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ㆍ예천 교류와 상생의 근대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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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ㆍ예천 교류와 상생의 근대기행

[우리동네-안동시 법상동2] 낙타고개를 가르는 정겨운 도심의 풍경
[안동시 공동기획연재] 2018 안동·예천 근대기행(10)

  • 백소애
  • 2019-01-07 오전 11:50:36
  • 3,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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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부에 있지만 변두리 같은 동네
손님이 없어도 매일 문을 여는 슈퍼
법상동 터줏대감 염 통장 이야기
법상동의 마당 깊은 집, 제비하우스
 
 
프롤로그
 
들마루에 나와 수박 갈라먹으며 폭염을 견디던 이웃들. 철제대문 아래로 낯선 사람이 지날 때마다 짖어대는 개, 텃밭에는 채소를 가꾸고 것도 없으면 화분에 열린 고추며 깻잎을 따먹는 사람들. 빙판이 생기면 연탄재 부셔 길을 내고 추운 겨울을 개량한옥 위태로운 미닫이문 문풍지 하나로 버텼던 골목의 풍경은 이제 점차 사라져간다. 최첨단에서 비껴간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아직도 골목을 지키고 있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동네, 법상동. 안동시 중심부에 위치했지만 변두리처럼 고즈넉한 마을로 폭염이 내리쬐던 지난여름부터 11월에 첫눈이 내려버린 가을까지 시간여행을 떠나본다.

▲법상동 전경 ⓒ 김복영
 
법상사가 있던 동네 법상동, 법석골
 
법상동은 조선시대 안동부의 서부지역으로 법상사(法尙寺)가 있었다 하여 예로부터 법상동, 법석골로 불렸다. 행정동인 법상동은 법정동인 법상동, 금곡동, 화성동으로 이루어졌는데 2005년에 행정동인 서구동에 통합됐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알던 법상동사무소는 없고 행정업무와 민원은 서구동 주민센터 아니 최근에 명칭을 바꾼 서구동 행정복지센터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법정동은 과거로부터 내려온 동네 이름이 쓰이는데 『영가지』에도 법상사동, 신세동, 당북동 등이 표기되어 있다.

▲영가지 안동본부도 (출처:규장각) - 지도 가운데에 성곽과 왼쪽 위로 표시한 곳이 지금의 법상동으로 보인다.

▲법상동 지도(출처:다음)
 
정회원 씨가 기억하는 법상동
 
고향인 남후면 단호리에서 법상동 주민이 된지 50년이 다 돼가는 정회원 씨가 더위를 피해 법석골쉼터인 정자에서 쉬고 있었다. 올해 나이 86세 그러나 총기는 디지털 치매 세대인 젊은 사람보다 나았다. 단호리 농부였던 그는 학업으로 인해 5남매가 뿔뿔이 흩어져 생활하는 것을 보다 못해 이사를 결심했다.

▲법석골쉼터에서 만난 정회원 씨

“농사짓는 땅이 몇 천 평 됐어, 요새 같으면 부자 소리나 듣지. 애들이 시내서 자취하며 학교 다니는 걸 보니 꼬라지가 안 돼, 단돈 천 원을 벌더라도 한 집안에서 써나가면 되는데 살림이 나뉘니까 도저히 농사로는 답이 없다 싶었지. 그래서 시내로 나와 살림을 몰쳤지.”
 
그렇게 법상동에 둥지를 틀고 시작한 게 표고 농사였다. 버섯 농사로 2남 3녀, 5남매를 키운 것이다.
 
“처음 왔을 때는 대신아파트도 산이고 지금의 금명로 위로는 논이랬어요. 20년 전쯤 금명로가 닦이고 아파트가 들어섰지. 요즘은 포크레인이니 도자(불도저)가 많잖아. 그때는 탱크같이 생긴 기계가 있었어. 곡괭이로 짜가지고 삽으로 파고 난리였지. 산허리를 끊어내 아파트를 지을 땐 말이 무척 많았어요. 업자가 한 1년이 걸렸어. 아마 무슨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라. 금명로 나고도 아스팔트는 한참 안됐었어. 대신아파트 길도 차가 못 다닐 정도의 흙길이랬는데 뭐.”
 
예전에는 자전거 타기도 힘들 정도의 비포장길이었다고 한다. 복개가 되기 전 법상동 도로에는 1미터가 넘는 거랑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빨래도 하고 멱도 감았다.
 
“이 거랑에 고기가 올라올 정도랬지. 상일아파트 입구 노인정 쪽으로는 다 하수구랬어. 집집마다 다리가 있었는데 없이 사는 사람은 나무 다리, 돈 있 니는 세멘으로 공그리해서 다리를 놔서 생활했지.”
 
