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ㆍ예천 교류와 상생의 근대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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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ㆍ예천 교류와 상생의 근대기행

[우리동네-예천읍 남본리] 예천 원도심 중심 남본리 이야기
[안동시공동기획연재] 2018 안동·예천 근대기행(8)

  • 신준영
  • 2019-01-07 오전 11:47:04
  • 2,631

 남본리 상가 터줏대감 협신신발 이부영, 정옥자 부부

 늪지대를 매립해 형성된 예천 구시장
▲ 예천 관문 역할을 하는 굴머리 수양버들과 남본1리의 중심을 지나는 시장로

예천 원도심, 남본리 이야기
 
예천읍 굴머리 수양버들은 예천의 관문 역할을 하는 곳이다. 이곳에서부터 시장로를 중심으로 형성된 예천읍 원도심이 남본(南本)1리다. 예천읍사무소와는 500m 거리에 위치하며 동쪽으로는 중앙사거리와 교육청까지 동본1리와 경계를 이루고 서쪽으로는 굴머리와 경계를 이룬다. 효자로를 경계로 하여 서본1,2리와 나뉘며 한천을 경계로 남본2리와 나뉜다.

▲ 예천 맛고을거리

▲ 예천 맛고을거리
남본리는 예천군 남읍내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남산동(南山洞)과 본동(本洞)을 병합하여 남본동이 되었다. 한천을 중심으로 내남본동과 외남본동으로 구분되었는데 내남본동은 남본1리가 되고 외남본동은 남본2리가 되었다. 외남본동이 원래 남읍내면의 소재지였던 곳이며 내남본동은 한천이 흐르던 늪지대였다. 1919년 이범익 군수 재직 시에 서본2리 굴머리에 60m 삼익수도를 개통하여 예천읍 늪지대의 물이 빠지면서 늪지대를 매립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1937년에 남본동으로 승격되었고 1971년 1월 1일 남본1,2동으로 분리되었다. 남본1리는 따로 자연마을명이 없다.

▲ 한천을 경계로 남본2리와 나뉜다
도청 신도시 형성과 예천 군청 이전에 따라 예천읍 원도심 상권의 경기 위축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골목상권, 토속 음식점, 재래시장 육성 등 도심 재생 해결책들을 마련하려는 노력들도 진행 중이다. 원도심의 중심지였던 남본1리 상가 터줏대감들을 찾아 그들의 애환과 마을의 변천사를 들어보자.

▲ 예천 구시장
협신신발 새댁, 정옥자
 
정옥자. 1944년생으로 예천군 개포면이 고향이다. 스무 살이던 1963년에 41년생 이부영과 결혼하면서 남본1리 주민이 되었다. 스물한 살에 첫딸을 낳고 남편과 함께 신발 가게 일을 했다.
 
처음에 결혼해서 왔을 때는 시부모에 시동생 넷, 시고모, 시고모 딸까지 있었으니 말 그대로 대식구였다. 거기에 딸 넷에 아들 하나, 본인의 아이가 5남매였으니 스스로의 표현처럼 참으로 거북한 시절이었다.

▲ 스무살에 남본1리로 시집 온 정옥자
 
“우리 시어머니는 참 훌륭했지만은 그래도 옛날 어른들은 맹 어른이잖아. 처음 집짓기 전에 신용조합 앞에 병원이 있었는데 몸이 아파 거기 가니까 의사가 식구가 몇이냐, 몇 시에 일어나서 몇 시까지 일 하느냐, 물어서 답하니까 그러면은 병나는 게 당연하다 하더라고.”
 
몸이 쉽게 회복되지 않아 안동에 있는 큰 병원에 갔다. 그때는 서른 안쪽이었는데 병원에서 신경성이라고 했다.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안동댐을 구경 시켜 주었다. 신기하게도 한 바퀴 구경을 하고 나니 정말로 마음이 툭 트였다. 그래서 정옥자 씨는 마음속으로 신경성인가보다 생각했다.
 
“집에 와서 시어머니께 전하니 시어머니 하시는 말씀이 ‘뭐 해서 신경이래. 촌에서는 일을 글키 하고도 괜찮은데.’ 이래 나왔어. 그 시절에는 거의 다 그랬지만은 항상 집에서 가게만 보고 어디 갈 데도 없어. 지금이야 모임이 많애 가지고 여기도 가고 저기도 가고 배우는 데도 많고 한데 그 시절에는 갈 데도 없고 그랬어.”

