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ㆍ예천 교류와 상생의 근대기행

경북기록문화연구원

더불어 사는 삶의 힘
오늘의 기록은 내일의 역사

스토리 아카이브

홈으로 > 스토리 아카이브 > 안동ㆍ예천 교류와 상생의 근대기행
안동ㆍ예천 교류와 상생의 근대기행

[우리동네-예천군 예천읍 남본리2] 나무전봇대가 우뚝 서있는 마을
[안동시 공동 기획연재] 2018 안동·예천 근대기행(9)

  • 신준영
  • 2019-01-07 오전 11:49:49
  • 2,611
예천 원도심의 중심 남본리 
철물점으로 자식 건사한 권점숙 
고추전으로 유명한 예천 구시장
 
도청 신도시 형성과 예천군청 이전에 따라 예천읍 원도심 상권의 경기 위축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골목상권, 토속 음식점, 재래시장 육성 등 도심 재생 해결책들을 마련하려는 노력들도 진행 중이다. 원도심의 중심지였던 남본1리와 구시장 상가 터줏대감을 찾아 그들의 애환과 마을의 변천사를 들어보자.

▲ 1972년 11월 1일 봉화 닭실 친정에서 결혼식을 올린 권점숙 부부
협동농공사를 운영한 권점숙
 
권점숙 씨는 1947년 봉화 닭실 출신으로 안동여고와 안동교대를 졸업했다. 고향 봉화에서 4년간 교직 생활을 하다가 결혼하면서 퇴직했다. 결혼식은 봉화 친정에서 전통혼례로 치렀는데, 당시 남편이 군인 신분이어서 휴가 날짜를 가늠할 수 없으니 예식장을 잡는 게 불가능했다. 마침 사진관을 하는 남편 친구가 있어서 결혼식 사진은 칼라로 남길 수 있었다.

▲ 1974년 2월 안동 영호루에서 남편이 군대동기들과

결혼 전 원래 시댁은 청복동이었다. 시어른이 농협 구판장 쪽에서 장사를 하다가 현재 집이 있는 남본1리 쪽으로 이사를 했는데 권점숙(47년생) 씨가 시집을 온 건 그때였다. 그녀가 결혼할 무렵 시어른은 철물점을 하고 있었다. 그 철물점 이름이 협동농공사였다. 40년을 넘게 장사를 했으니 협동농공사는 예천에서는 꽤 유명한 집이다.

▲ 예천 남산에서 시누이와 함께, 오른쪽이 권점숙 씨다. 뒤로 충혼탑이 보인다.
“우리 시어른이 참 잘생기셨어요. 늘 빙그레 잘 웃으셔서 인상이 좋았지요. 도시 손님들이 이 집 할아버지 보고 싶어서 벌초할 때마다 한 번씩 낫도 사러온다고 그랬는걸!”
 
권점숙씨는 슬하에 형제를 두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갈 데가 남산 밖에 없었어. 놀러간다 하면 애들 데리고 남산에 가거나 다리 밑에 가서 놀았지.”

▲ 1984년 5월 1일 예천국민학교 어머니회장 시절의 권점숙 씨

형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전교 어머니 회장직을 맡기도 했다. 고맙게도 둘 다 공부를 꽤 잘했다. 고심 끝에 시어른과 남편은 남본리에서 철물점 운영을 계속 하기로 하고 권점숙 씨는 두 아들의 교육을 위해서 대구로 이사를 나갔다.

▲ 작은 아들 예천유치원 졸업식에서 시부모님과

가족이 차례로 떠나갔지만 계속 이어진 가업
 
그러나 살다보면 미처 예측하지 못한 큰일들을 겪어내야 하는 때가 있다.
 
“1993년 아이들 아빠가 갑자기 돌아가셨어. 큰애 고3 때야. 큰애 대학 입학 시켜놓고, 둘째 고3 때 대구에서 돌아왔지. 시어른하고 같이 장사하다가 시어머니 돌아가시고, 시아버지와 둘이서 10년을 철물점을 했어. 애들 대학 졸업하고 2003년에 아버님도 돌아가시고 내 혼자 또 한 10년 했지.”

