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ㆍ예천 교류와 상생의 근대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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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ㆍ예천 교류와 상생의 근대기행

[구술생애사] "땅이 해코지하지 않는 세상을 꿈꾸며" 와룡 농사꾼 구정회
[안동시공동기획연재] 2019 안동 ‧ 예천 근대기행(2)

  • 신준영
  • 2019-08-19 오후 2:3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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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안동예천 근대기행은 생생한 르포취재를 통해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궤적을 다룬 <구술생애사>와 안동과 예천 두 지역의 역사와 문화, 생활사의 근간이 되는 ‘마을’을 테마로 한 <우리 마을 이야기>를 그려낼 예정입니다. 두 번째 <구술생애사>의 주인공은 와룡면 가구리 농부 구정회 씨입니다. 농민운동가로 활발한 활동을 해온 그의 삶 속에 가톨릭농민회의 역사가 담겨있습니다. 땅이 해코지하지 않는 세상을 꿈꾸는 구정회 씨의 치열했던 시절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봅니다. -편집자

 

 

구정회 ⓒ신준영

 

 

함평 고구마 사건의 대표적인 기록 사진으로 1978년 4월 24일 시위 현장이다.

아래 왼쪽에 앉은 사람이 구정회 씨며 당시 유행하던 재건복을 입고 있다. 바로 앞에 앉은 흰옷 차림이 서경원 씨다.

(사진제공:한국가톨릭농민회)

 

 

현대 농민운동의 효시 '함평 고구마 사건' 기록 사진 속 인물, 구정회

 

1976년 고구마 수매를 둘러싼 전남 함평군 농민들의 피해보상 투쟁 활동인 일명 ‘함평 고구마 사건’은 현대 농민운동의 출발점으로 평가된다. 지역 농민들의 단순한 피해보상 운동으로 시작된 이 투쟁은 가톨릭농민회 등의 참여와 각계 인사의 지지 및 기도회 등으로 전국적인 이슈가 됐다. 1978년 4월까지 진행되면서 1979년 안동지역에서 있었던 ‘오원춘 사건’, 뒤이어 일어난 ‘YH 여공사건’, 각종 대학시위와 부마사태로까지 영향을 끼쳐 우리나라 농민운동사는 물론 민주화 운동사에서도 기억될 중요한 사건으로 남았다. 해방 후 민이 관을 이긴 최초의 사건이었다는 점에서도 역사적 의의가 크다. 이 사건의 대표적인 기록 사진 중 한 장에 모습을 남긴 사람이 안동시 와룡면 가구리에 살고 있는 구정회 씨다. 당시 현장에서 투쟁을 벌인 구정회 씨를 만나 그 배경과 정황을 들어보았다. 평생을 고향에서 가톨릭 신자로, 땅을 일구는 농민으로 살며 농민 권익을 위한 활동과 민주화 운동도 함께 해온 그의 인생 여정을 구술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할머니 권분금 말가리다, 안동 천주교 세례대장 첫 장에 기록되다

 

저는 본관은 능성이고 이 지방에 알려진 문단공(백담 구봉령) 14대손으로 1951년 9월 19일 여기 가구 2리 192번지에서 났어요. 6·25 때지요. 지금은 외딴집인데 그땐 서너 채가 더 있었어요. 모태신앙이고 1952년 김수환 추기경이 대구교구 안동본당 신부님으로 계실 때 유아 세례를 받았어요. 두 살 까지 여기 살다가 등 너머 이웃 동네로 갔어요. 거기가 촌에 인구가 많았기 때매 상당히 번잡했어요. 우리가 거기서 구멍가게를 했어요. 국민학교 2학년 때 쯤 다시 이리로 살러 왔는데 50년대 말 60년대 초라서 상당히 어려웠어요. 우리는 토지도 없었고 소작농이었고.

 

할아버지 대에 초창기 가톨릭 신자 분이 우리 할머니로 오셨어요. 할머니(권분금 말가리다, 1889~1940)는 청송 진보 쪽에서 오셨다는데 확실한 신분은 모르겠고 추측인데 가톨릭 박해 받은 후손이었던가 봐요. 그 분이 워낙 선비 집 출신이라 아는 게 많고, 어떤 연유로 선비 집으로 팔려가다시피 하다가 탈출한다는 것이 우리 집, 할아버지한테로 오게 됐어요. 아버지는 삼남 일녀 중 막내세요. 그때는 변변한 교육 기관도 없고 해서 우리 할머니가 손수 글도 가르치고 한문도 가르치고 하셨어요. 할아버지는 기술자였어요. 석수, 대정(대장간 일), 목수 세 가지를 하셨어요. 그때부터 가톨릭 집안이 됐어요. 없이 살다보니 부친은 일제강점기 때 가족들 데리고 궁여지책으로 만주로 가셨어요. 할머니는 만주에서 돌아가셨어요. 제적부를 보니까 만주국 빈강성 진가툰이라는 곳인데 사촌 누나가 거기서 태어났어요. 거기서는 땅이 넓어서 농토는 얼마든지 가질 수 있었는데, 팔아도 돈이 안 되고 또 어머니는 추워서 도저히 못 살겠다 하시더라고요. 2~3년을 거기서 살다가 해방 전에 돌아왔어요. 아버지는 다시 일본으로 광부로 징용 돼서 가서 2년 정도 살다가 탈출에 실패하고 해방 되서 오셨어요. 우리 큰누님이 해방 되서 와서 났으니까. 그 후로도 소작으로 있었지요.

 

아버지는 1922년생, 큰 형님이 1942년생이니까 아버지 열아홉 살에 혼인을 하셨나 봐요. 할머니가 워낙 가톨릭 신심이 깊어서 막내며느리(구정회 씨 어머니)도 신자인 며느리를 봤나 봐요. 안동천주교 최초의 세례대장 첫 장에 우리 할머니가 기록돼 있다 그래요. 우리 어머니 처녀 때 사진이 있어요. 목성동 안동교구가 있기 전에 대구교구 안동성당이었겠지요. 그 성당이 일제 때 사방관리소 맞은편 둔덕에 있었다 그래요. 지금으로 치면 북문통 대우공구 뒷 둔덕인데 그 앞에서 찍은 사진이래요. 그 사진 원본을 우리 집에 보관하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안동교구청에 기증 했어요. 우리 어머니는 열두 살인가 처녀 때고 우리 외가 식구가 다 들어있는데 안동에서 독실한 신자 집안이었어요. 아마도 안동 전체 신자가 그 사진에 나온 사람들뿐일 텐데 우리 숙모(仲母-둘째 큰어머니)가 거기 들어가 있더라고요. 우리 할머니가 상주 청우리에 살던 신자 며느리를 봐서 성당에 보냈나 봐요. 할머니는 그날 같이 못 가셔서 사진에 없어요. 서신부(서벨라도 신부)님이 전근 가면서 찍은 사진인데 우리 어머니는 아직 시집도 오기 전이었고요. 할머니하고 친구인 이웃 사람이 거기 나왔고 사진에 동그라미 친 게 내가 어머니 말씀 듣고 그려 놓은 거예요. 외삼촌은 일본 가서 행방불명되었고요.

 

 

1939년 5월 28일 서벨라도 신부 송별 기념으로 찍은 사진이다.

어머니 임옥란(당시 12세로 결혼 전), 이모 임금란, 외할아버지 임순근, 외할머니 김분순, 숙모 김복순, 외숙부 임동일, 숙모의 이웃 지점돌 등의 이름이 보인다.

 

 

송정중학원에서 사사로 배운 중학 과정

 

1959년 사라호 태풍 때가 국민학교 1학년이었는데 정통으로 와룡국민학교로 지나갔어요. 학교가 내려앉아서 선생님 서너 분이 돌아가셨어요. 교실도 없죠. 운동장에 있던 그 큰 수양버들, 플라타너스도 다 넘어가고, 흙으로 지은 교실 두 칸만 남고 나머지는 전부 땅에 붙었더라고요. 9월 며칠인가. 와룡국민학교 학생이 천 명이 넘었어요. 선생도 죽고 없죠, 교실도 없죠, 고등학교 이상 나온 관내 사람들을 차출해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교실 없이 판자때기 같은 걸 운동장 구석구석에 깔아놓고. 그러니까 공부가 옳게 될 리도 없었어요. 그때는 국민학교 2~3학년만 되도 공부는 뒷전이고 집에 오마 농사 일 해야 되고. 전부 손으로 농사짓고 학교만 갔다 오면 꼴 베고 소먹이고. 형제들도 많고 봄 되면 땟거리도 떨어져서 세 끼 중 두 끼는 죽 쒀먹는 시대였으니. 초근목피 시대였죠. 출세를 시키기 위해서 뭘 하고 그러지도 못했어요.