▲ 79년 한천 둑에서 이웃과. 왼쪽이 정옥자 씨
 
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는 소풍이며 운동회도 마음대로 따라나서지를 못했다. 가게를 지키는 것도 일이었지만 젊은 시어머니가 계시니 늘 그런 행사에 참석하는 건 아이들 할머니 몫이었다.
 
“나는 한 번도 못 갔어. 우리 시어머님이 만날 따라가지. 운동회 한다 카면 나는 밥 해가주고 갖다 주고 우리 (아이들) 할매는 미리 가가주고 좌석 딱 지키고 아이들 뛰는 거 다 보고 이랬거든.”
 
그러다가 마침내 기회가 왔다. 큰 딸의 초등학교 소풍이었는데 시어머니가 장사 나가시고 안 계신 차에 처음으로 아이들 소풍을 따라 나선 것이다.
 
“우리 큰 딸이 예천여고 뒤에 소풍을 갔어. 우리 시아버님 들에 일하시는 거만 밥해서 가져다 드리고 우리 현성이(아들)는 업고 나섰지. 하이고! 얼매나 좋은지. 그 시절에는 내가 선생님도 한 번 찾아보지도 못하고 학교도 한 번 안 가고 이랬어. 그래 옆집이 담배가게랬는데 선생님 담배라도 한 갑 사줘야 되겠다 싶어가 아리랑인가 한 갑하고 선생님 도시락을 하나 더 쌌어. 그래 갔디마는, 아이고! 마침 우리 선생님 도시락을 싸가주고 온 사람이 아무도 없어. 그래가지고 내 도시락을 한 개 드렸지. 소풍 한 번을 못 따라가다가 그때 가보이 얼마나 좋은지. 거북한 건 한 개도 없고.”
 
그 날의 해방감을 떠올리면 정옥자 씨는 지금도 마음이 좋아진다.

▲ 아들 현성(맨 오른쪽)씨와 동네 친구들
60년대에는 기차표 고무신이 대세였다. 가게 이름은 ‘협신신발’이었다.
 
“당시 요 밑에 협동고무신, 국제신발이 있었고 일흥신발은 아직도 있어. 협신신발일 때 소매로 하다가 기차표 동양고무 대리점을 한 삼십년 했지.”

▲ 1989년 옛 집에서 정옥자(왼쪽)씨와 이웃
1989년도에 남편이 태어나서 줄곧 살아온 안태고향인 옛집을 허물고 그 자리에 지금의 3층짜리 새 건물을 올렸다. 전부터 해오던 월드컵, 프로월드컵 대리점 간판을 그대로 달았다. 1997년도에 결혼한 아들 현성 씨 며느리 소연 씨 내외가 가업을 이어 프로월드컵 대리점을 운영했다. 2011년부터는 의류로 업종을 변경해 웰메이드 대리점을 운영하고 있다. 주변 가게들도 이들처럼 주인은 그대로인데 시류에 따라 업종을 변경한 경우가 많다.

▲ 남일상회는 모자점이면서 속옷 등을 취급한다.

▲ 맞은 편 가게인 남일상회 앞에서
 
“BYC도 그 자리에서 새로 집 지어서 하고 있고 남일상회도 그렇고. 대 이어서 하는 집은 광신상회라고 지업사도 하고 농약, 씨앗도 팔고 하는데 3대가 대를 이어서 해.”
 
요즘 정옥자 씨는 오전에 운동을 다녀오면 오후에는 소일로 사군자도 치면서 젊은 시절 가게에 묶여 하지 못했던 일을 하며 지낸다.
 
“야들 시아버님도 동네일을 많이 봤거든. 그런데 기억을 다 할라는지 모르겠네.”
 
며느리가 골라준 빨간 모자와 점퍼만큼이나 화사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정옥자 씨는 남편 이부영 씨에게 다음 이야기를 넘겼다.

▲ 3대를 이어 운영하는 광신상회
 
남본리 상가 터줏대감, 이부영
 
이부영 씨는 1941년생으로 안태고향인 남본1리 222-43번지에서 평생을 살고 있다. 예천서부국민학교와 예천중학교, 예천농림고등학교를 졸업했다.