▲ 1977년 1월 14일 국회의사당 관람기념. 중간줄 왼쪽에서 여섯번째가 권점숙 씨

권점숙 씨는 가게 일에 특별한 관심이 없었다. 돈 모으는 재미도 별로 알지 못했다. 돈이 많지는 않아도 욕심을 내본 적이 없다. 있는 만큼만 쓰고 있는 만큼만 하자는 주의였다.
 
“봉화서 교직생활 4년 하다가 시집오면서 그만뒀지. 68년도에 교대 나와서 71년까지 4년 한 게 다고 시집 와서 그전까지는 사회생활을 안했어. 아이들 아버지 일찍 돌아가셔서 나는 멋도 별로 안내고 아이들 건사하고 시어른들 수발하느라 경황이 없었지. 꼼짝을 못하니까. 나는 장사를 할 체질이 안됐어.”

▲ 예천청년회의소 78년 제1회 정기총회 및 77년 전역식. 남편은 예천청년회의소 활동을 했다.

철물점 사장에서 예천군의회 의장으로
 
권점숙 씨는 2010년 예천군의원에 비례대표로 진출하여 2012년에서 2014년까지 군 의장을 역임했다. 역시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내가 이걸(철물점) 하다가 갑자기 의회를 나가게 됐잖아. 그때 우리 손자가 나왔어. 아들 며느리가 서울에 있었는데 아이를 감당을 못해. 며느리 친정도 여기고, 나도 여기 있고 해서 내려오라 했지. 그래서 이 일을 했어.”
 
의원 시절은 말 그대로 경황이 없을 만큼 바쁘게 지냈다. 초선의원 시절 1년 동안은 지켜보며 공부했다. 그리고 의원들 만장일치로 의장이 됐다. 전국에서도 비례대표가, 그것도 여자 비례대표가 의장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보통 7월에 임기가 시작되는데 의회 사정으로 10월에 임기가 시작됐다.

▲ 1982년 10월 예천국민학교 운동회

▲ 1982년 10월 예천국민학교 운동회

▲ 1984년 예천국민학교 가을운동회

큰 손주를 세 살 쯤 키워놓고 며느리가 운영할 약국을 계약을 해두었는데 둘째가 들어섰다. 하는 수 없이 계약한 약국을 비워두었다가 둘째 손주가 백일을 지내고 나서야 아들, 며느리가 약국 문을 열었다. 의회 일 하는 동안은 철물점 문은 닫아 놓았다. 의장하면서 가게 일을 하면 혹여나 말이 있을까 싶어서였다.
 
“의장할 때는 정신없이 돌아다니느라 머리 할 시간도 없었어. 경황 없이 하고 나왔지. 일이 많았어. 의회는 집행부 견제 기관이잖아. 예산이 올라오면 견제하고 의결하고 조례 결정하고. 그게 의원들의 활동이니까. 나는 의장할 생각도 없었고 할 수도 없고. 사실 시골이다 보니 할 사람이 없다하니 들어갔지. 비례대표가 의장을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지역구 의원들이 있으니 사실 비례의원이 할 수 있는 일은 적어. 내가 지역구에 나서면 월권이 되잖아. 당시에 복잡한 일이 있어서 의장을 맡을 수밖에 없었지만은.”

▲ 협동농공사가 있던 자리. 지금은 덕흥사로 변했다.

40년 세월을 정리하고 사라진 협동농공사
 
의원이 끝나자 의장 임기도 끝났다. 처음에는 주변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다는 것도 그는 알고 있었다. 욕심을 내지 않았다. 그러니 무사히 임기를 마칠 수 있었던 거 같다고. 그러고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돌아와서 가게를 정리 했다. 40여년 쌓아온 물건이 살아온 내력만큼이나 많았다. 지금의 건물을 새 단장하고 1층은 세를 줬다. 그 자리에 전기재료업체인 덕흥사가 들어와 있다.
 