 

중학교를 30프로도 안되게 갔어요. 안동·경안·경덕 세 군대 중학교가 있었는데 그때는 시험 쳐서 갔어요. 학교 진학을 위해서 별도로 방과 후에 공부를 시켰다고요. 처음엔 나도 학교를 가기 위해서 좀 하다가 집도 워낙에 가난하고…. 그해(1964년)만 입학시험을 국어, 산수만 쳤어요. 박근혜가 중학교 들어갈 때라 박정희가 특명으로 시험을 국어, 산수만 보게 했다고요. 우리 전에도, 우리 후에도 그런 예가 없어요. 그때는 고등학교 보내는 이상으로 중학교 보내기도 힘들었다고요. 그래서 나는 국민학교 밖에 안 나왔는데 그래도 국민학교 때 공부는 상당히 잘하는 편에 속했다고. 이 마을에 상급학교에 못 간 애들이 워낙 많았어요. 그래서 포기하고 있었는데 대학교를 졸업하고도 직장을 못 구하고 있는 사람들이 동네에 몇이 있었어요. 그 사람들이 뜻이 맞아서 중학교 과정을 가르쳤는데 ‘송정중학원’이라고. 가정집 사랑방에 모여서도 하고 여름에는 우송정(友松亭)이라고 지 씨 정자가 있는데 거기서도 배우고, 한 2년 동안 중학 과정을 배웠지요. 오전 서너 시간만 하고 그 외엔 농사일을 했어요. 그때는 헌책방이 워낙 성업을 했어요. 헌 책이 전 과목에 2백 원인가 했다고. 신시장 사장둑에 헌책방이 죽 있었어요. 거기다 내다 팔면 서점 주인이 수집해서 되팔고. 교회 서적도 옛 표기로 된 거, 내 어릴 때는 많았어요. 옛날 성경이 다 있었는데 이사를 하고, 집을 새로 짓고 하니 다 없어지고 지금은 《성경직해》라고 한 권만 남아있어요. 어렸을 땐 신앙생활을 착실히 했지요.

 

 

1964년 4월 12일 여동찬 르베리에 신부(가운데)에게 영성체 성사를 받았다.

뒷줄 왼쪽 학생 중에서 다섯 번째가 구정회 프란체스코.

 

집안에 내려오는 《성경직해》, 표지가 떨어진 것을 큰아버지가 보수해서 보고 어머니가 이어서 보셨다.

 

 

《성경직해》 표지 안쪽에 큰아버지 이름이 적혀있다.

 

 

인근에서 처음으로 고추 모종에 성공하다

 

60년대 중반쯤 중학교 과정 할 때 그때는 고추를 집에서 토종 씨를 떨어서 전부 직파를 했어요. 요즘처럼 모종하는 법을 몰라서 못했지요. 그래서 수확이 상당히 늦고 가을에 한창 고추가 열릴 만하면 서리가 와서 아깝고. 그때 이웃 가구 1리에 일제 강점기 때 농림학교를 나온 채소 농사를 잘하는 분이 있었어요. 그 당시엔 여기 사람들이 상상도 못하는 양배추 재배도 하고 토마토 재배도 하고. 가서 어깨 너머로 보곤 했어요. 그때는 비닐이 안 나오던 시대라서 그 분은 온상 틀을 짚으로 엮어서 땅을 파고 틀을 해서 유지(油紙), 문종이에 들기름이나 기름을 적셔서 양배추 씨를 내고, 토마토 씨를 내서 모종을 한 번, 두 번 하고 하더라고요. 쭉 지켜보다가 비닐 첨 나왔을 때 직파하던 고추씨를 가지고 모종을 내서 빨리 따도록 해보자, 그 시도를 했지요. 그때 집에 있던 뭐를 훔치다시피 해가지고 돈을 장만했어요. 비닐이 첨 나왔을 때는 상당히 두꺼웠어요. 그때는 교배종 종자도 안 나왔고요.

 

  

 

1971년경 새해 아침에 가구 2리 본가 헛간 앞에서 국민학교 5학년인 여동생, 조카와 함께.

 

 

안동에 럭키 지업사라고 국민은행 맞은편에 있었는데 거기 가서 두어 발 구입해서 창을 짜가지고 했는데 잘 안되더라고요. 인근에 고추씨를 구입하러 가니까 그때는 개량이나 교배종 씨가 없고 전부 촌에 집에서 자가 채취해서 농사지을 땐데, 중앙종묘사에서 나온 건데 가게 주인이 풋고추로 이걸 가져가서 모종을 내보라고 해요. 그때는 종자 씨를 전부 다 80~90프로를 일본에서 수입해서 팔았다고요. 요새처럼 봉지로 안 나오고 깡통으로 한 홉씩 들어있는 풋고추 개량종이라고. 12월 말에서 1월 쯤 한겨울에 땅을 파고 1센티미터 간격으로 조파를 해요. 고추씨는 파종해가지고 발아해서 처음 이식할 때 까지가 1개월 걸려요. 그때는 포트에 할 줄 모르고 세 번 이식을 했어요. 풋고추를 처음 해서 밭에 옮겨 심어서 성공을 했거든요. 그전에 성공한 사람이 있었는지는 모르겠고 이 근처에서는 내가 젤 먼저 성공한 걸로 알아요. 안동 시내에 풋고추 하나도 없을 때 채소 점에 풋고추를 포대에 담아가지고 팔러 다녔으니. 그러다가 재미를 붙여서 가지, 토마토, 고구마도 하고. 내가 기억할 때는 비닐이 첨 나왔을 때니까 7~8년 후에 흥농종묘가 생기고 불암하우스 풋고추라는 게 생겼거든요. 풋고추로 조금 돈이 되고 토마토 해서 돈이 되고 했어요.

 

 

1972년 제주도 정방폭포 앞에서

 

 

군대 가는 대신 시작한 제주도 이시돌 목장생활

 

그러다 스무 살이 가까워 오니 군대를 가야 되잖아요. 우리가 군대 갈 때 자원이 제일 많았어요. 50년생부터 52년생이 거의 52년으로 호적이 돼있어요. 전쟁 통이라 출생신고를 제때 못하니. 저도 호적은 52년생으로 되어있지요. 안동군청인가 신체검사를 하러 갔는데 사사로 중학과정은 했지만 어쨌든 국민학교 졸업생은 전부 다 보충역 예비역으로 바로 편입시켜 버렸어요. 그래서 농사는 상당히 열심히 지었어요. 평소 다른 사람은 군대도 가는데 평생에 객지 생활도 한 번 해봐야 되겠다, 그런 마음을 갖고 있던 차에 1972년쯤 부산에 큰누나 집에 놀러 갔다가 어떤 기회로 제주도 여행을 단독으로 가게 됐어요. 만원을 가지고 500원짜리 지폐 스무 장을 은행에서 바꿨어요. 그때 남영호가 침몰 된지 얼마 안 된 뒤라서 부산, 제주를 왕래하는 제주호 라는 작은 배가 있어요. 부산 영도다리 밑으로 갈 정도로 작은 배였어요.

 

나룻배도 한 번 못타봤는데 열 네 시간을 걸려서 제주 사람 하나, 부산 사람 하나 하고 얘기를 하면서 갔어요. 배에 좌석이나 침실 있는 일등석은 몇 칸 안 되는데 침대 방에는 외국인들이 탔고, 바닥에 융단 비슷한 게 깔렸고 전부 앉아서 갔어요. 배 멀미가 심하니 아예 한구석에 양동이를 갖다 놔요. 얘기 나누며 가던 사람 중 하나가 가축 장사를 하는 제주 사람인데 거기 가거든 이시돌 목장이라는 데를 한번 가보라 그래요. 그래서 제주도를 돌아보면서 이시돌 목장을 가봤어요. 가톨릭에서 아일랜드 신부가 와서 개척한 덴데 당시에 여기는 경운기도 한 대도 없는 동넨데 거기 가니까 트랙터가 70~80대 되고 상상도 못할 정도로 앞서 가던 대단위 목장이었어요. 연수원은 호주에서 지었고요. 전국의 실습생을 받아서 교육시키는데 거기도 둘러보고요. 허허벌판인데 그때는 집도 이상하고 규모는 워낙 크고 시간이 없어서 다 못 봤어요. 거기 압도 돼서 다른 사람은 군대도 가는데 군대 간 셈 치고 여기를 와봐야겠다 싶었어요.

 

목장 구경을 한 바퀴 다하고 만원으로 일주일을 보냈는데 제주시 해봐야 그때는 농촌 마을이고 제주 시내에 큰 호텔은 칼호텔 하나뿐이었고요. 시장에 순대국밥을 일행 셋이 먹으러 갔는데 순댓국 한 사발, 밥 한 그릇에 백 원 받았어요. 한라산에 등반로가 있는 것도 아니고 혼자 서귀포에서 제주시 까지 횡단하는데 장비도 없이 배낭 하나만 메고 등반을 했어요. 올라가는데 하루 종일 걸려서 백록담에서 하룻밤을 자고. 그때 마침 텐트 친 사람이 하나 있어서 다행이지 사람 못 만났으면 죽었을 거예요. 내려오는데도 하루 종일 걸렸어요. 집으로 와서 군대 간 요량하고 이시돌 목장에 가봐야 되겠다, 다만 일 년이라도 연수를 받아봐야 되겠다 싶어서 이시돌 센터 주소를 알아서 연수원에 실습생으로 가는 법을 서면으로 계속 문의를 했지요. 교회 본당 신부 이상의 추천을 받아 신청을 해보라고 하대요. 그때 안동 본당에서 문화회관 신축하고 동부동 성당으로 갓 나갈 때라 본당 신부가 또 안계셨어요. 그래서 무엄하게 교구청으로 가서 두봉 주교님 면담을 했어요. 교구장이 추천할 사안이 아니고 좀 있으면 동부동에 신부님이 발령이 나서 계실거니 거기 가서 받아라 하시더라고요. 그때는 예비군에 바로 편입되어 예비군 훈련을 계속 다닐 때죠. 그래서 이길준 신부님께 추천을 받아서 가게 됐어요. 작년에 45년 만에 다시 거기를 갔다 왔어요. 제주시 한림읍 금악리, 지금도 있는데 그 연수원은 피정센터로 변했더라고요.