굵은 나무를 징검다리 식으로 설치해놓고 살았다는 거다. 안동여고 뒷산 저수산(猪首山)에 대한 『영가지』의 기록을 보면 ‘안동부 서북 1리쯤에 있는데 영남산과 연이어 상대하여 솟아있으며, 영남산과 함께 고을의 주산이 된다. (중략) 동네에 작은 개울이 있는데, 이 저수산에서 발원하여 성중을 관류하여 금문탄으로 들어간다.’고 되어있다.

▲법석골 쉼터

법상동 거랑물이 신시장까지 흘러갔었지
 
“그때 법상동 물이 지금 광석동 농협 앞으로 해서 건영화물 사이로 나가면서 여관골목 통해서 신선식당 쪽으로 내려갔어요. 글로 내려가다보이 소나기만 오면 신시장 일대는 마구 물 개랑이랬어. 박스고 고무고 할 것 없이 감자, 마늘도 다 떠내려가고 형편이 없었어. 그러다 세멘으로 번듯하이 복개가 됐지. 지금은 법상동 물이 사장뚝으로 해서 낙동강으로 나가잖아. 지금 신시장이 저래 번창하게 된 것도 크게 오래 안됐어요. 옛날엔 다 뽕나무 밭이랬거든.”
 
지금이야 잘 닦여 있지만 당시에는 리어카만 들어가도 길이 넓다고 한 시절이었다. 지금 농협파머스마켓 자리에는 사발공장이 있었다.
 
“사발공장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우르르- 우르르- 나곤 했지.”
 
지금의 벧엘내과 뒤편이 소주도가였다. 한창 봄에 양식이 떨어졌을 때 쌀막찌인 술찌끼미라도 얻어먹으려고 줄을 서곤 했단다.
 
“뭐, 만고에 형편없던 시절이지. 해방 금방 되고 일본놈들이 강냉이로 비행기 기름을 한다고 기름을 짰거든. 그 납닥하고 곰사구 허옇게 핀 거, 그거라도 먹겠다고 배급을 받곤 했지. 워낙에 먹을 게 없어서.”

▲법상동 골목길

편리한 생활권 이만한 동네가 없어요
 
정회원 씨가 처음 법상동 왔을 때와 가장 큰 변화는 아무래도 도로와 건물이다. 그때는 막 한옥집이 들어설 쯤이었다. 지금은 가구 수가 예전에 비하면 반절이나 빠져나가고 돌아가신 어른들도 많고 빈집도 많고 원룸도 많이 생겼다.
 
“그때는 우리 집이고 남의 집이고 방 하나라도 비면 학생들이 와서 달라고 했어. 여고 애들이 방 얻을라고 숱하 돌아댕겼거든. 그러다 기숙사가 생기고는 자취방이 없어졌지.”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 기억에도 그에게 법상동은 최고 동네다. 안동 중심가에 위치해 실생활에서도 편하기 그지없다는 게 그 이유다.
 
“이 동네가 최고 좋아. 성소병원이 원래 자그마한 2층이랬잖아, 그 눔이 커지면서 건물을 달아내고 달아내더니 지금은 뒷동도 크게 짓고 규모가 커졌지. 이렇게 큰 병원, 구시장, 신시장, 농협, 우체국 뭐 다 가찹잖아. 그이 생활이 편치.”
 
왕자고무신 사장 권인달 씨, 윗대부터 살고 있는 안동버스 권희택 사장, 여고 올라가는 데 있었던 계란 팔던 양계장집, 크로바 사진관 김수원 사장, 그 사진관 1층에 이발관, 먼달 양조장 김순옥 씨네 기와집… 그의 기억에 소환되는 법상동 골목의 장소와 인물들이다. 한참 생각에 잠긴 그가 안동여고 쪽을 바라보았다.
 
“예전엔 논골이 형편없었어. 저 건너 빌라 들어선 데도 마구 다 산이랬지. 아래에는 참낭기가 있었고 샘이 있었어. 함석으로 지은 집에 우물이 있었거든. 그때 요랑하면 내가 오래 살았다. 이래 다 기억이 나네.”

▲1979년 안동여고 (출처: 안동여고 교지 옥련원 제2호)

법상동 골목을 점령했던 파란색 교복, 안동여고의 추억
 
법상동 가장 위에서 동네를 굽어보는 안동여고는 1942년 지금의 시청이 있는 명륜동 안동향교 임시 교사에서 개교를 했다. 개교당시에는 4년제로 교명은 ‘안동공립고등여학교’였다. 이듬해 옥야동 옛 영호초등학교 신축 교사로 이전을 했다. 46년에 1회 졸업생을 내고 고등중학교로 개편 후 51년에 ‘안동여자고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게 된다. 그래서 초창기 졸업생들의 앨범에는 46년과 51년의 졸업을 기준으로 두 개의 졸업 회차가 적혀있기도 하다. 70년에 안동여중이 분리되고 72년에 안동시 법상동 23-1번지(법상윗3길 32)인 현 위치의 신축교사로 이전을 했다. 정회원 씨의 기억에 의하면 옥야동에서 법상동으로 교사를 이전할 당시 안동여고 학생들이 책걸상을 들고 이사를 하던 모습이 생생하다고 한다.
 