권점숙 씨는 남본1리 상가 터줏대감으로 광신상회와 파크랜드를 꼽았다. 그리고 기억에 남는 이웃으로 동아당약방을 떠올렸다.
 
“기억에 남는 이웃은 지금 크로커다일 자리에 동아당약방이라고 있었는데 그 댁 아주머니가 조산원이었어. 내가 시집오니까 정말 예쁘게 해놓고 살더라고. 수석 좋은 걸 해가지고 2층에 전시를 해놓고 그랬어. 안에도 정원이 정말 예뻐서 구경 오는 사람도 많고 그랬지.”
 
71년 갓 결혼해서 왔을 때는 남본동 구시장이 더 컸다고 한다.
 
“진폐증 환자들 치료하던 권병원이 동본동 상설시장 쪽으로 옮겨갔어. 병원이 가니까, 큰 병원 따라서 상권이 형성되니까 1975년에 구시장 상권이 상설시장으로 옮겨갔어. 그때 옮겨간 상인들이 아직도 거기 그대로 있어.”
 
“사람이 변하지 않고는 방법이 없어”
 
군청 이전과 도청 신도시 형성으로 위축된 원도심 상권에 대한 대안으로 그는 상가의 외형적 정비와 더불어 상인들의 친절교육과 서비스 정신을 꼽았다. 아무리 예산을 쓰고 단발성 이벤트를 진행하여 시선을 끈다고 해도 안에 있는 사람이 변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노인 인구의 증가에 따른 노인 대상 사업을 구상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는 의견을 냈다.
 
“맛고을도 도로는 예쁘게 해놨어. 처음에는 도청 사람들이 제법 왔어. 그런데 신 도청에 상가가 형성되면서 예천 젊은 사람들이 그리로 많이 옮겨갔어. 빈집도 많고. 예천이나 안동이나 같애요. 문제는 사람들이 변해야 돼. 사람이 변하지 않고는 방법이 없어.”
 
지금은 손주들 보는 일이 그의 주된 일이다. 그게 제일 큰 기쁨이고 보람이다. 손주들이 초등학교 3학년, 1학년이다. 아들 내외가 서울에서 내려 온지도 어느덧 10년이 되었다.
 
그는 군 의원 임기를 끝낸 후 마음이 편해져서 체중이 불었다며 특유의 밝은 웃음을 지어 보인다. 본인의 흔적을 전혀 남기지 않으려고 작정을 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모습을 찍히는 것을 한사코 거부했다. 그러나 그가 들려준 앞선 말들과 실행들은 뒷사람들에게 오래 남아 기억될 것 같다. 그러니 그의 바람이 제대로 이루어지기는 어려워 보인다.

▲ 올해 준공된 남본리 222-104번지의 남본1리 마을문화쉼터

올해 준공된 남본1리 마을문화쉼터
 
최근 남본1리에는 동민들의 오랜 숙원이던 마을회관이 설립되었다. 예천읍농촌중심지 활성화사업에 선정되어 ‘남본1리 마을문화쉼터’ 라는 이름으로 지난 7월에 공사가 마무리 되었다. 연면적 218m2의 2층 건물로 1층은 경로당으로, 2층은 회의실로 쓰인다. 경로당을 찾았을 때 주민들이 모여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다. 낯선 방문객에게도 함께 할 것을 권하는 인심은 이곳도 예외가 아니구나 싶었다.

▲ 남본1리 이장 유영화씨가 운영하는 예일종합건재

남본1리 유영화 이장이 운영하는 예일종합건재로 찾아갔다. 마을회관 건립이 그의 오랜 숙원 사업이었다는 것을 기사를 통해 알고 있었다. 그는 예천읍농촌중심지 활성화사업 추진위원장을 맡아 마을문화쉼터 건립을 이뤄냈다. 유영화 이장은 마을문화쉼터 개소식 때의 인사말이 적힌 자료를 보여주며 마을 역사에 관한 기록이 따로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 옛 뉴영제사(주)에 있던 나무전봇대 1기가 보존되어 있다.