 

 

1973년 8월 11일에 받은 주일학교 교사연수회 수료증. 제주 이시돌 목장에 가기 직전이다.

 

 

제주도에서 해안선 방위 근무를 하다

 

오일쇼크도 나고 하던 73년도 10월에 제주 이시돌 목장으로 갔어요. 제주도는 따뜻한 줄 알았는데 농장은 중산간이라 추웠어요. 돼지, 소, 양 사육…. 나올 무렵에는 농기계 교육을 받았는데 온 겨우내 실습을 했어요. 목장 측에서는 워낙 규모는 크지 사람은 없지 하니까 노동력을 얻을 수 있고. 전국에서 온 실습생이 50~60명 되고 전체 200명 정도는 연수원에서 직원과 함께 기거를 했어요. 호주, 아일랜드, 미국의 원조로 이루어진 거고 연수 조건으로는 거기로 주민등록을 옮길 것, 본인이 원하면 직원으로 채용 될 것, 이런 게 있었어요. 주소를 옮겨놨으니 74년 4월 쯤 제주도로 입영 영장이 나왔어요. 안동서 예비군 훈련까지 받고 사격까지 다 했는데…. 제주도는 보충역 제도가 없었어요. 지금 생각하니 4·3 사건 때문인지 자원이 적어서 그런 거 같기도 하고. 한 해 전에 우도 무장간첩 사건이 일어나서 제주도 해안선 전체를 방어는 해야겠는데 제주에 자원은 없지, 제주에 주민등록 된 사람은 무조건 입영 시켜서 제주도 지역 방위를 시켰어요. 그래서 진짜로 군대에 가게 생겼지요. 연수원에 들어간 지 6개월 만에 입영 영장 받고 제주 해안선 방위 근무를 했어요. 자원이 없으니 육지 사람도 차출해서 비행장 경비도 서게 했어요. 논산을 제2훈련소라고 하잖아요. 제1훈련소는 제주도 모슬포예요. 왜 그러냐면 6·25 때는 전쟁은 났는데 훈련할 데가 없잖아요. 거기서 6·25 3년 동안 60만 명을 길러냈어요. 6·25때 대 선배들이 가서 죽을 고생을 하던 그 자리에서 훈련을 한 달을 받는데 간첩들이 우도에 출몰하고 그랬으니깐 진짜 군사 훈련을 FM 대로 받았지요. 거기가 70년대에는 방위 소집자 단기 군사 훈련장이었으니까 거기서 소집되어 모슬봉 앞 부대에서 송악산으로 15~20리 되는데 매일 훈련을 받으러 다녔어요. 훈련소 안이 작아서 사격이니 각개 전투 훈련이니 할 수 없으니까. 그렇게 한 달 동안 훈련을 받고 목장에 왔는데 오후 5시 되면 해안 경비 나가야 되고 도저히 생활을 못하는 거예요. 수입은 없고 목장에서 그렇게 밤 근무하고 오면 일도 안 되고. 그래서 다시 주민등록을 파서 안동 36사단으로 전속했어요. 여기서 면 호병계, 예비군 중대 복무 요원을 마쳤어요.

 

 

1975년 12월 13일에 받은 공소 지도자 연수회 수료증

 

 

와룡 천주교회 공소를 짓고 가톨릭농민회를 알게 되다

 

처음으로 다시 농사일에 전념하면서 한 게 와룡 천주교회를 지은 거예요. 우리 밭에 제가 설계하고 사촌하고 둘이 지었어요. 76년 10월 20일 축성식을 했어요. 그해 방위 근무를 마치고 그 일에만 전념하면서 교구청하고 자주 왔다 갔다 했지요. 자금도 받으러 가야 되고 해서. 우리 윗대부터 교회 기관지를 상당히 오래 봤어요. 《경향잡지》도 보고 《가톨릭 신문》도 보고. 교회를 짓고 있으니까 그런 우편물들이 누가 증여해서 오기도 하고 교회 사목국에서 보내오기도 하고요. 사목 자료에 그때가 한창 유신시대라 정의구현사제단이라든가 그런데서 유인물이 빠짐없이 오거든요. 아주 중요한 건 인편으로 오거나 교회서 보낸 이름이 아니고 흔한 여자 이름으로 오기도 하고요. 가톨릭노동청년회(JOC)라고 있었어요. 가톨릭노동청년회가 있다는 건 1975년부터 알았어요. 교회 기관에서 유인물이 자꾸 오고 하니까 관심을 갖고 열심히 읽었지요. 그땐 젊고 고생도 할 만큼 했고 아직 혼자고 팔팔하고. 그런 중에 대구서 가농 대구경북연합회창립준비모임을 어느 날 어느 시에 한다고 가톨릭신문에 유인물이 왔더라고요. 대구가톨릭근로자회관에서 한다고. 그전에 와룡교회 공소를 짓고 문화회관에서 2박 3일 공소 지도자 연수회 하면서 이길재 씨라고 한국가톨릭농민회 창설자를 알았어요. 가톨릭농민회가 창설 된 내용도 알았죠.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에 수도원장님이 한국 농촌이 후미지고 억압 받고 있으니 깨우치게 해야 겠다 하는데 주위에 공소가 있기는 해도 젊은 가톨릭 신도가 없는 거예요. 그래 일단은 선산, 김천, 구미, 왜관 거기에 농촌 문제라든가 농촌 문제를 인식하고 있는 농촌 교회 신자들을 상대로 섭외를 해서 연합회를 창설을 해보자 한 거죠. 가톨릭 농민회가 노동청년회 안에 있으면서 주교단에 인정을 못 받고 있다가 주교단 산하 교회 공식단체로 1976년에 인준이 됐어요. 워낙 농촌 문제가 심각하니까. 가톨릭농민회 실무자인 이길재 씨, 정연석 씨가 왜관에 와서 주위의 개신교 장로, 권사 등 촌에 상주하고 있는 사람들하고 교류를 하면서 연합회 준비모임을 한다는 내용이 유인물하고 가톨릭 신문에 떴더라고요. 농촌 문제에 대해서 뭔 얘기를 하는가 하고 가보자 싶었지요. 그전에 공소 지도자 연수회 하면서 농촌문제 본질하고 농협문제하고 초창기 농민회 창설 멤버인 정연석 씨한테 강의를 한번 들은 적은 있죠. 그래 솔깃해서 가서 보니 가톨릭농민회 준비한다면서 신자라는 사람은 나 하고 경주 보문동에 사는 조용진 씨뿐이고 다른 사람은 전부 개신교 신자더라고요. 며칠 후에 창립한다고 갔지요. 이사를 뽑는데 회장이 최경수 씨라고 개신교 장로고, 가톨릭 신자인 조용진 씨가 부회장 되고 그 담에 장로 윤정선 씨, 김천 사는 김성순 씨 등이 이사가 됐어요. 초대 총무는 이유인 씨고 맨 마지막에 감사를 누굴 뽑을 것인가 하는데 회원이 몇 안 되고 보니 내가 감사가 됐어요. 되고 보니 안동 지역에서는 나 밖에 간 사람이 없었어요. 그렇게 1977년 초에 한국가톨릭농민회 대구경북지구연합회가 창립 된 거죠.

 

축사를 대구교구에서 하는데 준비 모임을 그 날 저녁에 했어요. 조용진 씨 하고 나하고 그 앞에 내 걸 문구를 뭘 쓰겠나 하고 서로 머리를 맞대는데 내가 ‘농촌 농민 권익 옹호가 농촌 복음화의 지름길이다.’가 어떤가 하니 좋다 그래요. 교회 냄새가 물씬 난다고. 초기 농촌 운동은 농민 권익 하고 농협 민주화였어요. 창립 축사를 두봉 주교님이 하셨는데 중앙정보부에서 낸 책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소수의 의견도 절대로 무시해서는 안 되고 자세히 들여다보고 지향을 생각해봐야 된다고. 이네들이 쓴 책에도 이런 내용이 있는데 오늘 이렇게 출범하는 가톨릭 농민회, 아주 소수지만 일부의 깨어난 사람들이 부르짖으려고 한다, 숫자는 적지만 앞으로 큰일을 해나갈 것이라는 그런 축사를 하셨어요. 그 다음부터는 금방 출범했으니까 거의 한 달에 한번 모임을 대구서 했어요. 이사들과 함께 감사도 연석회의 명목으로 이 여관 저 여관 다니면서 참석했지요.

 

 

1978년 즈음 공소 회장 시절 주일 오후에. 뒷줄 맨 왼쪽이 오원춘 사건 특별 기도회 후 구속되었던 와룡농협직원 장성규 씨, 오른쪽 맨 뒤가 구정회 씨, 맨 오른쪽 한복을 입은 분이 어머니 임옥란, 모자 쓰고 앉은 분이 아버지 구영서 씨다.