그 옛날 재학생 중 운동장 풀 한번 안 뽑아봤던 기억이 있을까만, 신축 교사로 이동 후 학생들은 화단을 가꾸고 돌을 나르고 뒷동산의 녹음을 위해 양동이에 물을 길어 나르기도 했다한다.
 
고교 졸업 후 처음 오른 모교에는 녹음이 짙었다. 안동여고 학생들에게 가혹한 오르막길은 ‘왜 무다리가 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변명이 종종 되어주기도 했다. 부메랑 모양으로 구비진 본관, 간혹 멀리 남학교에서 거울 빛을 쏘아대기도 했던 교실과, 운동장 서쪽 편의 테니스코트장, 학교 뒷산의 옥련동산과 연못인 옥련지, 파란색 교복도 여전했다.

▲1979년 발간된 안동여고 교지 '옥련원' 제2호

교내 옥련도서관에는 졸업앨범과 교지인 『옥련원』 등 학교의 역사 기록물이 보관되어 있으나 초창기 자료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1977년도 졸업앨범과 1978년 창간한 『옥련원』의 1979년 제2호가 학교에 보관된 가장 오래된 앨범과 교지이다. 올 8월 퇴임한 이성숙 교장은 학교의 기록물을 체계적으로 보관하고 싶었는데 여건상 어려움이 많았다고 아쉬움을 남겼다.

▲올 8월 퇴임한 안동여고 이성숙 교장
 
지금도 학교에는 학창시절을 그리워하며 한 번씩 졸업생들이 올라오곤 한다.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 탁 트인 법상동 전경을 보며, 다닐 때는 그렇게 힘들었건만 졸업 후에는 여고시절을 그리워하며 교정을 둘러보기도 한다고. 마침 방문객이 있었는데 치매인 어머니가 유일하게 학창시절만은 기억하신다며 당시의 사진이 있나 문의하러 온 중년의 따님이 있었다.
 
졸업 후에도 잊혀지지 않는 것 중에 또 하나는 바로 교가다.
 
‘여기에 우리들의 진리의 전당, 푸른 반석 위에 선 안동여고’는 지금도 흥얼거릴 수 있는 귀에 익은 가사와 멜로디다. 자식들 출가시키고 시내 아파트생활을 정리한 후 현재 서부리에 귀향해 살고 있는 수필가 지유숙이 안동여고 교가의 작사가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무척 많다. 더 놀라운 건 그 교가는 그녀가 안동여고 재학시절 지은 가사라는 것이다.

▲안동여고 교가 (사진: 안동여고 교지 옥련원 제2호)
 
재학생 때 교가를 지은 지유숙
 
1957년 경북여고에서 부임한 김영집 교장은 북부지역 명문학교 안동여고가 명성에 비해 교세가 빈약하다하여 교가를 제정하기로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안동여고와 여중은 같은 교가에 끝부분 가사만 ‘안동여자중학교’ ‘안동여자고등학교’라 고쳐 부르고 있었다. 그해 여름방학 때 전교직원과 학생들을 상대로 교가 가사를 현상 공모했다. 현상금은 당시 큰돈인 만원이었다. 개학 후 응모된 작품들 중 당선작은 교내 문예부장으로 활동한 3학년 지유숙의 가사였다. 김영집 교장은 직접 서울로 상경해 유명 작곡가인 김성태 서울음대 교수에게 작곡을 의뢰, 지금의 안동여고 교가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지유숙. 안동여고 3학년 재학 시절 교가 작사를 했다. 당시 1학년은 단발, 2학년은 양갈래 묶음 머리, 3학년은 양갈래 땋은 머리였다.

“그 교가를 아침매이 익힐라꼬 학생들 오기 전에 틀어놔요. 등굣길에 옥야동 학교 근처 하숙집을 지나다보면 하마 그쯤가면요 스피커로 크다랗게 틀어놨는데 음악부장하던 아 음성으로 노래를 막 들려줘요. 전교생이 열심히 듣고 익히라고.”
 
지유숙 씨는 1958년 제7회 졸업생이다. 당시 아는 시어를 다 동원해 멋진 교가를 지은 문학소녀였다. 재학생이 지은 가사임을 알고 작곡가 김성태 선생도 깜짝 놀랐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니 가사 중에 ‘근역의 정기가 이어 서리어’가 있는데 요새 아-들이 근역이라 카면 아나 모르죠. 그래도 당시에 딴엔 내 상식을 다 동원해서 지은 거래요.”

