의 동네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동네에 철도관사가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지금도 그때 닦은 도로와 골목이 그대로 있고 철도관사로 쓰였던 집들이 있고 오래전 여기가 옥동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옥동삼층석탑이 말없이 지키고 서 있는 동네 평화동 사람들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본다.

▲평화동 골목길 지형도
 
전 평화동 권중수 동장도 평화동에 산다
 
평화동 동장을 지냈던 1927년생 권중수 어른신은 남선면이 고향으로 일제시대에 남선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열여덟에 남선 원림에 사는 안동김씨 처자와 혼인을 했다. 만 스무 살이 되던 해 시험을 쳐서 교도관이 되어 안동형무소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면서 출퇴근길이 멀어 시내 법흥동으로 이사를 왔다.

▲평화동 골목길 따라 집으로 가는 권중수 할아버지. 감이 익어가는 담장 너머 집도 옛 관사 형태가 많이 남아있는 집이라고 한다
 
“교도관으로 들어가서 안동형무소에서 얼마간 있다가 동장 시험을 쳐서 운흥동 동장으로 부임을 했어요. 용상동, 신흥동을 거쳐 평화동에서도 동장을 하다가 법상동에서 퇴직을 했어요. 6.25 동안 전에 우리가 사진을 많이 찍었어요. 그런데 피난을 가면서 모친이 사진을 모아서 땅을 파고 묻었어요. 그때 내가 형무소 간수질을 하고 있었으니까 인민군들이 오고 집에 사라들이 오가고 하니까 보면 혹시 해꼬지 할까봐 감춘 거지요. 돌아와 꺼내 보니까 땅 속에 물이 들어가 사진이 다 못쓰게 됐어요. 그래서 조부하고 부친 사진이며 우리 혼례 사진이며 하나도 안 남아 있어요.”

▲운흥동 동장할 때 개미상회 앞에서 권중수 부부.

“평화동 동장을 두 번 했는데 내가 처음 이 동네 동장으로 왔을 때가 6.25 동란 지나고 난 지 몇 년 안 되었을 때라 그때까지도 복구가 덜 돼서 지금 태화오거리 부근에서 KBS방송국 넘어가는 길이 있는 평화동 넘어가는 그 일대도 잿더미가 됐던 걸 조금씩 새로 짓고 하는 참이었어요. 시시마끔 집을 다시 짓는데 어디가 길인지 어디가 담 잇던 자리인지 경계도 잘 안보이고 하다 보니 어림잡아 길이고 집터라고 여겨지는 곳에 각자 집을 다 짓고 나니 누구네는 집이 온전하고 어떤 집은 집이 평수가 모자라고 그래요. 평화현대아파트 있는 쪽하고 반대편 도로가에 있던 사람들 같은 경우 한쪽은 괜찮다고 다른 쪽은 그전에 집이 60평이었는데 남은 터에 집 지었는데 한 20평 밖에 안 되니까 수락을 안 해주는 집도 있었어요. 그렇다고 당시 여건으로 다 부수고 다시 지을 수도 없고 그때 새로 지어 점유하고 있는 그대로 인정을 하고 소유권 등기를 하는 걸로 정리가 됐어요. 한 몇 년을 고생을 해서 해결을 했어요. 몇 집은 끝내 합의가 안 되고 오래 끌다가 해결된 지 불과 얼마 안 된 집도 있어요.”
 
평화동 들어오는 도로가에서 가까운 집을 사서 80년대에 평화동으로 이사 왔다. 옛날 평화동 관사 1호 2호집이 있던 구역 골목안 두 번째 집이었다. 그전 주인이 건축업을 해서 관사를 허물고 한옥집을 새로 지었는데 잘 알고 지내던 터라 집을 야물게 잘 지었다고 해서 믿고 샀다.
 
“이사왔을 때 관사가 20여 채 정도 남아 있었어요. 지금 산린청지원센터 자리에 보안대도 80년대까지도 있었고요. 이사 와서 잘 살다가 한 번 아이들이 연탄가스에 중독이 될 뻔한 일이 있었어요. 당시에는 다들 연탄을 때서 살았는데 한옥집이다 보니 연기가 문틈으로 새어 들어간 거지요. 정원 초하룻날 설날에 그런 일이 일어나서 놀라 안 되겠다 싶어 그때 지금의 양옥으로 다시 지었어요.”

▲평화동 동장 시절

동장으로 있으면서 동네 행사가 있으면 진명학교 운동장을 빌려서 행사를 했다. 거기가 평화동에서 가장 너른 장소이고 운동장에는 나무 그늘도 있어 그 아래 천막 치고 운동장에서 동네 사람들 체육대회도 하고 어버이날 행사도 했다.