옛 뉴영제사 터에 우뚝 선 나무전봇대
 
그가 운영하는 예일종합건재사 내에는 특이하게도 나무전봇대 1기가 보존 되어 있다. 예천의 상징 기업체였던 뉴영제사(주) 건물 내에 있던 것이다.
 
뉴영제사(주)는 1947년 3월 15일에 예천제사회사(醴泉製絲會社)로 설립되었는데 한국전쟁으로 소실된 것을 재건하였다고 한다. 양잠업 전성기였던 1980년에는 일본 등 외국으로 생사를 수출하며 연간 500만 불의 수출 실적을 올리기도 했으며 종업원이 300여명으로 예천 경제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곳이었다. 뉴영제사(주) 터에는 현재 로얄캐슬 아파트와 국민건강보험공단 예천출장소, 유영화 이장이 운영하는 예일종합건재가 들어서 있다. 예천 상징물 중의 하나인 예천제사회사 굴뚝은 한국시설안전공단의 붕괴 위험 결정에 따라 안타깝게도 2013년 2월 7일 철거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뜻있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나무전봇대는 살아남아 한 시대를 묵묵히 중언하고 있다.

▲ 영진상회

예천 구시장 본토박이 가게 영진상회
 
예일종합건재를 나와 예천 구시장을 다시 찾았다. 장날 농협 앞 도로가에 펼쳐졌던 마늘전, 고추전 대신 구시장 도로가에는 겨울이 왔음을 실감케 하는 붕어빵 포장마차가 등장했다. 영진상회 바로 앞이다. 영진상회는 구시장 본토박이 어르신이 운영하고 있는 방앗간이다. 마침 어르신이 자리를 비운 터라 대를 이어 방앗간과 고추상회를 운영하고 있는 아들과 함께 어르신을 찾아 나섰다. 그 사이 그가 알고 있는 구시장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여기 온 거는 46년 됐거든요. 그전에는 저 우에는 마당이었고 저기서부터 여 까지는 안에 기둥이 있고 시장인데 온갖 장이 다 열렸지. 곡물도 있고 전부 다 취급했지. 저 위에 상설시장이 생기고는 여기는 고추, 마늘만 있고.”
 
고향은 노하동 시장통이다. 그가 구시장으로 온 건 열한 살 때지만 아버지는 60여년 가까이 구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있다.
 
“지금은 보수해서 그렇지만 안에는 다 일제 강점기 건물이라. 다 나무로 돼있지요. 건물 뜯어보면 전부 갈대하고 나무하고 엮어서 만들어 놨어요. 지붕만 새로 위로 올리고. 옛날에는 사람들이 다 살았는데 지금은 가게 세를 많이 줬지. 실지로 열세가구만 살고 나머지는 자기 건물도 있지만 거의 세를 줬는데 점포수는 헤아려 보이 스물다섯 쯤 되네요.”
 
전성기 때는 점포수가 60개 정도일 때도 있었다. 한 칸이 5평인데 좁아서 지금은 보통 두 칸을 터서 하나의 점포로 쓰고 있다.

▲ 영진상회 내부
 
김치 잘 안 먹는 요즘, 고추는 사양사업
 
“우리 어릴 때는 겨울에 주식이 김치였지만 지금은 아이들이 김치를 잘 안 먹으니 이 일도 이제는 사양사업이래. 김치공장도 많이 들어섰고. 시골에는 어르신들만 살아서 고추 농사도 잘 안 되고 지금은 애들 울음소리 듣기도 어려워요. 우리 클 때만 해도 애들이 많았어요. 한집에 여섯 일곱씩은 있었으니까. 실례로 내가 예천초등학교 나왔는데 그때 3천 명 이랬다고. 시골에서 애들 보기가 드물어요.”
 
예천 구시장에도 베트남에서 온 이주민과 결혼한 집에만 어린 아이가 둘 있을 뿐이다.
 
“시장 활성화가 지금은 힘든 게 거래가 안 되는데 뭐. 장사라는 건 올랐다 내렸다 하기 여사니 어느 때가 전성기였다 할 게 따로 없어요. 호황이라는 건 고추파동 났을 때지요. 그때는 금추라 했지. 전국에서 고추가 가장 먼저 나는 곳이 여기라. 여기 나고 한 달 지내야 영주, 봉화, 영양이 나와요.”