 

1976년 안동문화회관에서 있었던 가톨릭농민회지도자교육 후, 두봉 주교, 정호경 신부, 황영화, 이길재, 최병욱, 이상국, 오원춘, 우영식, 조용진, 박구훈 등이 보인다. 대구경북연합회 시절로 안동협의회가 생기기 전이다. 두 번째 줄 제일 왼쪽이 구정회 씨다.

 

 

안동가톨릭농민회 태동 이야기

 

회의를 한 일 년 동안 계속 하던 중에 《농민문화》라는 전국지를 발행하는 이석태 기자를 안동교구청에서 자주 만났어요. 그분이 항상 두봉 주교님 원고를 받으러 왔거든요. 농촌문제에 관한 얘기를 많이 나눴죠. 그때 사목국장 신부님이 정호경 신부님이셨는데 신부님께 “대구경북가톨릭농민회가 명색이 가톨릭농민횐데 지금 개신교농민회에 가깝습니다” 그러니까 “농촌지역인 안동부터 빨리 회원을 늘려서 연합회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는 말씀을 글로 써서 드렸죠. 그러고 나서 전담 직원을 뒀어요. 정재돈 이란 분을 춘천에서 불러와서 농촌 사목국 전담부를 신설했어요. 그때 함평 고구마 사건이 진행 중이었죠. 가톨릭농민회가 JOC, JAC에서 나오면서부터 정식 주교회에 인준을 받게 됐잖아요. 함평 고구마 사건이 인준을 받고 바로 옳게 터뜨린 사건인 거죠. 인준을 받고 전담 농촌사목 부서가 생기고 정식적으로 교육도 안 빠지고 농촌 공소 회장이라든가 공소 지도자 연수회를 교회 주관으로 했어요. 농촌 문제라는 거에 대해서 강의를 끼워서 한두 시간씩 문화회관 아니면 상지전문학교에서 했어요. 강사는 농촌 문제에 대해서는 정연석 씨가 아주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강의를 했어요. 농촌 문제를 확실히 인식하게 하고 농민을 의식화 시키는 게 농민운동이거든요. 그래서 문제인식을 한 시간 끼워놓고 그랬었는데 이제는 농촌농민운동 연수회를 3일 동안 농촌 공소 지도자들을 모아 놓고 본격 시작하면서 배용진 씨, 점촌에 황영화 씨, 쌍호에 우영식 씨, 풍천에 김덕기 씨라든가 공소 회장급, 지도자급하고 농촌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들하고 전담으로 교육을 계속 시키는 과정을 거쳐서 가톨릭농민회 대구경북연합회 안에 안동교구협의회로 갈라지기 시작한 거죠. 안동연합회 생기기 전에 협의회가 있었는데 그 시기에 함평 고구마 사건, 주교회 인준을 받고 평신도 사도직 신심단체로 되면서 직접 함평 고구마 사건에 개입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각 연합회가 생기기 시작하는 거지요. 대구경북연합회 생기고 나서 마산교구연합회, 원주교구연합회 창립 총회할 때는 임원으로 참여도 했어요.

 

 

1977년 즈음 수원에서 크리스천아카데미 농촌사회교육 수강 당시. 정재돈 씨 추천으로 교육을 받았다.

왼쪽 흰 셔츠 입은 사람이 구정회 씨. 장상환, 이우재, 황한식 씨 등이 보인다.

 

 

함평 고구마 사건 현장에서 찍힌 사진 한 장

 

그러다가 교계의 거대한 배경을 믿고 함평 고구마 사건에 적극 개입한 거지요. 함평 고구마 사건 대책위원장 하던 서경원 씨가 보통 사람이 아니에요. 노태우 정권 때 국회의원하면서 이북에도 갔다 오고 했지요. 전국적인 가톨릭농민회연합회가 결성이 되고 난 뒤에 전국의 농민회원들이 다 모였죠. 그때는 시위를 한다든가 모임을 함부로 못하던 시절이에요. 교회 종교 활동을 기도회라는 명목으로 언제 어디서 한다는 얘기만 하고 각 연합회로, 협의회로 통보만 왔지. 가고 싶은 사람은 모여라 하면 자발적으로 참가하는 거죠. 나는 명색이 임원이고 하니까 함평을 가게 됐죠. 그때 우리 본당 새 신부님으로 들어오신 오성백 신부님이라고, 그 신부님께 같이 가자고 청했지요. 서대구에서 차를 타고 광주에 가니까 정재돈 씨, 오원춘 씨, 대구경북연합회 권종대 씨 다 와 있어요. 전국에서 다 왔지요. 오전부터 시작해서 종일 기도모임을 했어요. 노금노 씨라고 하루 종일 종탑 밑에서 방송을 했어요. 내용을 외부로 알리지를 못하니까. 거기가 어디냐면 광주북동성당인데 맞은편에 시외버스 터미널이 있었어요. 그런데 광주 사람들도 그때는 별로 관심이 없더라고요. 신자들 일부만 관심이 있고.

 

 

함평 고구마 사건 당시 (사진제공: 한국가톨릭농민회)

 

 

전국적으로 모인 농민들이 한 5백 명은 넘지 싶어요. 그때 녹음을 내가 가져간 녹음기로 다 했었어요. 공공칠가방만한 건데 나중에 회원들한테 들려주기도 하고. 시위를 하러 나가려고 북동천주교회 정문에 도열을 해서 터져 나가려 하는데 이 숫자의 몇 배 되는 경찰부대 즉 해골부대가 새까맣게 몰려와가지고 나오기만 나오면 긴급조치로 바로 붙들어 넣으려고 하는 거죠. 몇 배가 막는데 시위하러 나갈 수가 없으니까 못나가고 성당 안에 들어와서 짚으로 짠 가마니를 낫으로 타서 성당 앞에 깔고 앉았어요. 해질 무렵 쯤 그늘그늘 할 때예요. 이제는 시위를 하려 해도 도저히 안 되고 하니 단식을 하기로 한 거죠. 노금노 씨가 더 이상 정력을 뺏기지 말고 무기한 단식에 들어갈 것이다 하고. 좀 일찍이 집에 갈 사람은 이쪽으로 몰리고 단식 할 사람은 남고. 그런데 그 중에 안동 교구에서는 권종대 씨, 정재돈 씨, 김천에 김성순 씨, 나 그렇게 넷이 남아서 단식을 하게 됐어요. 성당 마당 앞에서 가마때기 타개면서 우리는 죽어도 해결을 보고 간다, 죽으면 저 가마때기에 싸여서 시체로 나가겠구나! 이래 생각했죠. 그런데 이 사실을 딴 데 어느 언론에도 방송을 안 해요. 마이크 스피커 방송으로만 외부로 흘러나갔지. 단식할 자리를 다 만들어 놓고 앉을 즈음 본당 신부님한테 광주 CBS 기독교 방송 거기에서 이런 사실을 뉴스를 해줄 테니까 들어보라고 사전에 연락이 왔습디다. 그래 실지로 라디오를 트니까 유일하게 나오더라고요. 피해 보상을 안 해주면 관철 될 때까지 투쟁에 들어간다고. 단식하고 누워 있는데 오성백 신부님이 보낸 대건 신학교 학생 20~30명이 와서 인사하고 얘기를 들어주고 갔어요. 그날 저녁 캄캄한데 지붕에 사람이 한 둘이 있더라고요. 우리가 들락날락 하면서 봤어요. 누구냐고 그러니까 소스라치게 놀라대요. 남의 모임을 보려면 정식으로 보지 왜 지붕에서 내려다보느냐 하니까 그런 게 아니고 밤에 추울까봐 이불 담요 몇 장 가지고 왔다 그래요. 나는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는 게 그 사람들이 교우라서 우리를 위해서 실지로 이불 주러 왔는지 아니면 기관원에서 뭔 얘기하는지 들어보러 왔는지 아직 구분이 안가요. 그러고 또 한 가지 일어난 일은 방송하는 소리 때문에 시내 정류소 부근이 시끄러우니까 누가 그랬던지 전원을 차단시켜버렸어요. 외부로 방송을 못하게요. 이웃 시민들이 전기 안 들어온다고 우리한테 막 항의를 했어요. 그래 급하게 건전지 전기로 전환시키고 한전에다가 전기를 안 넣어주면 원성이 한전으로 간다고 하니까 즉시 또 전기를 넣어줘요.

 

 

 

그날 저녁부터 단식을 하는데 주관하는 사람이 대번 단식을 하면 안 되니까 우유 작은 거 한 팩하고 빵 한 개 하고 우선 먹고 내일부터 단식하자 하면서 우유 하나, 빵 한 개를 나눠 주더라고요. 그런데 누군가 일어나서 이거 뭐 양식하는 거냐? 단식하는 거냐? 그러니 받은 사람은 먹고 그 말한 사람은 안 먹고 단식 시작 되고. 나는 먹었어요(웃음). 대번 단식하면 안 되고 서서히 해야 된다 하면서. 그 이튿날부터 진짜 물만 먹고 시작하는데 이틀, 삼일 째 되니까 배가 덜 고프더라고. 교우들은 보니까 농민들이 아칠 하니까. 전부 불뚝 농민들이 와가지고 가마때기 펴놓고 반은 일어나 앉았고 반은 누웠고 하니 물만 준다 하니까 물 대신 일부러 숭늉을 주더라고요. 누룽지를 만들어서 밑에 가라앉히고 공급을 해주더라고요. 나는 한 삼일 굶으니까 정신이 더 맑아지고 깨끗해지더라고요. 그때 같이 단식한 사람은 대구, 안동에서 권종대 씨, 나, 정재돈 씨, 김성순 씨 네 사람이고 본부 임원들은 거의 다고. 그런데 사일 째 되니까 눕는 사람도 많고 포기하고 싶을 만큼 힘들더라고요. 오 신부님이 안동 오셔서 이런 사실을 알려서 그때 전국구역 사제단의 지도 신부님이면서 안동교구 신부님이셨던 류강하 신부님하고 정호경 사목국장 신부님이 함평으로 파견 돼서 오셨어요. 이미 내용은 알고 있었지만 현장 사정을 들어보라고요. 사일 째 되는 날 밤에 단식 현장에 오신 거예요. 닷새 되는 날 아침에 권종대 씨하고 나하고는 단식 중단하고 신부님들하고 동행해서 나왔어요. 사제와 동행해서 나오면 연행 되거나 체포되는 건 면하잖아요.