▲평화동 동장 시절 진명학교 운동장에서 경로잔치를 했다. 그 시절만 해도 평화동에서 가장 넓은 장소인 진명학교에서 마을체육대회도 하고 주민들이 많이 이용했다고 한다.

“내가 역앞에서 운흥동 동장을 할 때만 해도 정해진 임기가 없어서 12년을 했어요. 그런데 평화동 동장할 때는 임기가 있었어요. 임기 마치고 다른 데로 갈 때 되면 동민들이 붙잡고 섭섭타고 그랬어요. 공직이라는 게 있을 때는 아무 말 안하는데 가고 나면 뒷말이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그래도 인심을 잃지 않았는지 그런 뒷말을 들은 적이 없어요. 평화동에서 동장을 오래 하지는 못했지만 동장 하던 그전 시절부터 40여 년을 정 붙이고 산 우리 동네지요. 평화동 동장 자리가 인기가 제일 좋았어요. 조용하고 민원도 적고 해서 동장들이 퇴직하기 전에 평화동 동장으로 보내줬어요. ”

▲평화새마을금고 이사장 권중수와 직원들
 
권중수 어르신은 할머니 먼저 보내고 혼자 밥을 해결하는데 아들 내외가 매일 저녁마다 들여다보고 찬거리를 마련해 둬서 차려 먹기만 하면 되는데도 90넘어 혼자 살아보니 다른 건 안 불편한데 끼니 찾아 먹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사진 때문에 두 번을 뵈었는데 나중 만났을 때 할머니 이야기를 하면서 싱거운 소리지만 할마이하고 혼인한 이야기를 한토막 하자면 첫날밤을 지내고도 신부 얼굴을 몰라봤던 신랑이었다고 한다.
 
“아무 것도 모르고 가자는 대로 가서 하라는 대로 해서 신부 얼굴 쳐다볼 엄두도 못 내고 식을 어떻게 했는지 기억도 안 나지요 신부 얼굴도 사전에 모친만 몰래 보고 와서 나는 얼굴도 모르는 채로 처갓집 마당에 서서 하라는 대로 절하고 나니 첫날밤에 신방을 차려주는데 밖에서 사람들이 손가락으로 구멍을 뚫고 보고 해서 호롱불빛 아래 신부 얼굴도 결국 못보고 그냥 잠이 들어버렸어. 자고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어른들하고 식구들 계시는 안방에 가서 인사드리고 앉으면서 보니까 똑같이 붉은 치마에 새파란 저고리를 차려입은 새댁이 둘이 앉아 있어요. 상을 받고 밥을 먹는데 누가 내 색시인지 몰래요. 그래 밥 먹을 때도 쳐다보고 한참을 있으면서 보니 내한테 대하는 게 좀 다른 게 이 사람이 내 색시구나 눈치로 그래 알았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내 사촌 처남댁이가 한 열흘 먼저 시집을 왔던 새댁이랬어요. 처가에서 1년 묵신행 하고 집으로 왔지요.”
 
그렇게 신부 얼굴도 몰라본 철없는 신랑이었는데 아내는 그야말로 요조숙녀 현모양처에 음식 솜씨도 좋아 살면서 내가 무슨 복에 이런 부인을 얻었나 하고 그 옛날 첫날밤 생각에 미안해하며 부부가 같이 웃곤 했단다.

▲남선면에서 치러진 권중수 동장 부친의 전통 장례 행렬.

이날 앨범을 뒤져 찾았다며 사진 한 장을 조심스레 꺼내 보여주신다. 5.16 일어나기 전해에 치러진 모친 장례식 사진이다.
 
“우리 어머니가 여름에 돌아가셨는데 그때는 여름이라도 상주며 하객들이 멀리에서 야와 하니까 보통 5일장에서 7일장을 치렀어요. 산소가 남선 집에서 산까지 멀었는데 장례 행렬이 길었어요. 그래도 손들도 다 산소까지 따라가고 했지요. 맨 앞에 만기라고 조기를 줄줄이 들고 가고 그 다음에 나이 많은 상주가 타는 용여에 부친이 타고 그 다음에 소리꾼이 서고 그 다음에 상여 서고 그 뒤에 상주들 서고 그리고 맨 뒤에 조객들이 차례로 따르고 장례행렬이었어요. 그때만 해도 장례를 절차에 따라 제대로 치렀지요.”