▲ 협신신발 이부영 씨
“1937년에 예천이 읍이 됐어. 일제 때 웃골목이 곡물시장이랬는데 그때부터 남본리래. 옛날에 어른들이 여기가 소(沼)였던 모양이라 그랬어. 읍이 되고 보이 우리 집 같은 데는 조금만 파도 모래가 나와, 백모래. 같은 늪이라도 옆집에는 물이 안 나와도 우리 집에는 물이 나와. 옆집 펌프도 우리 집에 박으라 하고 비가 오면 우리 집 부엌에 물이 얼마나 나왔는지 몰라. 펌프 샘이 가만 앉았어도 물이 올라올 정도였어.”

▲ 1937년 7월 1일 예천읍 승격 기념비
 
어느 해는 예천 방천에 물이 많아서 둑을 터뜨린 적이 있다. 그 아래 이부영 씨네 논이 있었는데 자갈이 많이 유입되어 모를 못 심은 적도 있다. 그때는 농사도 짓고 집에서 소를 먹이기도 하던 시절이었다.
 
1961년, 이부영 씨가 제대하고 돌아왔을 때는 예천 인구가 16만에 육박할 정도로 번성하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로 봐서는 해방되고 6.25사변 나고, 내가 보니까 이 근방에서는 안동이 제일 낫고 영주, 점촌은 예천만 못했는데 화폐 개헌 할 때 보니까 점촌이 탄광이 있으니 점촌으로 많이 쏠리고 이랬거든.”
 
제대한 이듬해인 1962년에 장사를 시작했다. 첫 장사는 고무신 장사였다. 협신신발을 가게 이름으로 썼다.

▲ 고무신, 슬리퍼, 남녀 구두 할 거 없이 모두 팔았던 협신신발
예천 원도심의 중심 남본리
 
그러다가 1971년 2월 1일부터 1981년 8월 10일 까지 십년 간 남본1리 이장을 하며 마을일을 보았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일 시기였다.
 
“(예천)농림학교 다닐 때 규율부장을 하면서도 읍에만 나오면 부끄러워서 완장을 벗어내비리고 다닜어. 나는 이장 안하려고 도망 다녔는데……. 그때는 동서기 둔 사람은 예천읍에 나 하나 밖에 없었어. 예천서 남본리가 제일 컸거든.”
 
십년 간 동네 일 보면서 신발 장사를 하는데 죽도 밥도 안돼서 ‘이러다간 우리 집 망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부가세 신고할 적에 신발 도매 하던 분이 저 위에 살았는데 연세가 많아 세금 물기 싫다고 장사를 안 하려고 해. 그럼 나를 주소, 해서 부산을 따라갔어. 그때 부산 가이께 국제상사 뭐 이런 데가 전부 다 벌판이랬어. 그때 땅 사놔도 부자가 됐을 기라.”
 
그때 따라나선 곳이 부산의 동양고무 본사였다. 동양고무 본사에서 도매점 결정을 위해 예천에 와보더니 지역이 좁고 초라하다며 부산 당감동에서 장사 하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했다. 그러나 이부영 씨는 설득 끝에 마침내 예천에 도매점을 가져왔다. 당시 신발 업체는 국제고무와 동양고무가 라이벌이었다. 이부영 씨의 협신신발은 동양고무를, 노하동에서 현재도 영업 중인 국제신발은 국제고무를 취급했다. 장사도 잘됐다. 안동도 영주도 대리점이 맥을 못 추는데 예천은 예외였다.
 
“안동에는 대리점이 없고 예천에 왜 대리점이 있냐 그래. 내가 사업 수완이 좀 있었던 모양이래. 본사하고 잘 맞아서 양반 소리를 좀 들었지. 당시 신발 가게들이 어음장도 제대로 못쓰고 그랬어. 다들 어디 가서 써가지고 왔는데 나는 그 자리에서 쓰고 그러니 사람들이 좋아했어.”

▲ 80년대 중반, 창고에 보관하던 신발이 수해로 인해 침수되는 피해를 입었다. 가족이 나와 신발을 말리고 있다.
 
도매업을 하니 소매보다 나아서 경제적으로도 도움이 됐다. 가게가 좁아서 지금은 마트가 들어선 기차역 앞 양조장 터에 신발 창고를 얻었다. 80년대 중반 어느 해에는 창고에 보관 중이던 신발들이 침수 되는 수해를 입기도 했다. 그 창고에는 도둑이 네 번이나 들었다. 신발이 돈이 되던 시절이었다.