▲법상동 제비, 이순구 안동대 교수 ⓒ이순구

한옥에서 유유자적, 법상동 제비 이순구 교수
 
‘법상동 제비’를 아시는가. 금명로 바로 위 법상윗길에는 ‘법상동 제비’가 있다. 시인 이상과 기생 금홍은 없지만 클래식을 사랑하는 안동대 식물의학과 교수 이순구와 천연염색을 즐기는 그의 부인 채영화가 있다.
 
이순구 교수가 법상동 한옥집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8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안동대학교로 발령받아 법상동에 왔다가 좁다란 골목 앞에 위치한 영남슈퍼에 집 난 거 없냐고 문의를 했다가 덜컥 계약하게 된 집이다. 여고 밑이라 아이들 학교 다니기 좋고 시장 가까워 장 보기도 좋을 것 같았다는 게 이유였다.
 
“저는 아파트 같은 새집을 얻고 싶었어요. 근데 애 아빠는 안동에 와서 한옥에 안 살면 평생 한옥에 살 기회가 없을 거라면서 일단 안동에 왔으니 한옥을 구하자 그래요. 막상 살아보니 또 참 정겨운 동네예요.”
 
15년을 거주하다가 2004년 12월말 아파트로 옮겨갔다. 처음엔 극구 반대했던 이 교수는 그러나 채 한 달도 안 돼 본인이 편안한 아파트 체질임을 알고 낭패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의 법상동 한옥집은 여전히 그의 독서토론 모임지로, 채영화 씨의 성당친구들의 공방이 되기도 한다. 물론 처음엔 매물로 내놨으나 팔리지 않은 탓도 있지만 지금은 내년 퇴직을 앞둔 이 교수의 또 다른 놀이터가 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그는 이곳에서 본의 아니게 고 3수험생을 둔 동네사람의 자녀 진로상담을 해주기도 하고 구시장, 신시장 구경도 실컷 했다. 복작거리는 삶을 오롯이 보여주는 시장 나들이는 그에게 치유의 공간이 되기도 했다. 가장 좋았던 추억은 구시장 찜닭골목의 ‘그 문화’다실에서 차 한 잔으로 하염없이 음악을 듣던 기억이다.

▲제비 하우스 내부

법상동의 마당 깊은 집, 제비 하우스
 
지인들 사이에서 어느덧 유명세를 탄 이 교수의 법상동 한옥에는 마종기 시인도 다녀갔다. 방명록에는 이곳을 다녀간 이들의 기록이 남아있다. 좁은 골목을 들어와 대문을 열고 들어오면 생각보다 넓은 마당이 있다. 이곳에서 법상길의 전경을 볼 수 있다. 눈이 오면 쌓인 눈을 고스란히 밟을 수 있고 비가 오면 바로 옆에서 전 굽는 소리처럼 빗소리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 아파트 단지 안에 버려둔 자개농을 갖고 와 집안을 꾸민 채영화 씨의 인테리어 솜씨가 빛을 발한다. 들창에 수놓은 광목천과 갖가지 소품은 성당모임 지인들과 품앗이 한 것들이다. ‘법상동에서 만나자’고 하면 으레 제비 하우스에 모이는데 각자 음식 한 가지씩 준비해서 모인다고 한다.

▲3년째에 접어드는 독서모임 회원들

이 교수도 이곳에서 모임을 갖는다. 바로 독서모임이다. 2016년에 시작된 모임에는 안동대 출신의 곽종태, 임세권, 문태현, 이희재, 임재해 교수와 이진구 전 안동문화회관 관장이 참여하고 현역인 이순구 교수가 작년에 합류했다. 한 달에 한번 모여 돌아가면서 책을 정하고 모두들 읽고 와서 토론한다. 장르도 다양하다. 톨스토이부터 김훈, 한강, 데이비드 소로, 유발 하라리, 아서 밀러… 그러다 얼마 전엔 임세권 교수가 추천한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만화 『리틀 포레스트』까지. 일상의 쉼표 하나 찍을 수 있는 곳이자 그만의 골목 인문학을 그려나갈 수 있는 법상동 제비하우스는 그런 공간이다.

▲법상동 제비 하우스는 이순구, 채영화 부부가 독서모임, 천연염색, 함께 다과를 즐기는 문화공간이다.