▲평화동 집에서 손주를 안고 있는 생전의 부인 사진
 
음식 솜씨가 좋아 생전에 음식을 해서 이웃들하고 나누어 먹고 노인정 사람들한테도 잘 하고 해서 할마이가 가고 없어도 지금도 경로당 가면 안노인들이 뭐라도 챙겨주려고 하는데 생전에 안에서 잘했던 그 덕을 보는 거라며 먼저 간 사람 빈자리가 크다는 걸 느낀다는 권중수 할아버지를 보며 액자 속에서 손자를 안고 할머니가 웃고 있다.
 
할머니들보다는 할아버지들 주머니 사정이 좀 나은 편이라 그렇게 해도 할아버지들은 크게 불만이 없다고 한다. 다만 권중수 할아버지는 할머니 먼저 보내고 혼자 밥을 해결하는데 아들 내외가 그것 때문에 신경을 많이 써서 시간 저녁마다 들여다보고 해서 마음이 쓰이는데 혼자 살아보니 다른 건 안 불편한데 90이 넘어 끼니 찾아 먹는 게 보통 일이 아니란다. 사는 날까지 아프지 않고 몸도 마음도 온전하게 살다 가고 싶어 매일 오전 평화동 일대를 한두 시간씩 걷는다.
 
진명학교 앞 옥동삼층석탑
 
진명학교 앞 옥동삼층석탑 사진을 찍으러 갔더니 마침 문이 열려 있다. 삼층석탑이 있는 곳이 마당인 집에서 태어난 권태진씨가 마침 관리차 탑을 둘러보러 나와 있어 운이 좋게도 마주친 것이었다. 알고 보니 돌아가신 태진씨의 부친 권중근씨가 옥동삼층석탑이 방치되다시피 있는 것을 보고 탑이 위치한 구역의 철도관사집을 사서 평생 이 삼층석탑을 가까이서 보며 살았다고 한다.

▲옥동삼층석탑 앞에 좌불상을 모시고 법회를 하는 장면으로 이때만 해도 석탑왼쪽옆에 관사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평화동에 있는 옥동삼층석탑이 있는 자리에 석불상을 안치하고 스님을 모시고 기념법회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진명학교를 짓기 전이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젊어서부터 동양철학과 불교에 관심이 많았는데, 탑이 있어서 일부러 이 집을 사서 이사를 왔다고 하시더라고요. 처음에 이사 왔을 때는 탑 앞쪽 길가에도 관사가 있어서 도로가에서 탑이 잘 안 보였다고 해요. 탑 주위로 관사 집들이 둘러싸고 있어서 사람들이 탑이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아버지가 주변을 정리하고 시에서 지원을 받아 길가 집을 없애고 탑을 아침저녁으로 들여다보면서 사람들이 찾아오고 하기 시작했어요.”

▲석탑앞에서 아침예불을 드리는 모습 위로 당시만 해도 원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관사 건물의 창문과 굴뚝이 선명하다

▲담장이 없던 시절 권태진의 부친 권중근씨가 철도관사를 매입하고 탑 주변을 정비한 후 삼층석탑 뒤쪽으로 불상을 안치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마음 맞는 분들과 이 집에 모여서 불교공부도 하고 모임도 하고 하면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하니까 나중에는 비구니 스님 두 분이 찾아왔어요. 이곳에서 좀 거하게 해달라고요. 불교와 인연이 있다 보니 아버지께서 차마 거절을 못하시고 허락을 했죠. 그런데 두 분 스님이 거하게 되면서 불교신자들이 많이 찾아왔어요. 우리 아버지는 이곳을 종교시설로 만들 생각이 아니셨고 그저 탑을 지키면서 마음 맞는 이들과 철학을 논하고 불교를 이야기하고 하시는 그런 조용한 공간이었는데 스님들 때문에 시주받고 불공드리는 그런 공간이 되어버린 거예요. 그렇게 되니까 아버지는 여기를 스님들에게 내어주시고 정작 본인은 마음이 불편하니까 다른 곳에 계시다가 그 스님들이 시주돈을 모아 암산 쪽에 절을 지어 옮겨가신 후에 다시 이곳으로 와서 지내시다 15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3월달, 눈이 많이 오던 날에 돌아가셨죠.”

▲대원사 불자들에게 불교철학을 강의했던 부친 권중근. 오른쪽에서 두 번째

젊어서는 그저 철학공부를 하면서 불경을 접했고 마음으로 불교를 믿기 시작한 것은 40대가 넘어가면서부터였다는 부친 권중근은 자식들에게는 엄한 아버지였다고 기억한다.
 