 

 

 

 

1978~9년 즈음 동생, 아버지와 함께. 가운데 구정회 씨가 입고 있는 옷이 함평 고구마 사건 당시 입었던 자주색 재건복이다.

 

 

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연합회가 창립되다

 

함평 고구마 사건 피해 보상액이 309만원인가 그랬죠? 적은 돈이지만 잘 해결이 됐으니 농민운동사에 전무후무한 사건이었죠. 농민이 무슨 힘이 있겠느냐 하다가 탄력을 받아 본격적으로 농민운동도 세가 확산 되는 거지요. 안동교구 내에도 분회가 여럿 생기고 교육도 체계적으로 되고 파견 교육도 가고요. 파견 교육 중에 개신교 쪽에서 하는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회교육 연수원이라고 있었어요. 이우재 씨, 황한식 씨, 장상환 씨 등이 실무를 맡아 했어요. 그때부터 나는 농사일 반은 팽개치고 그 일에 전념했지요. 1978년 12월 27일이 가톨릭농민회안동교구연합회 창립일이었어요. 연합회창립모임을 하면서 나는 협의회 위원도 하고 그래도 열심히 혼자서 뛰고 그랬는데… 임원 선출을 하는데 전부 다 모였을 거 아닙니까? 그런데 이상한 게 임원 뽑는데 이사도 없이 감사를 미리 뽑는 법이 없잖아요? 이사를 뽑지도 않고 회장, 부회장도 안 뽑고 감사부터 뽑는데 나를 지목하더라고요. 나는 실지로 대구경북연합회에서 2년 동안 감사를 해봤기 때문에 내키지 않았어요. 감사는 실무진들이 활동을 다 해 논 뒤데 잘했다 못했다 평가하는 거잖아요. 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임원을 뽑는데 감사 선출부터 부치더라고요. 벌써 사전에 얘기가 되어있었는지 어떤지. 젤 앞에 나를 내세우더라고. 그래서 어쨌든 감사를 맡고 연합회가 창립이 됐어요. 이사를 한번 해보고 싶었는데 사정이 그렇게 됐다고 정호경 신부님께 그런 말씀을 드렸더니 ‘아이고. 그만치 했으마 됐고 니는 이제 농민회 좀 쉬고 장가나 가라. 농민운동은 니 같이 그크러 여기저기 쫓아다니고 개신교에서 하는 크리스천 아카데미 교육도 며칠씩 갔다 오고 그케 쫓아다니 봐야 농촌이 니 때매 변화 되는 거도 아니고 당장 변화될 게제도 아니고 니 아랫대가 있다 해도 아랫대에 가서도 농민운동이란 게 그렇게 쉽게 빨리 바뀌는 게 아니다. 아랫대에 아랫대 가서 조금 빛을 볼지도 모르니까 좀 쉬고 고마 장가가라.’ 그러시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다닌 게 진짜 힘만 들고 진만 뺐지 싶은 게 아, 그래서 그런 거구나 싶어요. 아, 이거는 진보적으로 발전해가는 운동이라는 거, 사람이 깨이고 의식화 되면 앞으로 나아가는 건 틀림없다, 산에서 돌을 바닥으로 옮기려면 처음 굴릴 때가 힘들지 이 정도 됐으면 저절로 굴러갈 것이다, 하고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 거지요.

 

 

1979년 안동교구연합회 시절 처음 농민교육 받을 때로 두봉 주교와 정호경 신부, 정재돈, 이길재, 권종대, 오원춘 씨 등이 보인다. 맨 뒷줄 왼쪽 첫 번째가 구정회 씨.

 

 

오원춘 사건 안동교구 특별기도회 홍보를 담당하다

 

그때(1979년 6월 8일에) 약혼을 했어요. 아내는 삼녀일남 중에 장녀고 부친은 월남하셨는데 영주 풍기서 살고 갓 신자 되신 분이랬어요. 그러던 차에 청기 감자 사건이 터졌어요. 함평 고구마 사건 이후로 농민회가 활성화가 돼서 뭔 문제만 있으면 곧 해결될 줄 알고 농민운동이 활발히 전개가 될 때지요. 여러 분회들도 생겨나고요. 함평 고구마 사건도 그렇고 영양 청기 감자 사건도 그렇고 농협 민주화하고 관계가 깊어요. 농협이 왜 그리 문제가 생겼냐 하면 그때까지만 해도 농협이 협동조합이 아니고 관의 하수죠. 국제적인 유례가 없는 농협 임직원 임면에 관한 임시조치법 이라는 거로 묶여서 임면하는 곳 눈치 보고 일할 수밖에 없잖아요. 농협중앙회장은 대통령이 임면하고 시도지부장은 도지사가, 단위조합장은 시장·군수가 임면하고. 자발적으로 직원을 채용한다든가 해야지 협동조합의 뜻에 영 배치되거든요. 농민운동 아니었으면 임면임시조치법이 아직까지 있었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양대 사건이 터지면서 밝혀나가는 거죠. 그 농협민주화 교육을 담당한 이길재 씨, 장상환 씨 두 분 공이 커요.

 

오원춘 사건은 청기 농협에서 공급한 감자 씨를 파종했는데 싹이 안 나니까 피해 보상 해 달라 하고 감자 씨를 캐서 증거물로 연합회에 가져 오고 이사회에 이의를 재기하고 피해보상 운동 하려고 드니 정보기관에서 그때 5월에 납치를 한 거죠. 모심기 개시 하고 한참 농사철인데 농사짓는 사람이 사라졌다 돌아왔으니…. 그 얘기를 정재돈 총무한테 상세하게 울릉도에 납치 되어 갔다 했던 모양이래요. 그래서 세상에 알려졌죠. 그 유인물을 내가 돌렸어요. 문제가 생긴 거지. 그 문제를 풀려고 드니 애초부터 정보기관에서는 싹을 잘라야 되니까. 농민회에서는 그걸 두고만 볼 수 없지요. 회원들이 그런 일을 당해도 그냥 둬버리면 내부터도 운동한 사람은 계속 요주의 인물로 찍혀가지고 그 같은 테러를 당할 거 아닌가 하는 맘이죠. 그러니까 농민들이 교계에서 들고 일어난 거지. 나도 그만둘까 말까 하던 찰나에 그런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내 일이 될 수도 있겠다 싶어서 전에 제주도 갈 때 조르듯이 두봉 주교님한테 졸랐죠. 두봉 주교님은 프랑스에서 오셨으니 프랑스혁명에 대해서도 그렇고 그만큼 공부를 많이 하셨을 거 아닙니까? 이 문제에 대해서도 잘 해결해주실 거라고. 이 납치 사건은 농사짓는 사람이 한참 5월 초중순 경에 바쁜 때인데 없어졌다가, 지금은 내 혼자 놀러갔다 왔다 그러지만 그렇게 갔다 올 사람도 아니고 또 그때 고추 농사를 많이 했기 때문에 고추 모종하고 해야 될 때거든요. 우리 농민회 회원들도 앞으로 이런 일 당하기 십상이니까 주교님이 협조해가지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부탁드렸어요. 주교님이 아무 말씀도 안하고 고개만 끄덕끄덕 하시더라고요. 알았다고. 전국농민회에서 이 사실을 배포하면서 정호경 신부님하고 정재돈 씨는 사실이 아닌 것을 발표했다고 긴급조치 위반이라고 연행된 상태였거든요. 정보부에서는 납치를 안했으며 자기대로 놀러 갔다 온 걸 가지고 사실이 아닌 걸 유포했다고.