▲마당에서 보이는 법상동 전경 ⓒ이순구

올디스 벗 구디스(Oldies But Goodies)
 
‘제비통신’으로 일상을 기록하는 안동대 이순구 교수는 자칭 타칭 제비로 불린다. 일본 츄쿠바에서 1년 연구년으로 지냈을 때 그곳 시립도서관은 그에게 휴일의 순례지였다. 무덥고 습한 날씨가 계속되던 어느 날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를 읽게 된다. 거기에 시코쿠의 어느 휴양지에서 퇴직금을 모아 음악감상실을 연 영감의 이야기가 나온다. 거칠고 무식한 한 트럭운전수가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베토벤 피아노3중주 대공을 듣더니 그 음악에 빠져 순해지는 장면이 나오게 되는데 굉장히 인상적으로 보였다고. 그 참에 오디오가 숙소에 있었으면 좋겠다 싶어 바로 오디오를 구입했다. 그 또한 나중에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이 가득한 이상과 금홍의 예술공간을 꿈꾸어서인지 모르겠다. 언젠가 그는 법상동 한옥을 제비카페로 만들어 책을 열심히 혹은 태만하게 읽느니 마느니 하면서 좋은 친구들과 담소를 나눌 수 있는 북카페 혹은 그러한 문화공간을 만들고 싶다고 했었고, 몇 할 정도는 지켜지고 있는 셈이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가슴에 금이 간’ 성북동 비둘기처럼 법상동도 신축원룸이 늘어나고 유행처럼 번지는 도시재생의 소용돌이로 언젠간 들어갈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법상윗길의 보성슈퍼
 
손님이 없는 구멍가게, 보성슈퍼
 
“둘째 놈이 여기서 났으니 40년 넘었지 싶어요.”
 
금명로를 지나 언덕을 오르면 오른쪽으로 바로 보성슈퍼가 보인다. 올해 75세인 김덕모 사장은 매일 새벽 4시면 눈을 뜬다. 가볍게 등산을 하고 손님은 오지 않지만 문을 연다. 그것은 김덕모 사장만의 인정 습관이다. 오늘 하루 건강하게 문 열고 문을 닫고, 무사하게 하루를 보내고 아늑한 집안으로 들어가 휴식을 취하는 일과를 반복한다.

▲보성슈퍼의 김덕모 사장

김덕모 사장은 안동 남후면이 고향으로 초등학교 졸업 후 바로 객지생활을 시작했다. 파주 25사단 있다가 월남 파병 가고 제대증은 36사단에서 받았다. 고향으로 돌아 와 작은 슈퍼를 열었다. 법상동 골목에만 성미슈퍼, 영남슈퍼, 보성슈퍼 등 여러 가게가 있었지만 장사는 곧잘 됐다. 호시절 이 작은 슈퍼로 자식들 건사했다. 핫도그 하나만 둘둘 말아 튀겨내도 여고생들이 삼삼오오 입에 물고 다니던 때였다.
 
“예전에 장사 잘 될 때는 밥도 늦게 먹었어요. 애들 학교 올라가고 내려올 때는 밥 먹다가도 숟가락 놓고 일어서기 바빴지. 우리 장사할 때는 설에만 문 닫았지 쉬는 날이 어딨어요. 요즘은 사람들이 일요일도 문 닫고 하더만.”

▲팔리지 않은 물건에 먼지가 쌓여간다

그저 열고 닫는데 의의를 둔다
 
방에만 있으면 답답하니, 세가 안 나가니 가게문을 열어둔다.
 
“못 믿을지 모르겠지만 하루 백 원도 못 팔아. 전에 팔던 찌끄레기 있는 거 그냥 펼쳐놓은 거지. 장사는 그래요. 내 집이니까 이래 열고 앉아있지.”
 
오랫동안 해오던 거라 정리도 못하고 장사라고 볼 것도 없다고 한다. 그래도 급한대로 소주 한 병, 담배 한 갑은 나가지 않을까, 그마저도 아니라고 손사래를 친다.
 
“그카면 거짓말이라 카는데 이젠 물건도 없으니까 뭐. 전에는 길이 요기 뿐이랬는데 이젠 길이 저짜 안동여중 쪽으로도 나고 경안여중 쪽으로도 나고 애들도 새 길로 많이 댕기고 글치. 뭐 길뿐이 아니고 이제 구멍가게는 다 헛일이래. 홈플러스가 떡하니 들어섰는걸, 일주일 치 먹을 거 장 봐서 차에 싣고 오면 그만이잖아.”
 
깔끔한 입성의 그에게 고생을 안 한 것 같다고 말하자 “세상 고생 안하고 산 사람이 어딨니껴. 하기사 노가다하는 사람 되면 편치요.”한다.
 
전원이 꺼진 냉장고 그리고 그 안에 든 소주, 유통기한을 넘긴 리믹스 소주, 오뚜기 쇠고기 스프와 소고기 다시다, 코주부표 복개미 화투와 일회용 라이터, 한 번도 바뀌지 않은 미닫이 나무문까지 세월의 손때가 고스란히 묻은 공간은 최근 트렌드인 복고와 빈티지를 가미한 오브제 전시 공간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가 마당 있고 가게 딸린 집을 소유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안도하고 있었다.