“기억에 아버지가 진짜 엄격하셨어요. 젊어서 장교생활을 하시다가 전역하셔서 모든 면에서 질서와 규범 같은 걸 잘 지켜야 했어요. 모든 건 제자리에 있어야 했고 식구들 누구라도 어긋나는 일을 하면 혼나고 그랬죠. 어리다고 봐주시는 게 없었어요. 아침이면 늘 일찍부터 같이 불교 공부를 하고 모임하는 분들이 집으로 찾아왔는데 우리도 5시면 어김없이 일어나야 했어요. 어린 애들은 그냥 더 자라고 내버려둘 법도 한데 우리 아버지는 그런 거 없이 식구 모두 새벽 다섯 시면 일어나 씻고 마당 쓸고 골목길까지 쓸어야 했어요. 졸린 데 참고 일어나 골목길을 쓸고 나면 동네 어른들이 지나가면서 ‘아이구 누가 길을 이렇게 이쁘게 쓸어놓았나?’ 하셨는데 아버지가 그게 듣기 좋으셨는지 나중에는 저 골목길 끝까지 쓸라고 하셨죠.”

▲1970년대 중반 평화동 철도관사 13번지 집앞 골목길. 여동생을 안고 있는 엄마 옆에 서 있는 아이가 당시 서부초등학교 3학년이던 권태상이다.

그런 아버지를 보고 자란 칠남매 중에 태진씨의 오빠 둘이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됐다. 아들 둘이 불가에 귀의한다고 했을 때 좋다고, 좋은 일이라고 하셨던 아버지 모습을 기억한다는 태진씨는 지금 평화동에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탑을 돌보며 지내고 그 집에는 봉사 일로 늘 바쁜 태진씨 언니가 살고 있다.
 
평화5길 풍경 스케치
 
평화5길로 들어가는 길가에서 인연이 있던 대성장식 권석현 사장님을 만났다. 그 사이 도배강사자격증을 취득해서 따로 가게 2층에 도배를 가르치는 실습 공간을 마련해 두고 도배사를 교육시키고 있었고 무엇보다 큰 변화는 세 들어 살던 건물을 사서 건물주가 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맨 몸으로 자수성가한 내력을 알기에 말하지 않아도 그동안도 또 얼마나 부지런히 살아왔을 지를 알 수 있었다.

▲대성장식 권석현 사장
 
잠시 올라갔다 가라는 말에 권석현 사장님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더니 마침 도배사 한 분이 시험을 앞두고 도배지를 붙였다가 떼고 풀칠하고 하는 과정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바로 뒷골목 평화5길 5호관사 건물이 한 눈에 들어왔다.

▲평화5길에서 만난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5호관사집. 철도역장을 지내시고 퇴임한 어른이 사신다고 하는데 두번을 가도 부재중이라 만나뵙지 못했다.

▲평화3길에서 만난 9호관사

임하댐 보상받아 평화동과 운안동의 경계에 자리를 잡은 혜성방앗간
 
도곡리 절강리 원절강 3반이 친정인 혜성방앗간 안주인 김영자는 22살에 임동 사의2동 배씨네 팔남매의 장남 배극환과 혼인을 했다. 시댁이 사의2동 도연폭포 아래쪽에 있었는데 임하댐 때 물들게 되어 보상받고 평화동으로 집 사러 왔다가 평화동 골목 끝까지 올라와 지금 자리에 신축중이던 건물을 사서 혜성슈퍼를 차렸다.

▲예전 평화동에서 운안동으로 갈라지는 길목에 자리잡은 혜성방앗간집

“결혼하고 우리가 45년도 쯤에 강원도 태백 가서 고한시장에서 장사를 쪼매 하다 왔어.. 고한시장 살고 할 때는 거기가 광산이 잘 되던 때라서 장사가 잘 됐어. 지금 43살 되는 둘째를 거기서 낳고 장사하다가 시아버님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사의동으로 다시 들어가서 한 팔년을 살다가 임하댐이 된다고 물드는 바람에 보상받아 나왔지. 그 식구가 보상받은 그 돈 가지고 그냥 있으면 그렇게 많은 돈도 아니고 다 없어진다고 그걸로 건물을 하나 사기로 한 거지. 우리가 소개쟁이 하고 집 보러 오니까 지금 이 건물이 1층은 공구리 공사를 해 놓았고 2층은 이제 기둥만 세워놓은 상태였어. 막 올리기 시작해서 공사중이라서 2층은 들어가 보지도 못했지. 들어가 보지 않아도 공사하는 걸 보고 다 지으면 어떻게 되겠다 판단이 서서 이 집을 산 거야.”
 