 

전국본부에서 전국적인 기도회를 8월 6일 날 목성동 성당에서 하기로 하고 8월 1일인가 2일부터 전국 임원 연수회 기획을 했어요. 가톨릭상지대학 본관에서. 전국의 연합회 이상의 임원들은 전부 다 참가하기로 하고 교육 내용은 강사 초빙도 있었지만은 농촌문제의 본질이라는 강의 제목 하에 임원이면 어디를 가서도 전부 강사가 될 수 있도록, 어디 농사단체에 가서도 농촌문제의 본질 강의를 해박하게 할 수 있도록 4일 동안 특별 연수회를 했어요. 간간이 초빙 강사로 그때 당시 서울대학 해직 교수라든가 이우재 씨, 백기완 씨도 왔어요. 강의를 4일 동안 들어가면서 한 시간 동안 원고 다섯 장인가 여섯 장인가, 농촌 문제의 본질, 부락 개발론 까지 전부 베꼈고 두 시간 하는 정연석 씨 농촌문제 강의를 한 시간으로 요점을 추렸어요. 한 시간 동안 좌중 앞에서 그 원고대로 칠판에 뭐를 그리든지 말을 어떻게 하든지 간에 정연석 씨가 홍길동이면 전부 다 홍길동을 만들 판이지요. 그 강의를 4일 동안 하고 8월 6일이 마지막 날이 되도록 그렇게 잡았어요. 거기 겹쳐서 안동교구는 안동 연합회 전체 연수회를 거기서 했고, 4일 동안은 전국 임원들, 연합회 이상 임원들은 강사 실습 연수회를 했고 6일 날 전부 합류하도록 그렇게 기획을 해가지고 6일 날 전국 회원이 모이기로 하고 본의든 본의 아니든 안동 연합회 회원이라든가 전국 연합회 임원들은 8월 6일은 극비에 전국 기도회를 하도록 했지요. 김수환 추기경님이 참석하기로 하고 교계에서 극비리에. 나도 처음에는 몰랐지요. 나도 8월 4일쯤 알았지. 특히나 안동에서 정보가 새 나갈까 싶어 4일쯤 되니까 몰래 알려주더라고. 안동에 지리를 아는 사람이 내 밖에 없으니까 나한테 얘기를 했겠지요. 거기에 전라도에서 온 사람들, 경남, 원주, 춘천에서 온 사람들, 서울은 (기도회를) 노동계에서나 이런데서 알고 오는 사람들, 안동에서는 교구 연수회 하러 왔지. 기도회 온 거는 아니거든요. 그런데 다 합류해서 대거 주교단에서 대전교구, 전주교구, 원주교구, 김수환 추기경님, 한 이삼십 명 되는 사제단하고 주요 손님 몇하고 8월 6일에 특별기도회를 한 거예요. 그 준비를 할 사람이, 지리도 잘 알고 하는 사람이 안동에서는 나 밖에 없으니까 내 보고 총무를 하라 그러더라고요. 교육 받을 사람들이 안 보여서 찾아보니 전국 임원들, 회장급들만 가톨릭상지대 셀린관 여자기숙사 옥상에 전부 모여 있더라고요. 그래 올라가려고 하니 못 오게 하더라고. 정보가 새나갈까 봐. 나는 어느 정도 알고 있는데… 뭐 때문에 그러는지.

 

당일은 머리띠 제작할 광목 사러 포목 집에, 또 광목을 재단하러 안동 광문사라고 교구청에서 전담으로 문구를 사서 쓰는 문구점이 있는데 거기를 갔어요. 거기 가야 종이 절단하는 기계가 있었어요. 긴급조치 하에서는 기도회를 하더라도 교문 앞에는 못나가거든요. 함평 고구마 사건 이후로 그렇게 세게 하고 이겨도 밖으론 못나갔단 말이래요. 그런데 이번엔 밖으로 나가보자 하고 결의하고 전략 전술을 짠 거지요. 신시장 철물점에 가서 큰 대나무를 사가지고 적당한 길이로 잘랐어요. 한 둘이 대나무를 잡으면 뜯겨가지고 잡혀 가니까 그걸 여럿이 쥐고 밀고 나가게 준비하고 머리띠 준비하고. 서너 시 되고부터 원주, 춘천에서 부터 긴급조치 구속 됐다 나온 사람들, 민청학련에 연류 됐다 나온 사람들, 의식이 있는 사람들이 와서 오늘 저녁부터는 양반 고을 안동에도 복음소리 울려 퍼지겠구나! 그랬지요. 나는 심부름 했어요. 페인트 사러 가고 대나무 사러 가고 포목 사러 가고 포목 절단 하러 문구사에 가고. 교구청에 늘어뜨리는 걸개 글씨를 성당 종탑 앞마당에서 서너 명이 썼어요. 큰 글씨는 광고 회사 사람들이나 쓰는 건 줄 알았는데 내 보고 큰 붓을 들고 쓰라 해서 교구청에서 부른 대로 썼어요. ‘교구청 난입자는 처단하라’ 라고. 기도회가 끝나고 긴급조치 하에서 최초로 시위를 외부로 나갔어요. 지금 보건소 자리가 그때는 시청이랬거든요. 시청에서 군청 사이, 중파(중앙파출소) 있는데 까지 촛불 행진을 했어요. 유신정권 하에서 기도회이면서 교회 바깥으로 첨으로 나간 거지요. 경찰이 워낙 숫자가 많고 해서 농민회원들이 대나무 작대기를 짜서 들고 이중 삼중으로 밀고 나가니까 하나씩 떼 내지도 못하고. 그 뒤로 성직자들, 수녀들, 신자들 나가고. 나는 그 위에 종탑에 방송실에 있었어요. 당시에 내가 일제 소니 녹음기를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 기도회 할 때 김수환 추기경님 강론을 그 녹음기로 녹음했어요. 추기경님 강론이 굉장히 거셌었어요. 할 말 다 하시는 거지요. 농민들을 왜 용공으로 모느냐 하고. 그때는 사진기도 귀하고 녹음기도 아주 귀할 때거든요. 일일이 속기를 하는 사람도 없고. 그때 내가 사진기도 빌려 있었고. 본부에서는 조그만 녹음기가 있었는데 이상국 씨가 내 것이 성능 좋다고 녹음하라고 하더라고요. 기도회 때 성당 안팎에 사람이 많았어요. 삼사십 명 주교단 제대에서 추기경님이 강론하시는데 잡소리 들어간다고 홍보부장이 제대 마이크 앞에 녹음기를 갖다 놓으라 그래요. 녹음테이프가 40분짜린데 이만한 녹음기를 들고 그 많은 사람들 보는 앞에 추기경님 가까이 첨 가봤지요. 제대 위에 녹음기를 갖다놨는데도 추기경님 개의치 않으시고 그때부터 더 세게 강론을 하셨어요. 왜 이러십니까? 박정희, 왜 이러십니까? 하고 굉장히 나무라고 야단치는 억양이었어요. 30분이면 끝날 줄 알았는데 자꾸 길어지네. 찰카닥 하고 끝났을 거 아니래요? 뒷부분은 말씀이 얼마간은 잘라졌어요. 강론을 복사해서 문자로 바꿔야 하니까 본부 홍보부에서 부장하고 내 하고 그 이튿날 작업을 했어요. 강론 끝나고 들고 와서 들어보니까 딴 사람이 얘기하는 건 다 녹음됐어요. 그때 기억나는 게 이재오 씨라고 알잖아요? 당시 국제 엠네스티 한국지부장이랬어요. 김수환 추기경님 따라 내려와서 미사 마치고 연설하는데 한국 정치가 삼일 정치냐? 석유가 왜 삼일 치 밖에 없느냐 박정희는 물러가야 합니다! 긴급조치는 폐지되어야 합니다! 하더라고요. 그때 그런 말 하면 전부 긴급조치 위반 감이거든요. 그 이튿날 바로 구속 됐잖아요. 그런 내용 까지 다 녹음 했는데 추기경님 그 중요한 말씀이 잘라져 버렸으니…. 녹음은 잘 됐더라고요. 요만큼 틀고 글자로 베끼고. 나하고 본부에 이상국 씨하고 홍보부장하고 셋이서 문자로 바꿔서 교구청 내려 보내면 이양이 타이핑 해가지고 활자화를 했어요. 녹음 된 거만 내려와 가지고 그 이후에 건 구할 수 없느냐 그러니까 교구청에서 참석한 외국 신부님이 소형 녹음기로 전문을 녹음한 걸 구해주더라고요. 그래서 활자를 다 만들었지요. 그때 사진도 엄청나게 찍었어요. 사람 얼굴이 너무 많이 찍혀서 인화하거나 유출되면 참석했던 사람 다 불려갈 것이다, 위험하다 그래서 본부에서 일괄 관리를 했어요.