▲낙타고개, 금명로

법상동의 롤러코스터 낙타고개 금명로
 
이젠 금명로가 아니라 단원로다. 금명로는 금곡동과 명륜동을 동서로 연결하는 도로로 두 개의 동 앞머리를 딴 도로명이지만 이제는 단원 김홍도가 안기찰방으로 부임해 지냈던 안기동을 잇는 도로라는데 더 큰 의미를 두었는지 단원로로 변경되었다. 금명로는 서당골, 법석골, 잿골 등 자연마을이 도심의 변화 속에서 확장되고 중고등학교와 부설초등학교가 있어 학생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다. 도로의 경사면이 흡사 낙타등과 비슷하다하여 ‘낙타고개’ ‘낙타도로’로 더 불리는 금명로는 약 20년 전쯤 길이 닦였다. 금명로를 건너 법상길로 내려간다. 이곳 사거리에서 살다가 물 건너 ‘먼달 양조장’을 운영했던 김순옥 씨네 집 부근으로 이사 간 염덕상 통장을 만나기 위해서.

▲법상동의 터줏대감 염덕상 통장. 20년 넘게 통장일을 봐왔다.
 
법상동의 산증인, 염덕상 통장
 
“알 만한 사람들은 세상 떠나고 토박이는 이제 대여섯 집 밖에 없을 걸?”
 
법상윗길에서 법상길로 이사 온 염덕상 통장이 가만히 꼽아본다. 올해 나이 90세, 이웃들이 하나둘 떠난 법상동을 그는 지키고 있다. 이제 호칭도 통장이 아니건만 오랜 세월 그는 새마을지도자로 그리고 통장으로 일해 온 사람이다. 법상동의 제일 큰 변화를 꼽아달라는 말에 그는 골목, 도로, 집의 변화도 아닌 사람이 변했다고 이야기를 꺼낸다.
 
“요새 보면 이웃사촌을 모르고 지내요. 사람을 모르고 지내니까 제일 큰 변화가 사람이죠. 내가 나이가 많아 그런지 모르지만 젊은 사람끼리도 서로 대화를 안 하고 이웃 집 성도 모르고 사는 거 그게 참 이해가 안 돼. 옛날에는 요 집이 누구네 집이고 저 집은 또 누구네 집이란 걸 다 알았는데 지금은 앞뒷집 사람 성을 모르고 사니까…….”

▲미싱 장사로 가정을 꾸려갔다.

남문동이 고향인 염 통장이 군에 다녀온 후 휴전이 되었다. 이후 총각 때부터 법석골에 들어와 이곳에서 결혼하고 정착했다. 친구와 동창이 살기도 했지만 국회의원, 교장, 시장, 읍장 등 성공한 권씨들이 많이 살아 부자동네, 생활의 질이 좋은 동네로 알려졌었다.
 
“금명로에서 로타리 올라가는 카도 바로 첫 번째 집이 우리 집이었지. 법상윗길. 그 쪼만한 집에서 복작거리며 살았어. 어른 살아계셨지, 우리 내외에다가, 3남 2녀 애들 다섯에, 생계 곤란한 남매까지 내가 키웠어요.”
 
없이 살던 시절 인심은 더 후했다.
 
옆지기 성함은 김월분 안젤라. 염 통장보다 6살 연하다. 건강했던 부인은 6년 전부터 꼼짝을 못하고 식물인간으로 누워있다. 요양병원에 모셔다 뒀는데 매일 거기로 출근을 한 게 어언 6년이 되었다. 큰딸이 반찬이며 빨래며 여러모로 집에 왔다갔다 신경 써준다. 큰딸도 환갑나이라 작은 나이가 아니다.
 
차도 못 다니는 통로에 새마을 사업이 시작되면서 마을의 외적 변화가 시작됐다. 도로가 좋아지고 토담을 허물고 계량 수리를 하고 하수구 정비사업에 연일 발품을 팔았다. 지금은 8개 통이지만 그때는 4개 통이었다. 집 세대주가 한 통에 30세대가 안됐던 시절이다. 20년 넘게 3통 통장을 맡아 나이가 많아 물러서게 될 때까지 우직하게 일했고 그 공로로 훈장도 받았다. 1988년에는 새마을지도자 활동을 했는데 당시 성화 인수단으로 경상북도에서 차출 되어 올림픽 그리스 성화 인수단으로 갔던 기억에 감회가 남다른 그다.

 
법상길로 온 건 2000년도. 1958년도에 법상윗길에 살았으니 자그만치 60년 세월이다.
 
그는 재봉틀 행상으로 가족을 건사했다. 혼자 벌어서 애들 교육 시키고 먹고 살아야했으니 뭐라고 해야만 했다.
 