마트도 없던 시절이라 장사가 잘 됐다. 얼마 안 있어 태화동에 있던 KBS 방송국도 옮겨왔다.
 
“우리 오고 나서 방송국 지었어. 그때 주위에 아직 다 밭이고 이 뒤에 우리집하고 한 집 건너 시청에 다니던 방과장이라고 하는 사람 집이 있었고 저 건너편에도 집이 두 채뿐이고 그랬어. 나머지는 전부 우리가 여기서 수퍼하면서 동네에 집들을 지었으니까. 그때는 레미콘 가지고 하는 것도 아니고. 직접 다 지었지. 방송국 터 민다고 할 때 우리가 거기 흙을 두 차를 사가지고 우리집 뒤에 부어넣어 마당하고 화단을 만들었어. 그리고 남는 흙은 이웃에 나눠주고.”
 
그러다가 혜성수퍼를 다른 사람에게 세를 주고 그전에 태백 고한시장 있을 때 고춧가루하고 곡식 빻아주는 방앗간을 했던 경험을 살려 음료수 대리점 세 주고 있던 걸 내보내고 혜성방앗간을 시작한 게 어느덧 삼십년이 되었다.
 
이곳에서 방앗간을 하면서 시집오니 막내 시동생이 초등학교 1학년이었는데 그 막내까지 대학 졸업하고 장가보내고 아들딸까지 결혼을 일곱인가 여덟인가 시켰다.
 
“방송국 들어서고 우리가 커브에 잇는 집이다보니까 수퍼를 하면서 집을 다 지었지. 그때에는 장비같은 것도 없고 사람이 다 집을 져서 나르고 공구리 치는 것도 인부들이 다 손으로 하고 했잖아. 그래 공구리 치고 할 때는 막걸리도 한 박스씩, 맥주도 많이 먹고, 그때는 주로 막걸리를 많이 먹었고 사발면 한 개 물 부어가지고 한 오십원 받았는데 뭐. 사발면도 많이 먹었어. 주전자에 물 끓여서 사발면에 부어주면 인부들이 들고 가서 먹기도 하고 안그러면 앞에 여 와서 먹기도 하고. 사람이 여럿일 때 어떨 대는 닷 되들이 주전자에 물을 한 주전자 끓여가지고 사발면하고 주면 그걸 가지고 가서 자기네가 부어먹고 막걸리 한 잔 하고 그게 참이었지 뭐. 여기 방송국 지을 때도 참이 별달리 먹을 게 없으니까 사발면 그런 거 먹고 했지. 방송국 생기면서 이 위에 놀이터도 생기고 했지. 이 동네 집들이 다 그때 지은 집들이 많애.”

▲평화윗길의 산아래집. 계단 끝에 보이는 국화도 가을색이다.

집도 사람도 인연이 잇는 법인지 옮겨 앉은 이 자리에서 부부는 하루가 다르게 집들이 들어서고 동네가 커가는 걸 보면서 동네 골목길 모퉁이 수퍼집에 이어 이 근방 사람이며 누구나 아는 방앗간을 하며 자식들 키워 시집장가 보내고 고추며 참기름이며 도토리며 국산만 고집하며 살고 있다. 아침 5시면 일어나 구시장 떡볶이 골목에 보낼 떡살을 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주문받은 떡을 하고 택배로 부칠 고춧가루를 빻는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한 달에 한 번 쉬는 날을 빼면 언제나 열려있는 혜성방앗간 문이다. 일을 하다 간간이 방앗간 앞을 지나는 이웃이 있으면 한담을 주고받기도 하고 다리 아프면 쉬어가라고 물 한 잔,일없이도 오가는 길목에서 아는 얼굴 보이면 커피 한 잔을 건네기도 하며 골목길을 지키고 있다.

▲평화윗길에서 만난 신유복씨가 집앞 에 마련해둔 골목길 누구라도 앉았다 갈 수 있는 의자.

평화동 입구에서 시작된 동네 골목길 이야기는 진명학교 앞 옥동삼층석탑을 지나 목욕탕 자리와 우물이 있던 안기천과 운안천이 만나는 길목 안에 사는 사람들 이야기를 듣는 사이 평화동 골목길이 운안동을 뒤로 하고 언덕 위로 굽어드는 혜성방앗간 앞에 와서 끝이 났다.
 
조용하고 교통 편리하고 친구도 많아 살기 좋은 동네가 평화동이라고 경로당에서 만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평화동 골목길에 다음에 가게 되면 골목 사이사이 숨어있는 집들과 석탑과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아보며 걸어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미홍
2019-01-07 오후 12: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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