▲ 고추전으로 유명한 예천 구시장

고추 거래로 유명한 예천 구시장
 
예전에 시골에서 고추는 현금과 같은 것이었다. 팔면 바로 돈을 만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성기라고 부를 수 있었을 때는 고추 양이 많을 때였다. 예천 구시장 고추전이 다른 지역에 비해 먼저 시작되고 물량도 많으니 이곳이 고추로 유명할 수밖에 없었다.
 
“인근 김천이나 상주, 진천 이런 데서 상인들이 와서 물건을 사서 서울로 보내는 거라. 물론 여기서 서울로 바로 보내는 경우도 있지만. 안동도 지금은 고추 판매장이 생겼지만 여기보다 늦었지.”
 
농촌은 고령화 되고 젊은이들은 밖으로 다 나가버렸으니 농사 양이 줄어드는 건 당연한 결과다. 이제는 고추 농사를 하는 집도 드물다.
 
“촌에서 고추농사는 둘 내외가 살아계실 때는 가능하지만 한 분이 돌아가시면 지을 수가 없어요. 할머니들은 밖에서 고추를 따고 할아버지들은 경운기로 실어 날라서 기계 돌려가지고 굽고 해야 가능하지. 제일 더울 때 고추를 따야 하니 힘든 작업이래요. 지금은 기계로 다 하지만 옛날에는 연탄으로 다 했다고. 창고에다가 선반을 가로지르고 차례대로 말려서 올리고 했는데 지금은 기계화가 되서 스위치 하나로 전자동으로 다 되지만.”
 
경기가 좋을 때는 삼양라면에 이곳 고추가 납품이 되기도 했다. 그때는 고추 꼭지 따는 할머니, 아주머니들이 점포마다 그득했다. 아버지가 하는 방앗간이 잘 될 때는 따로 점원을 두기도 했었는데 주변에 영진상회 말고는 방앗간이 아예 없을 때였다. 명절에는 방앗간 앞에 줄 선 사람이 끝이 안보일 정도였다고 하니 당시 경기가 짐작이 간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 지난 이야기가 되었다. 건물은 쇠락하고 인적은 드물어 겨울 초입의 날씨처럼 스산하다. 그래도 희망적인 건 시장 통에도 어린 아이들이 태어나고 있고 활성화를 위한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수소문하던 영진상회 어르신은 세종목욕탕에 가서 돌아오려면 멀었다는 전갈이 왔다.

▲ 예천축협에서 사용하던 창고에 지금은 천일카센타가 들어서 있다.

▲ 예천극장(명천극장, 문화극장)이 있던 터에 세운 스카이뷰 아파트

개인의 역사가 곧 마을의 역사
 
옛 축협 창고 건물을 그대로 쓰고 있는 천일카센타를 지나 한천 강변로로 나오니 멀리 활 모양을 본뜬 예천교가 저녁 햇살을 받아 반짝인다. 한천 옆 강변로를 따라 예천도서관과 예천교육지원청이 있다. 그 위로 예천극장(명천극장, 문화극장)이 있던 터에 세운 스카이뷰 아파트도 보인다. 예천농협과 KT 예천지사, 예천 구시장도 멀리 보인다. 정옥자, 이부영 부부의 집도, 권점숙 씨의 집도, 유영화 이장의 상점도 가늠이 간다.

▲ 예천에서 가장 오래된 약국인 동산약국

마을을 지키며 써내려온 개인의 역사가 곧 마을의 역사라는 사실을 실감한다. 일몰에 물드는 하늘 아래 각양각색의 집들이 펼쳐져 있다. 그 안에 저마다의 사연들로 색색이 물들어온 사람들이 살고 있다. 물든다는 건 내 안에 다른 것을 들여와 함께 젖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젖어본 사람들이 아름답다.

신준영
2019-01-07 오전 11:49:49
12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