“그때는 재봉틀 사는 사람은 생활수준이 괜찮은 사람 아입니까. 시집올 때 부잣집에서 썼는데 그때는 경제가 좋은 집은 재봉틀이 제일 필요할 시기고 또 꾸매 입는 집이 많았던 시절이거든, 그래서 행상을 댕기면서 신청하면 갖다 조립해주곤 했어요.”
 
흔히 알고 있는 부라더 미싱 등 제품은 국산도 있고 일제도 있었다. 일제가 조금 더 비싸긴 했지만 국산도 품질이 좋았다. 그때 재봉틀 한 대 가격이 논 한 필지를 살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처럼 한꺼번에 큰돈은 못 주니까 월부로 계약을 해놨다가 추수할 쯤 돼 일시불로 받기도 했다.
 
법상동 도랑에 대한 기억도 다른 이들과 비슷하다.
 
“여기 도랑이 저까 대석동 골목 끄트매이 지금 신선식당 들어가는 고쪽으로 계속해서 흘렀어.당북동 끄트매이까지 넓이는 한 2m는 됐지 싶어요. 홍수 나고 그러면은 그 물이 급류로 내려오니까 인명 사고도 나고 집도 수해보고 옥야동 광석동은 그야말로 물바다가 됐어요. 배수구가 옳게 안 되어 있으니까.”
 
새마을 운동으로 콘크리트 치고 그러면서 길도 닦이고 본인이 살기 힘들어도 정작 잘살기 운동에는 참여를 해야 했던 시절이다.

▲스물둘에 법상동으로 시집 온 김종성 씨

김종성이 기억하는 법상동
 
안동주부문학회 초대회장 김종성. 올해 85세 되신다. 지금도 동네 단골미용실 ‘개성시대’에서 드라이 한번 넣고 마실을 다닌다. 푸석한 모습 보여주는 건 예의가 아니라 여기는 멋쟁이. 그니는 염 통장과 함께 법상동의 변화를 앞장서 겪어낸 인물이기도 하다. 오랜 세월 새마을부녀회장을 맡아 안팎으로 바쁘게 지냈다. 몇 해 전 사별하고 홀로 되셨다. 남편은 교직에 있었다.
 
“우리 바깥 양반 이름이 권오순, 내 이름이 김종성이잖아. 어떤 사람은 우리 부부 더러 ‘오순 할머니’ ‘종성 할아버지’이캐. 둘이 이름이 좀 바뀌었지?”
 
법상동은 시집와서 정착한 곳이다. 스물둘에 결혼하고 스물셋에 신행을 왔다. 60년이 넘은 거다. 집 위치는 변함없이 그때 그 자리 터에 집만 새로 지었다. 6.25때 폭격으로 반은 파괴되어 방 2개, 마루 하나인 집에 시집을 왔다.
 
“시집 와보니 어른이 다섯 분 계셔. 시조모, 시조부, 혼자 된 시백모, 시어른 내외까지. 내가 예천이 고향이라, 거기서 용문국민학교 선생을 했는데 교장선생님이 중신을 했어. 교장선생님 믿고 시집을 왔는데 형편이 이런 줄 몰랐지. 남편은 그때 안동중학교 과학 선생이었는데 스물일곱 되도록 장가를 못가고 있었지.”
 
‘형편 어려워도 사람은 좋다’고 오지랖 넓게 중신을 선 교장 선생님 덕(?)에 법상동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하루는 친정엄마가 왔다가 사는 모습을 보고 놀라서는 “아이구 야야, 그 구뎅이 살면서 어예 암말도 안 했노.”하며 눈물을 훔치셨다.
 
“뭐 속아도 많이 속았지만 어쩌노. 우리도 6남매 남동생 3명인데 우리 아부지가 교육열이 높았지. 옛날에 예천에 여학교가 없었는데 우리 언니를 대구 신명여고까지 유학 보내셨어. 동생들 셋을 서울에서 학교 시키고 나까지 공부 시켰지. 나는 ‘시집 두 번 갈 것도 아닌데 말해 뭐하노.’ 했지.”
 
당시 용문국민학교 3학년 담임을 했는데 그때 학생들이 지금 일흔이 넘었다. 그 학생들이 올 봄 연락을 해왔다. 보문이 고향이니 수소문해서 친구들한테 연락해서 알아내 성소병원 앞에서 조우하게 된 것이다. 옛날에는 사범학교만 나오면 교사를 했던 시절이라 갓 스무 살에 본 제자들이니 65년만이었다. 지난 4월 13일에 안동에서 1박 하면서 모임을 가졌고 김종성 씨도 참석을 했다. 초등학교 때 살아계신 선생님이 김종성 씨 하나라고 할 때는 무언가 마음에 싸한 바람이 불기도 했다.