▲ 1989년 옛집을 헐고 새 건물을 올렸다.
 
89년에 옛 집을 허물고 그 자리에 3층 건물을 올렸다. 월드컵과 프로월드컵 매장을 같이 하면서 영주, 예천, 점촌, 안동까지 물건을 댔다. 1997년에 결혼한 아들 부부와 함께 가게 일을 보다가 환갑 때 아들 부부에게 장사를 모두 넘겼다. 2011년 며느리가 취미 있어 하는 의류로 업종을 변경했다. 지금의 웰메이드 예천점이다.

▲ 웰메이드 예천점으로 바뀐 현재 건물 모습
 
늪지대를 매립해 형성된 예천 구시장
 
“지금 현재 상설시장이 우시장 할 적에는 장날로 이 골목에 술 취한 사람이 참 많았어. 구시장은 쌀시장, 곡물시장이랬는데 상설시장으로 올라가면서 장사가 잘 안됐어. 사람도 없고. 지금은 고추전하고 마늘전만 있어. 지금 농협 앞이 구시장인데 예전에는 거기가 번화가랬어. 당시에는 남본동이 제일 컸고, 지금은 아파트촌이 자꾸 생기니 대심동, 동본동도 커졌지만. 아파트도 생긴 지 얼마 안됐어. 예천도 인구가 자꾸 줄대.”

▲ 구시장은 2일과 7일에 서는 5일장으로 주로 고추전과 마늘전이 열린다.
 
예천 구시장은 1921년 늪지대를 매립한 후에 생겨난 시장이다. 1955년 12월 20일 예천읍 공설시장이 신축 개설되었는데 목조 단층 14동, 정건평 515평에 61가구가 입주했다고 한다. 미곡, 잡곡 등을 판매하며 시장이 점차 커짐에 따라 장소가 협소하여 1970년대에 동본리 상설시장으로 이전되었다. 현재는 마늘시장과 고추시장만 이루어지고 있다.

▲ 구시장 안쪽의 모습
옛 기억 속에서 함께 했던 이웃들은 이제 대체로 사라지고 없다. 건물도 사람도 바뀌었지만 쉽게 바뀌지 않는 건 기억일 것이다. 기억 속에 참 좋았던 이웃으로 이부영, 정옥자 부부는 옛 협동농공사 부부를 떠올린다. 지금도 여전히 좋은 이웃으로 정을 나누며 살고 있다.

▲ 정부에서 5평씩 점포를 지어줬었는데 집 문을 열고 들어가면 머리가 받칠 정도로 낮았다고 한다. 지금은 원래 있던 지붕에 위를 달아 올려서 개량한 모습이다.
 
“예전에 한 계원이래서 놀러도 같이 다니고 그랬어. 지금 세아아파트가 있는 청복동에서 농사짓고 살 적에 상추 하나라도 우리가 얻어먹은 집은 그 집이래. 그 집 아주머니가 권점숙 씨라고 군의원도 하고 그랬는데 사람이 참 좋아.”

▲ 1986년 옛집 골목에서 막내 혜정 씨

울 집에 시집 온 사람들은 점방에 매여 다 고생했지 뭐
 
“참 나도 어지간하지. 딸내미들 학교 다닐 때 한 번도 안 가봤거든. 맨날 점방 보느라 바빠서 가보지도 못했어. 그런데 딸들이 모범생인기라. 언니가 모범생이니 동생들도 덩달아 그랬나봐. 선생들이 나를 보고 우리 딸내미들 얘길 하곤 해. 미안치 뭐. 우리 집에 시집 온 사람들도 다 고생했지. 점방에 있으니 꼼짝도 못하고.”
 
침전된 기억을 조금씩 흔들어 옛 일들을 들려주려 애쓰는 시아버지와 그 모습이 안쓰러운 며느리, 시어른이 미처 기억해내지 못한 일들은 그간 이야기로만 들어온 것을 정리해서 며느리 소연 씨가 들려주었다. 대를 이어 한 공간을 가꾸고 지켜내며 그 공간에서의 시간들을 따로 또 함께 엮어내어 공유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 본다.

신준영
2019-01-07 오전 11:4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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