 

주교님하고 그날은 시위에 성공했는데 다음날부터 매일 밤 기도회를 했었거든요. 회원들은 안 나가고 큰 강당에서 농성을 하고 있고 확성기로 방송도 하고. 그 다음부터는 신자들 저녁 미사하고 예배드리러 나가는 데 시위 할 줄 알고 못나가게 했어요. 주교님하고 맞닥뜨려가지고 시위하는 게 아니고 집에 가게 해달라고. 그런데 우리는 위에 지시로 절대로 못 내보낸다고 하고. 그러다 나중에는 하나하나씩 풀어줬는데 그런 내용도 찍었거든요. 서경원 씨 머리에 피 흘리는 사진도 있었고…. 그 필름이 나중에 들으니까 원주로 가서 전부 다 인화 작업을 했다하더라고요. 사진을 얼마나 찍었는지 활동사진처럼 돌려볼 정도였다고. 기도회 끝나고 전국 농민회 임원들을 비롯해서 한 삼십 여명 남아서 보름 넘게 더 농성을 하다가 전부 다 연행 안하는 조건으로 안동 농성을 풀었어요. 그런데 그전에 기도회 마치고 나오다가 안동에서는 유일하게 농협 직원이던 장성규 씨가 연행되고 타 지역 농민회원 6~7명도 연행이 됐어요. 그러고 각자 뿔뿔이 다 흩어졌는데 그날 기도회 이후로는 아, 이렇게 시위를 해도 되는구나 싶어서 더 크게 시위를 했어요. 그 담에 전국 단위 기도회를 전주 중앙성당에서 했지요. 나는 뭣 모르고 전국 기도회 한다니까 기도회라는 기도회는 다 찾아다니면서 구출 작전을 하는 거지요. 석방하라! 하고. 더 이상 농민회 활동 안한다 하다가 그런 일이 터지는 바람에 더 신나서 돌아다녔지요 뭐. 전주에서도 워낙 사람이 많으니까 오원춘 씨 어른을 전주에 모시고 갔었어요. 대구 오원춘 씨 재판하는 데는 기본적으로 갔고요. 진짜 전국 기도회에서 그렇게 응원하고 했는데 처음 재판할 때는 오원춘 형제는 이전에 이미 납치가 됐어도 양심선언을 해가지고 내가 말한 거는 사실이고 이후로는 내가 무슨 말을 하든지 상관하지 마라 했기 때문에 재판이 바로 될 수가 없지요. 시키면 시키는 대로 불판이지요. 세뇌시키는 대로. 대구 지법에 재판 내도록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전국 기도회도 열심히 다녔어요. 안동에서 한 대로 그렇게 시위 하면 되더라 싶어서 전주서도 중앙성당에서 전동성당까지 야간 시위가 이뤄졌어요. 8월 6일부터 시작해가지고 전국에서 기도회를 했어요. 그러자 YH 사건 터지고 부마사태(부마민주항쟁) 터지고. 노동계에서 일어나고 하니까 8월 6일 날 시발해가지고 그해 박정희가 죽음으로써 끝난 거죠. 유신정권이 그해 10월 26일로 막을 내린 거지요.

 

 

 

오원춘 사건 재판 과정을 지켜보다

 

오원춘 씨 사건 삼차 공판까지 나도 참석 했어요. 재판할 때 회원들이 많이 갔어요. 전국 임원들 거의 다 갔다고요. 만에 하나라도 오원춘 씨가 바른 말을 해서 거기서 뒤집어 지면은, 옳게 뒤집어 지면은 유인물 뿌리고 들고 일어나려고요. 그런데 영 뭐……. 인권 변호사가 둘인가 셋인가 여기서도 가고 1차 때는 두봉 주교님도 가시고. 인권 변호사가 겨우 얻어낸 게 딱 한 가지예요. 반대 심문하는데 오원춘 씨 검사 심문하는 데는 쉬러, 놀러 울릉도 갔다, 그런 식으로 자꾸 질문하고 그렇다 또 그렇다 하고 납치하고 정 상반된 걸로 계속 재판이 이끌려 가고 마지막으로 변호인 측 심문하는데 그 변호사가 오원춘 씨 어디 아픕니까? 왜 그래 힘이 없어요? 하니까 아유, 아픈 데가 많애요. 허리도 아프고 팔도 아프고 몸만 비틀만 아파요. 하더라고요. 왜 그렇게 아픈 데가 많겠어요? 약물로 당했는지, 얼마나 당했으면 얼굴이 하얀 게 본색이 아니더라고요. 그래 유도심문 조금 한 거 밖에 성과가 없고. 수녀님들하고 다들 전국에서 그만큼 기도회도 하고 시위를 했으니 바른 소리 한마디 할까 싶어 기대 했었는데 영 안 좋으니까 성직자들도 모였다 다 흩어지고요. 첨 재판할 때 하루 종일 하는데 창으로 바로는 볼 수가 없죠. 피고인석이 있고 재판관이 있고 방청석은 이쪽에 있으니까 오원춘 씨가 우리는 못 보지요. 대구 지법이 엄청 커요. 큰데도 거기 꽉 차고 첨에는 방청권 없이 아무나 다 들어갔어요. 오원춘 씨 얼굴이라도 보려고 창을 열어놨는데, 재판관 있고 피고인석 있고 그 사이에 창이 있어요. 창을 요래 열고 얼굴을 보니까 미안하다는 뜻인지 안다는 뜻인지 상종을 많이 했기 때문에 재판을 하다 말고 날 보고 눈인사를 하고 이러더라고요. 나는 눈짓으로 이래 하고. 그 다음 공판에 가니까 못 보도록 그 창을 탁 막았더라고요. 막고 방청권을 배부를 하는데 한 쉰 장 정도밖에 안주더라고. 성직자 몇 장, 내가 얻은 건 열 장 밖에 안 됐어요. 교구 김욱태 사무처장 신부님이 방청권을 배부 받아서 전국 농민회 회원들 쓰라고 주시더라고요. 전국에서 모여 있는데 누구는 주고 누구는 못 주고 할 수 없어서 내하고 같이 간 사람들도 못주고 나는 내 한 장만 가지고 전국 본부 회장한테 다 줘버렸지요. 그래 본부 회장이 아홉 장을 가지고 그 다음부턴 전략을 짰어요. 임원들이 멀리 전국에서 방청하러 오는데 법정 한번이라도 보고라도 가라고. 열 장을 가지고 처음에는 회원 열이 들어가잖아요. 그 다음에는 한 30분쯤 있다 그 증만 있으면 방청 하다가도 화장실도 가고 들락날락 할 수 있으니까 그 증을 가지고 다음 농민회원들한테 넘겨주는 거예요. 어떻게 재판하는지만 보고 20~30분 있다 넘기고. 재판을 하루 종일 해요. 점심시간 휴정해서 점심 먹고 와서 또 하고. 변호사라든가 성직자들은 점심을 우리하고 같이 먹었는데 물을 안자시더라고요. 화장실 안 가려고. 그렇게 해서 멀리서 온 사람들 다만 삼십분에서 한 시간씩 다 보게 했지요. 방청권 열 장 가지고. 그 다음 부터는 방청권을 주고는 팔에다 시퍼런 돼지비계에 급수 도장 찍듯이 찍었어요. 이 사람 외에는 방청 못하도록. 그런 와중에도 그해 약혼 상태여서 11월 5일로 결혼 날짜는 나있었어요. 그때 전두환이 들어서서 모든 청첩장, 부조를 절대 금지 시켰어요. 간소화, 절약 한다고요. 청첩장을 못 만드니 교구청 이양이 친척들한테 하고 알리라고 우편엽서에다가 타이핑을 해주더라고요. 결혼 축하해주러 연락을 받고 전국에서나 안동 관내 분회원들이 왔었어요. 그날이 마침 최병욱 회장 공판일과 겹쳤어요. 9월 15일 있었던 오원춘 사건 2차 공판에서 방청권이 없다고 못 들어가게 하니까 문을 두드렸다고 법정모욕혐의를 적용했어요. 회원들이 오전에 결혼식에 온 걸 정호경 본당 신부님인지, 류강하 신부님인지 여기는 좋은 자리고 거기는 응원이 필요한 자리니 그리로 가라고 보내시더라고요. 그래서 사진에는 회원들이 몇 안 찍혔어요. 10·26으로 유신이 막을 내리고 정호경 신부님이 풀려나고 긴급조치가 해지가 되고 나니까 정재돈 씨도 나오고 오원춘 형제도 12월 8일 석방됐지요.

 

 

1979년 11월 5일 안동문화회관 대강당에서 결혼식을 했다. 농민회 활동을 같이 하던 사람들과 함께.

 

 

안동연합회 창립 후 서서히 농민회 활동에서 멀어지다

 