▲법상동 골목길. 옛날 법상만화방 가기 전 골목이다.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시절, 법상동의 추억
 
“법상동 처음 왔을 때 기억으로도 기와집이 좀 있었어. 법석골엔 부자가 많이 살았거든. 왕자고무신 사장, 안양전문대학교 학장 김상철 씨, 안동고등학교 교장선생님, 정동호 전 안동시장까지…. 안양전문대학교 김상철 씨네 집을 성소병원에서 사서 주차장으로 만들려고 했는데 김 학장이 ‘그럴 거면 내가 안 판다’ 캤어. 요새는 거가 원룸이 되었더라고.”
 
법상동 도랑에서 빨래를 하며 신혼을 났다.
 
“우리 시집이 인심이 좋은 집이라 어른들이 혼자 하지 말고 꼭 시누들이 학교 다녀오면 빨래하라고 했어. 일요일에 어른들이 한복 벗으면 시누들이랑 같이 빨래 다녔어. 집에 수도고 우물도 없었지.”
 
동네에 오래 살고 터도 많은 감나무집에 우물이 있었다. 착한 시누들은 놀러를 가더라도 물을 꼭 물동이에 채워놓고 갈 정도였다. 물론 어른들의 엄명이 있었지만.
 
“내가 없이 사는 집에 시집와 아들을 연이어 셋을 낳으니 어른들이 그 아들이 소중해서 일도 할 줄 모르는 손부를 대우를 잘해주고 그렇게 아껴주셨나봐.”
 
빨래도 꼭 시누가 와야 함께 시키고 물도 절대 못 긷게 하고..시누들도 어른들 말을 잘 따랐다. 남편은 안동중학교 훈육계 담당으로 간혹 극장표가 생기곤 했는데 하루는 시누가 ‘언니 오빠하고 둘이 구경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애를 대신 봐준다고 해 큰맘 먹고 영화를 보고 오는데 시누가 한겨울에 애를 업고 무명천으로 쓰개를 씌워서 도랑가에 발을 동동 구르며 섰더란다.
 
“이 추운데 왜 여 나왔노 하니 할아버지 모르게 갔는데 애가 울면 할아버지가 찾을까봐 밖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캐. 우리는 지금 나이에도 친구들 모이면 모진 시집살이 얘기 하는데 나는 애들한테 그래. 나는 너네 맘 상할까봐 할 말이 없다. 돈이 없어 그랬지 정말로 사랑을 너무 받았다.”
 
그니에게 법상동은 비료포대를 장판대신 깔고 잘 정도로 어려운 살림을 시작했던 곳이자 사랑하는 사람들과 평생을 함께 했던 곳이다. 언 손을 호호 불며 어린 시누와 빨래를 했던 곳이고 남편과 만나고 남편을 보낸 곳이다. 그리고 지금, 홀로 지내며 가끔은 책도 읽고 가끔은 시도 쓰고 가끔은 친구들도 만나고 그러면서도 외출 때엔 꼭 ‘개성시대’ 미용실에 들러 드라이하는 것을 빠뜨리지 않는 멋쟁이 할머니로 법상동 골목을 거니는 것이다.

▲법상길

에필로그
 
바야흐로 빵 하면 맘모스, 선물 구입은 몽블랑, 미팅 하면 소문난 제과, 햄버거는 달라스, 분식점은 코끼리, 레스토랑은 리, 시화전 하면 학생회관 시절이었다. 함께 했고 부재의 공유가 가능했던 당시에는 요즘처럼 독거노인의 쓸쓸한 죽음도 이웃에서 오랫동안 모르진 않았을 거다. 함께 한다는 것이 힘들어진 시대다. 능소화가 핀 담장, 돌축대 사이에 핀 풀꽃, 시멘트에 찍힌 발자국, ‘꽃보다 파’가 심겨져있는 빌라의 화단. 정겨운 도심의 법상동 풍경 스케치도 바삐 담아내야한다. 어쩌면 곧 사진으로만 볼 수 있는 풍경이 될 수도 있기에. 110년만의 폭염을 거쳐 11월에 첫눈이 내렸다. 이제 다가올 추위에 법상동 골목길도 월동채비에 들어설 거다.
 
아래로는 법상동과 금곡동을 금 밟고 선 성소병원과 법상동의 소식을 나르는 법상우체국, 위로는 저수산을 받치고 선 안동여고와 안동여중, 법상대신아파트와 상일아파트 법석골과 논골의 중간을 가로지르는 낙타고개 금명로까지 법상동을 기억하고 상징하는 공간은 그렇게 사람들의 수많은 발자국으로 세월과 함께 기록되고 기억될 것이다.

백소애
2019-01-07 오전 11:5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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