안동연합회가 생기기 전 협의회 차원에서 함창 본당에서 추수감사제를, 전국 감사절을 크게 했어요. 그런데 안동협의회에서 제일 중점적으로 한 것이 하나는 농민 의식화, 즉 쌀 생산비 조사였어요. 내가 농사지었는데 얼마나 소득이 있는가, 수지타산이 되는가 하는 생산비 조사 사업하고 또 하나는 농협 민주화 운동으로 강제 출자 반대, 출자는 왜 해야 되며 농협은 어떤 구조여야 하는가 하는 그 두 가지예요. 양대 사건(함평 고구마 사건, 오원춘 사건)이 다 관료적인 하수를 받은 농협이 관련 돼 있잖아요. 그때나 지금이나 농촌문제의 정신적인 문제의 뿌리거든요. 그런 이유로 쌀 생산비 조사 추수감사제를 연합회 창립되기 전에 했었어요. 안동연합회가 창립되고 임원 선출 과정이 앞서 이야기 한 대로 되고 그러니까 내 생각으론 약간 소외감도 있었지요. 또 거기다 신혼 때였는데 집사람하고 같이 대전에서 전국 추수감사제를 하고 오다가 내가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보은재 꼭대기에서 버스를 세우고 내려서 먹거리를 사러 버스하고 버스 사이를 가로질러 가게로 가다가 차에 받혀서 공중으로 붕 떴다고요. 다행히 타박상만 입었지만 그날은 거기서 못 오고 보은 성모병원에서 집사람하고 있다가 왔어요. 죽다 살았지요. 그때는 농민회 총무를 하려는 사람도 많았어요. 81~83년도 까지 우리 애 둘 낳을 때까지는 정말 열심히 활동 했지요. 73년도 제주도 군대 생활부터 76년 시작한 농민회 활동까지 십여 년 동안 담금질하고 운동질 한 거지요. 정호경 신부님이 풀려나와서 안동 농촌 복음화 활동을 외국에 알리고 외국의 원조를 얻어서 1981년에 용상동에 농민회관을 지었거든요. 그때까지 아직 한국에는 자금 사정이 좋지 않았어요. 오원춘 사건 해결이 잘돼서 두봉 주교님이 추방 될 뻔한 것도 교황청에서 추방 안하도록 정치를 하고 또 나폴레옹 훈장도 받으시고. 이제 이쯤이면 내가 아니라도 저절로 굴러 갈 것이다 하고 생각했어요. 또 내 주위에는 같이 활동할 뿌리가 없었어요. 여기서도 내까지 네 사람이 쌀 생산비 조사를 했어요. 함창 조사보고대회 할 때까지도 동행한 사람이 있었는데 이런저런 일로 끝까지 같이 하진 못했어요. 극과 극은 상충하거든요. 그러면서 들어간 게 안동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원이에요. 송현동에 가면 군부대 쪽에 큰 건물이 있어요. 상지대 앞 율세동에 있던 것을 건평 700여 평에 5층 건물을 지어서 옮겨간 거예요. 거기 터 닦기 전부터 다 지을 때까지 관리하면서 여러 일을 했어요. 애들 셋을 데리고 집사람하고 거기 사택으로 들어가 버리니까 농민회 운동하고 자연스럽게 차단이 된 거죠. 내 하는 일이 있기 때문에 못가고 농사 지어가며 일을 하니 또 못가고. 일요일은 수녀님들 태워서 미사 보러 가야 되기 때문에 못가고. 수녀님들을 상지대학까지 출퇴근 시키는 미니버스 기사도 한 일이년 했어요. 그래도 명분 있는 시위나 모임에는 가서 멀리서 봤죠. 저 정도면 내가 없어도 되겠구나 하고. 안계 소몰이 행진이라든가 전두환 말년 노태우 들어설 때 안동 6월 항쟁 직선제 쟁취 시위라든가 그럴 때는 참여했어요. 수녀원에서 일 년 반 정도 있다가 나와서는 아이들 교육이며 농사일에 전념하면서 자연스럽게 농민회 활동과 멀어졌어요. 진짜 농민으로 돌아와서 농사일에만 전념하면서 여태 산거지요.

 

 

1987년 1월 8일 송현동 그리스도의 교육 여자 수녀원 신축 당시 관리인으로 근무할 때.

 

 

농민회원 칠순잔치를 계기로 30년만에 다시 만난 가톨릭농민회 동지회

 

그러다가 2015년 7월 27일에 농민회원 ‘칠순잔치’에 참석하면서부터 활동을 다시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농민운동 시작했던 사람들 얼굴 하나라도 보려고 갔지요. 예천 풍양농촌선교성당에서 안동연합회 회원 중에 70살 이상 되는 사람 회갑 잔치를 했다고요. 혹 옛날에 같이 운동했던 사람 하나라도 볼 수 있을까 하고 집사람하고 갔어요. 삼십 몇 년이 지난 뒤에. 그 안에 소식은 잘 모르고 교회 소식지로만 들었지요. 대구경북연합회 창립회 때 온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요. 아는 사람도 없고. 그런데 안동연합회에 처음 농민교육 받을 때 사진이 한 장 있더라고요. 내가 들어있는 사진이. 그 교육 받을 때 옷이 함평 고구마 사건 때 입었던 그 재건복이래요. 정재돈 씨, 이길재 씨도 나오고 정호경 신부님도 나오고 하는 그 사진을 걸어놨더라고요. 얼마나 반갑던지. 칠순잔치 있고 얼마 안 있어 백남기 농민 물대포 사건이 터졌어요. 왜 그 많은 노동자 시위 중에 하필이면 가톨릭농민회냐고요. 가톨릭농민회는 권익운동도 하고 시위를 세게도 안한다고 이제는. 생명공동체하고 우리 먹거리하고 친환경 농사의 근본적인 문제 이거만 하지. 전에처럼 안하는데 왜 하필 백남기 형제가 죽느냐 말이라. 농민회원이 혼수상태에 있다는 그 소식을 접하고 안타까워하고 있는데 처음 농민회를 창설했던 동지들이 전부 다 모이는 동지회에서 그때 당시 임원들한테 SNS로 연락이 왔어요. 전국 동지회 회장은 이길재 씬데 전·현직 농민회원들을 모아서 긴급 동지회를 연거죠. 서울 의과대학 병원 옆에 도산 안창호 흥사단 회관에서 한다고 해서 안동 동지회 회장 배용진 씨, 진상국 씨, 사무실에 강성중 씨하고 실무자 하고 대여섯이 올라갔어요. 가니까 전국 교구에서도 안동 교구가 인원이 젤 많더라고요. 그만큼 농민들이 겁을 먹어가지고. 초창기에 전국에서 봤던 얼굴들 삼십 몇 년 만에 첨 본거지요. 어떻게 하면 이 일을 풀어나갈 것인가 하는 회의를 오후 5시에 시작해서 밤 깊도록 했어요. 서울대 병원 앞에서 미사도 드리고요. 병원 마당 앞에서 상태만 듣고 병실은 못가보고 한 40~50명 모였죠. 가서 보니 겁먹을 것도 아니다 싶어 그 담에 또 각 분회에서 빈소를 지키고 성금도 하고. 안동에서도 백남기를 살려내라 하고 여러 번 시위를 했잖아요. 그러고는 오늘날까지 새로 들락날락거리면서 촛불 들러 가고. 그러니 그때 동지회를 안 하고 전국의 동지들을 안 불러 모았으면 처음에 난 그날만 가고 안 갈라 그랬어요. 그런데 두 번, 세 번 가게 되더라고요. 그 뒤로 한 번도 안 빠지고 교류를 하고. 한겨울에 박근혜 하야 촛불 집회를 안동 조흥(신한)은행 앞에서 했잖아요. 촌에서 한 번도 안 빠지고 차타고 혼자 갔잖아요. 누군지 모르도록 얼굴 안 나타내려고 혼자 갔어요. 간간히 SNS에는 다녀온 사진 올리고. 첨 집회 할 때 가수들이 한영애가 부른 조율을 불렀다고요. 그걸 동영상을 찍어서 SNS에 올리고 시위 하는 것도 올리고. 이듬해 박근혜가 끝날 때까지. 박근혜가 구속되고 난 뒤에 2차 동지회를 안성 미리내 성지 옆에 있는 전국 농업협동조합 임원 연수원에서 했어요. SNS 시작한 계기도 백남기 사건 때 동지회 사진을 찍고 그 사진을 첫 번으로 올리면서 부터예요. 첫 동지회 때는 궁금하던 이병철 씨는 올 줄 알았는데 안 왔더라고요. 오원춘 사건 때 워낙 열성적으로 했고 6월 항쟁을 전국적으로 진두지휘 한 사람이거든요. 시집을 4집인가까지 냈어요. 전국 동지회 회장 이길재 씨도 그렇고 이제는 여든 훌쩍 넘은 분들이 많아요. 동지회 모임에 지금까지 세 번 참석하면서 옛 동지들과 다시 교류하고 있어요.

 

 

 

 

백남기 농민 물대포 사건을 계기로 2015년 12월 8일 서울 흥사단 회관에서 있었던 첫 전국 가농 동지회에 참석. 왼쪽 두 번째부터 최병욱, 서경원, 이길재, 임봉재. 구정회 씨가 찍어서 SNS에 처음 올린 사진이다.

 

생명공학(가축 유전자)을 연구하고 있는 막내 자을 씨가 몇 년 전 귀촌해 함께 살고 있다.

 

 

땅이 해코지 하지 않는 세상을 꿈꾸며

 

함평 고구마 사건 당시 농민들은 이런 구호를 외쳤다.

 

'‘농민의 피와 땀이 범벅된 고구마가 노변에서 눈비를 맞고 굴러 밟히는 것은 곧 농민이 짓밟히는 것과 다름없다.’

 

 

 

 

 

 

그 현장에서 찍힌 사진 한 장을 사십여 년 만에 인터넷 검색을 통해 발견하고 SNS에 올렸던 게 계기가 되어 구정회 씨의 초기 가톨릭농민회 활동이 지인들에게 알려졌다. 진땅을 다지며 밟고 지나간 숱한 발자국의 흔적처럼 지워졌을지도 모를 그의 인생 이력들을 다시 끄집어낼 수 있었다. 구정회 씨는 시간이 오래 되어 본인의 구술이 다소 혼돈이 있을 수도 있음을 염려해서 몇 차례에 걸쳐 기억을 더듬고 자료들을 살폈다. 그러나 “땅을 재산으로 봐서 다툼을 하거나, 무시하거나, 해롭게 해서는 절대 안 된다. 땅이 해코지 한다”’던 정호경 신부님의 생전 말씀 하나는 선명하게 가슴에 새기고 살아왔다. 역사적으로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의 몰락 이전에는 분노한 농민들의 봉기가 있어왔음을 그는 강조했다. 땅은 농민이며 농민은 곧 땅이므로 땅이 해코지 당하지도, 해코지 하지도 않는 세상을 그는 여전히 꿈꾼다. (글/  신준영 5longgole@hanmail.net)

 

 

 

신준영
2019-08-19 오후 2:3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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